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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내가 욕망하는 동안 누군가는 희생된다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1) 연극 「살」을 통해 본 세상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 연재는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음식 먹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
 
음식을 먹는다는 건 기초대사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여고생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날씬할 수 없다. 대입을 앞둔 학업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달고 기름진 간식을 먹게 되기 마련이다. 생략해도 살아갈 순 있지만, 소름 끼치도록 단 디저트라도 섭취해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인간은 억압된 다른 욕구를 대신해, 상대적으로 만만한 식욕을 살살 달래가며 만족시키는 게 아닐지. 먹고 나서 토할지언정 일단 배부를 만큼 먹는다.
 
음식의 비주얼도 그럴 듯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에 자랑하려면 진짜 맛있는 음식보단 맛있어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자주 가는 레스토랑 수준이 나의 입맛과 센스의 수준이 된다. 고급 호텔에서 음식을 먹을 땐 심지어 복장 제한까지 받는다. 해외출신 주방장이 만들어 준 디너 코스님이 보시는 앞에서, 우리는 감히 추리닝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이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먹을 거리가 넘쳐 손 한 번 대지 않은 반찬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세상에서, 다음 끼니에 뭘 먹을지 고민할 시간은 있어도 자신이 먹은 것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과연 내가 먹은, 또 먹고 있는 음식이 내 일이기만 한 걸까.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한다든가, 유기농 식품만 구입하는 것도 결국 ‘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 식탁에 오르기 위해 비좁은 우리에서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사육되는 가축들, 나 대신 그 가축을 도살하는 사람들, 채소를 기르기 위해 몸에 해로운 제초제를 뿌리는 농부들, 그걸 뒤집어쓰고 말라 죽는 ‘잡초’들, 그리고 한쪽에선 그냥 줘도 먹고 싶지 않을 만큼 조잡한 음식조차 먹을 형편이 안 되어 굶는 다른 사람들….
 
하지만 그런 고통들이 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어쨌거나 ‘남’의 일이지 않은가!
 
‘승자’와 ‘욕망’에 대한 이야기

▲ 희생하는 약자를 앞에 세우고, 강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포식활동을 계속해간다. 연극「살」의 포스터.

 
4월 남산예술센터가 2011 시즌프로그램 개막작으로 무대에 올린 연극 <살>(이해성 작, 안경모 연출)은 어떤 논리에도 우선하고 정당화되는 ‘승자’와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재적인 외환딜러이자 고도비만인 ‘신우’는 포식동물처럼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이다. 그는 업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술과 고기로 푼다. 예의도, 의리도 없지만 능력은 뛰어나 회사 이윤을 좌지우지 할 정도이므로, 동료들은 내키지 않더라도 그 앞에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다. 승자와 강자 앞에선 이해관계자 누구도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우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홍인’은 신우의 직장동료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진흙 쿠키로 배를 채우는 저개발국가 아이들도 생각하라며, 친구의 이기적인 식욕을 나무라고 채식을 권한다. 부자 나라의 가축을 먹일 곡물을 저개발 국가로 보낸다면, 아이들은 진흙쿠키를 먹지 않아도 된다. 홍인은 아이티로 가서 의료봉사를 하는 것이 꿈이다.
 
신우의 생활이나 태도는 그 직업의 속성과도 닮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오가는 외환시장에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패자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연히 내쳐진다. 인정도, 정의도, 패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안전망도 없다. 약자는 설 곳조차 없다. 반면 자본에 대한 숭배와 엄청난 액수에 대한 탐욕은 정당화된다. 돈이 해결 못하는 일도 있나. 돈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사는 게 곧 돈이니까.
 
사회적 약자의 일은 ‘남’의 일
 
사회적 약자의 일은 ‘다수’에게, ‘일반’에게, 그리고 ‘정상인’에게는 남의 일일 뿐이다. 신우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엔 소수자와 동성애자, 장애인들의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내 일이 아니니까. 속도를 늦춰야만 눈에 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는 살아가는데 ‘남의 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접시 위 스테이크는 식용 가축의 육체일 뿐 아니라, 저개발국 아이들의 희생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신우는 상관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먹어도 모자랄 옥수수로 연료를 만드는 바이오에너지 회사에 주식을 투자한다.
 
그러나 동생 ‘신혜’는 다른 처지다. 간질 때문에 취업도, 결혼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종교적 출가조차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혈연관계에 있는 신혜는 신우가 마음 쓸 수밖에 없는 유일한 약자이다. 어머니가 간암에 걸리자 신우는 거부반응 없는 자신의 간을 이식해드리겠다고 큰소리치지만, 간수치를 낮추기 위한 운동도 식이요법도 지키지 못한다. 반대로 거부반응 때문에 어머니에게 간을 이식할 수 없는 신혜는 절박한 처지의 다른 사람을 위해 수술대에 눕는다.
 
어쩌면 신혜는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라 환자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신혜의 입장은 장애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활동에 대한 의지가 있지만, 사회에선 장애여성을(신혜를) 원하지 않는다. 철저히 배제하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여성의(신혜의) 포용력과 감수성은 다른 사회적 약자와 공명한다. 미친 듯한 속도전과 화려한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포함한 약자를 돌아보도록 브레이크 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건 정당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약자의 헌신과 희생보다는 강자의 그것이 더 빨리, 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강자는 헌신하지도, 희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약자의 희생에 대한 그들의 예찬과 미화는 비겁하다. 희생하는 약자를 앞에 세우고, 강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포식활동을 계속해간다.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LGBT(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페스티벌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권 찾기 시위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면 절망스럽다. 지하철역에 휠체어 리프트밖에 없어서,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들고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 젊은 부모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에 연대했다면 지하철엔 이미 리프트 대신 더 많은 엘리베이터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장애인들의 시위, 남의 일이겠거니 넘겨도 그게 언제까지나 남의 일일 수는 없다.
 
내 바람과는 달리, 사회적 약자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듯하다. 양심과 지성의 상징이었던 대학생들도 이젠 좋은 학점 따내느라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니,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불의조차 쉬쉬하며 덮으려 한다.
 
<살>의 작가도 이런 상황을 의식한 것일까. 신우에게도 몰락의 차례가 온다.(어찌됐건 이건 연극이니까) 그는 강자였지만, 먹이사슬 꼭대기를 차지할 만큼 강하진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자본투기의 꽃이라는 헤지펀드로 이직도 실패했다. 애인이자 후배였던 ‘안나’는 그를 배신하고, 여전히 고도비만이다.
 
홍인도 진로를 바꾼다. 아이티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대신, 장인이 병원을 개업하라며 준 20억을 받고 한국에 눌러 앉기로 결정한다. 아무도 무언가 하리라는 기대하지 않았던 장애여성 신혜만이 차근차근 자신의 페이스대로, 자신의 길을 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욕망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연극은 관객에게 훈계하는 대신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게 던져줬다. 계속해서 달려야 떨어지지 않는 러닝머신 위에서, 자신의 욕망과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실패하고만 비만한 ‘프로메테우스’ 신우. 그는 자신의 맨살을 다 드러낸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물론 난 그가 수도승처럼 자신의 욕망을 억압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게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조금씩 양보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만.
 
거창한 양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원산지 이름과 추출 방식에 대해 전문용어 한두 마디쯤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국민 음료” 커피만 해도 그렇다. 커피콩 생산 단계에선 원가를 아끼기 위해 저개발국가 아동들까지 동원된다. 내가 마시는 커피가 그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커피콩을 따와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일까.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사기 위해 결국 커피 체인을 소유한 대기업에게 대부분이 돌아갈, 밥 한 끼 먹을 수 있을 돈을 기꺼이 지불한다.
 
그대신 맛이 조금 덜 하더라도,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선택을 한다면 어떨까. 공정무역 커피도 그 시장이 커지면, 지금보단 종류도 다양해질 것이고 맛도 더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제 값을 받는 커피콩 농장은 아이들에게 커피콩을 따오게 하는 대신 그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안이 있음에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거대 다국적기업들만 계속 몸을 불리고, 커피콩밭의 면적을 늘리기 위해 가난한 국가의 숲은 잿더미가 되고 있다. 저개발 국가 농부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그 아이들은 계속 노동을 하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둘러싼 이 부당한 상황을 언젠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나’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기억해야 한다. 탐욕의 끝은 환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장을 설명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하던 것도 필요 이상으로 손에 넣게 되면 더 이상 만족감도, 흥미도 잃게 된다. 자본주의는 그 ‘탐욕’을 기반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우리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하도록,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것을 갖길 바라도록, 비윤리적인 방식으로라도 내 주머니를 불리고, 그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만든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 위주의 사회에서 ‘내 욕망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한 번쯤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쫄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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