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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몸 이야기' 다시 읽기: 또래에게 침해당하는 몸의 권리
연예인들이 학교 다닐 때 친구를 찾는 내용의 TV 오락프로그램이 있다. 방송 중에 자주 나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연예인이 초등학교 때 소문난 장난꾸러기여서 여자애들 치마를 들췄다거나, 좋아하는 여학생 집에 쫓아갔다 문을 안 열어주자 담을 넘었다거나, 학교에 “빨간책”을 가져와 돌렸다거나, 친구들을 집에 데려가서 장롱 속에 숨겨놓은 비디오를 보여줬다는 식의 얘기다.
그런 일화들이 나올 때마다 나의 옛 기억이 떠올라 불쾌해지곤 한다. ‘장난꾸러기’라니, 얼마나 귀여운 말인지. 그러나 그 시절 그 ‘장난꾸러기’에게 당하던 또래 여자아이들 중엔 그들이 끔찍하고 공포스럽기만 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남자애가 유난히 나를 괴롭혔다. 신발 갈아 신을 때 휙 지나가며 내 가슴이나 등(브래지어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성기 부위를 만지고 뛰어갔다. 화장실에 가면 몰래 따라와서 문을 열려고 하거나 창문으로 들여다 봤다.
소풍인지 견학인지 함께 버스를 타고 갈 일이 생겼는데, 그 애가 내 옆에 떡 앉길래 얼른 자는 척 했다. 그 애가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손으로 내 팔을 툭툭 치면서 “야, 야!” 불러대는 거였다. 계속 자는 척하니까 때리는 강도가 점점 세져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랬더니 포르노 비슷한 걸 보고 왔는지, 혐오스런 용어를 쓰며 성행위와 신체부위를 묘사하는 말들을 해댔다.
선생님에게 일러도 봤지만,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 한 마디 밖에는 하지 않으셨고, 내가 두 번째로 말했을 때는 좀 귀찮아 하시는 눈치였다. 나 또한 그 애가 나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자세히 묘사하기가 창피해서 “00가 때려요. 괴롭혀요.”라는 말밖에 못했다. 그 애는 한층 기고만장해서 더욱 심하게 굴었고, 내가 그 애를 피해 다녀야 했다.
내가 이렇게 괴롭고 무서운데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학교 다니기가 힘들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애가 나를 강간하려고 하는 꿈을 꾸기까지 했으니 당시 나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남자아이들이 많았다. 노래가사를 음담패설로 바꿔 부르고, 공책에 남녀 성기를 그려서 여자애들한테 보여주고, 쓰레기 소각장에 버려진 생리대를 교실에 가져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교실 한가운데서 남자아이들이 한 남자아이의 바지를 뒤에서 벗겨, 그 아이 하반신을 교실에 있는 모든 애들이 목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애는 울고불고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고 웃어대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했던 행동들은 성적 괴롭힘이었다. 어른이었다면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겨졌을 행동이다. 그럼에도 그런 행동들을 훗날 ‘장난’으로 기억하며 오히려 순수하고 좋은 추억이었다고 회상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성적 호기심은 초등학교 때가 아니라 더 어렸을 때부터 생긴다. 그런데 많은 아이들이 성적 호기심과 성적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자란다. 성적인 괴롭힘을 통해 타인과 교류한 아이들이, 커서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을까? 어렸을 때 뒤틀린 성 의식은 커서도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성폭력 사건이 이렇게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즘은 학교에서 성교육도 실시하니까 조금 달라졌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성적인 괴롭힘을 ‘장난’이라고 여기고, 아이들은 그런 ‘장난’을 치면서 철이 든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해버리는 문화도 여전한 것 같다. 그런 문화 때문에 지금도 학교에서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몸의 권리를 침해 당하고 있을 것이다. (정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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