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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35)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목소리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다. 오직 빛으로만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증오로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증오를 몰아낼 수 있다. 증오는 오히려 증오를 증폭시킬 뿐이다. (.......) 증오를 일으키는 증오,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 악의 연쇄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완전한 멸망이라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 검둥소, 2006)
 
▲ 메데아 벤저민,조디 에번스 저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검둥소, 2006)  

 
연평도 포격이 있던 날, 그 날부터였을 것이다. 내내 속이 편치 않다.
 
한국과 미국군함이 서해안에서 한미연합훈련에 들어간다, 북한이 화학전을 준비하고 있고 이 달 내 경기도를 공격할 계획이다, 우리 군은 동·서·남해안에서 일주일간 사격 훈련한다, 북한은 이미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전면전 준비가 끝났다, 북한이 3차 포격을 시도하면 전투기로 대응한다는 등의 기사가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내 속에 납덩이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린 시절의 그 불안하고 소름끼치는 꿈이 다시 떠올랐다. 전쟁을 겪은 적도 없는데, 어린 나는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느라 밤새 뒤척인 날이 여럿이었다. 알지 못하는 전쟁의 공포가 내 무의식 속 깊이 뿌리내린 것이 분명했다. 반공교육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 살아가려면, 전쟁에 대한 공포심, 적에 대한 증오 정도는 당연히 품어야 하는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두려움, 증오심 같은 부정적 감정에 짓눌리고, 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나? 즐겁게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는 걸까? 이 질문들이 내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분홍빛 책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이라크 전에 반대해 ‘코드핑크(CODEPINK)’를 만들었던 메데아 벤저민과 조디 에번스가 엮은 것으로 전쟁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안내한다.          
  
진짜 ‘적’은 바로 ‘전쟁’
 

실제 전쟁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전투원만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 어린이, 노인과 같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전체 사상자의 70%에 이른다고 한다. 군사용어인 ‘부수적 피해’로 폄하하기에는 민간인 희생자들의 피해가 너무 크다. 어머니들은 아들을 잃고, 아이들은 부모와 형제를 잃고, 여성들은 강간·납치당하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도록 종용한다. 상대편은 죽여 없애야 하는 적이 된다. 그래도 적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에, 살인기계가 된 병사들의 정신적 외상은 불가피하다. 전쟁터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이들이 삶에 부적응해 자살하거나 노숙자, 알콜중독자로 전락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다비드 칼리의 <적>(문학동네, 2008)       

 
이토록 잔혹한 전쟁을 피하려면, 메데아 벤저민과 조디 에번스이 조언하듯이, “‘타인’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적’에게 손을 내밀고 공감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알아야 하고, 소위 ‘적’과 소통할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적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적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것, 적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적이라고 칭한 타인을 너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는 지적은 옳다.
 
결국, 적도 나도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인류애를 가질 수 있다면, 두려운 타인인 ‘적’을 평화를 원하는 ‘우리’로 충분히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도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다.
 
“제조되는 총 하나하나, 진수되는 전함 하나하나, 발사되는 로켓 하나하나가 종국에는 굶주리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춥고 입을 게 없는 사람들이 하게 될 절도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장한 이 세계는 돈만 써버리는 게 아닙니다. 이 세계 노동자들의 땀, 과학자들의 비범한 재능, 아이들의 희망도 써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서, 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건 바로 인도주의입니다.” (아이젠하워의 경고,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 신시아 매키니, ‘새로운 미국’ 중에서)
 
사실, 우리의 진짜 적은 ‘전쟁’ 그 자체다.
 

미국인으로서 이라크 추가복무를 거부한 이라크 전쟁 참전 퇴역군인 카밀루 메히아는 군과 정부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군인이기에 앞서 인간임을 깨닫고, 양심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군인으로서의 의무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는 연평도 포격 이후 해병대 지원자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죄인이 되는 이곳에서는 ‘병사가 싸우기를 거부하고, 예비군이 복무를 거부하고, 노동자가 무기 싣기를 거부하는 일’이 절대로 ‘아주 작은 저항’일 수 없다. 인도주의를 철십자가에서 내려줄 날이 요원한 것일까?
 
‘민주주의는 끝없는 불침번을 요구한다’
 
무수한 희생자를 양산하는 전쟁, 그 전쟁의 원인을 ‘적’에게 돌리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판단이다.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애국’을 부르짖으며 위기를 조장하는 언론이 있고, 전쟁으로 돈을 버는 기업이 있으며, 대화와 협상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정부가 있다. 게다가 이들의 감시를 게을리 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전쟁으로 피해를 볼 사람이 우리 자신인 만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를 전쟁으로 몰고 가 위험에 빠뜨리려는 권력들-정치권력, 경제권력, 미디어 권력-을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끝없는 불침번을 요구한다’는 첼리 핑그리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우선, 무비판적인 언론에 맞서 독자적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미국 언론이 이라크가 세계평화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쏟아냈듯이, 우리 언론도 북한이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쏟아내고 있는 참이다. ‘전쟁발발을 막으려면 언론을 변화시켜라’는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겠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의 세계화 흐름은 전쟁도 돈벌이에 이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 후 재건 계약으로 돈을 버는 기업들이라면 전쟁도 대환영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지면 누가 이득을 챙기게 될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믿을만한 지도자, 즉 “전쟁이라는 공포에 대해 제대로 알고, 평화를 이뤄내는 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쓸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함은 물론이다. 더불어, 지도자가 책임을 다하도록 감시하고, 정부정책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항의 편지를 보내거나 대규모 항의집회에 참여하는 등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호전적인 권력들을 경계하기 위한 ‘평화부’ 창설은 이 땅에서 불가능한 일일까?
 
여성들이여, 평화의 씨를 뿌리자
 
▲ 문정현 신부의 책 <불어라 평화바람>(검둥소, 2008)

 
“우리 지구에 이제 폭력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해결책으로 삼는 일이 더 이상 용납되거나 인정되거나 정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몸속에, 가슴 속에, 영혼 안에 해답을 담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이루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를 보아야 하고, 아는 그대로를 알아야 하고,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가 아는 것을 당당히 외쳐야 한다.”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 이브 엔슬러,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지하라’ 중에서)
 
수 년 전, ‘코드 핑크’라는 이름 아래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들이 모였듯, 여성이야말로 평화의 길에 성큼 앞장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녀 차별적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강요한 덕목이 비폭력, 보살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평화에 익숙하다. 이스라엘 여성들과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서로의 적이 되지 않겠다고 화해를 모색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긴 세월동안 전쟁과 폭력에 몰두하느라 잃어버린 평화와 비폭력의 지혜를 남성들도 배워나가면 된다. 실제로 여성들과 함께 평화의 길에 오른 남성들도 적지 않다.
 
꼭 전쟁을 겪어야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중단시키기에 앞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 각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가야 한다. 당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마치 평화의 씨를 뿌리듯 희망을 가지고 지속해야 한다. 긴 시간이 걸린다면 그만큼 유쾌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비결일 것이다.
 
누구나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풍성한 수확을 꿈꾸며 평화의 씨를 뿌릴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소식이다. 나도 청소년들과 나눌 즐거운 평화 수업을 준비해야겠다. 평화의 씨앗이 자라면 자랄수록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이 더는 발붙일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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