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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34)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글 쓸) 시간이 없고, (글 쓸)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의 신비를)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10)
 
과연 그럴까? 나는 조르바 식의 이분법에 동의할 수 없다. 인생의 신비를 살 줄 몰라서 글 쓸 시간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삶 자체가 나를 글의 세계로 인도한 것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글쓰기는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일기 쓰는 행복한 습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일기를 쓰면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0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싶다. 최초의 일기는 교사에 의해 순전히 강요된 글쓰기였지만, 어느 순간 아무도 나를 강제하지 않는데도 난 습관처럼 일기를 쓰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내게 일기는 누군가를 향한 글쓰기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였던 것 같다. 하루가 끝날 무렵,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며 내 기분, 느낌을 적는 것이 그냥 좋았다. 소중한 기억, 잊고 싶지 않은 사건을 기록해 두는 저장고이기도 했고,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고해소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의 일기는 내 삶의 흔적이었다.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난 산더미같이 쌓인 일기장을 묵묵히 바라보다 한꺼번에 북북 찢어 버렸다. 지극히 평범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남에게 특별히 숨겨야 할 과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과거의 기록을 모아놓고 틈틈이 들여다보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고, 추억은 내 머릿속 기억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현재와 미래를 중시하면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내 성격이 한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일기장을 모두 내던지고 나니, 오히려 새로운 삶을 시작하듯 기분이 상쾌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내 일기쓰기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내, 나는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날마다 성실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내키면 언제나 일기장을 펼쳐놓고 글 쓰는 일은 변함없이 좋았다. 어느덧 일기 쓰기는 나의 행복한 습관이 되었고 일상적 삶이 되었다.
 
지금도 난 일기 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더는 나만을 위한 비밀 일기장은 없다. 이제 일기조차 익명의 다수와 공유하는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까.
 
소통을 위한 글쓰기
 

▲ 내가 써서 세상에 내놓는 글은 마치 망망대해에 던져진 유리병 속의 편지와 닮았다. 내 글이 모든 이의 마음에 가 닿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우연히 내 글을 읽은 누군가와 내 생각과 마음이 서로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 영화 '병 속에 담긴 편지' 중) 
 
요즘 내게 글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난 누군가와 내 생각을 나누고 싶을 때 글을 쓴다. 나만을 위해 글을 쓰기보다는 나 아닌 사람들과 생각, 기분을 나누면서 글을 쓰는 것이 만족스럽다.
 
내가 글을 소통의 도구로 삼은 것은 편지글을 쓰면서였다. 청소년기에 나는 오직 편지로만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친구를 두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 또래이기도 했고, 나보다 어리거나 내 할머니 동년배이기도 했다. 이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은 전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미지의 세상을 알려주었고, 또 내가 모르던 세상도 내가 아는 세상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까지 가르쳐주었다.
 
그러다 가까운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게 되면서는 편지가 고마운 소통의 통로가 되어주었다.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각자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간적 거리를 메워나갈 수 있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편지글은 전자메일로, 블로그 안부글로 바뀌어 갔지만,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어울려 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리상의 제약 없이 친구를 사귀고 가까운 이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언젠가부터 익명의 사람들과도 소통을 시도하게 되었다. 여기서 ‘도서관 나들이’란 글을 쓰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내가 읽어 좋았던 책들, 그 책들이 내게 안겨준 생각의 편린들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감을 준다.
 
물론,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라는 글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좋은 책을 찾아낼 수 있고, 책과의 만남이란 것도 타인의 소개 따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마음 깊이 동의한다. 그러나 책 읽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책을 직접 읽기 전에는 타인의 서평을 밀쳐두지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타인이 내가 풀어놓는 책소개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써서 세상에 내놓는 글은 마치 망망대해에 던져진 유리병 속의 편지와 닮았다. 내 글이 모든 이의 마음에 가 닿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우연히 내 글을 읽은 누군가와 내 생각과 마음이 서로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는 편이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통할 수 있기를 꿈꾸는 것, 그런 동화 같은 일이 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으리라 그냥 믿어보는 것이다. 소통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꿈꾸는 나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책이 없어 책을 쓴다
 
▲파스칼 로즈의 <로즈의 편지>(마음의 산책, 2003)

 
타고난 글 솜씨를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단 한 번도 직업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다 지치면, 그 책을 ‘내가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지금도 읽고 싶어 쓰고 싶은 책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책들의 씨앗을 내 가슴에 품고 산다. 안타깝지만, 난 이 씨앗 대부분이 꽃을 피울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메말라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읽고 싶은 글, 책을 쓴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나 앨리스 워커도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썼다고 한다. 거기다 앨리스 워커는 ‘자신이 읽었어야만 했던 책’을 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읽고 싶은 글이나 책에 대한 욕망이 나 혼자만의 생각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무수한 글을 읽다 보니 궁금한 것이 늘어나고, 호기심을 채우려다 보니 책을 찾게 되고, 그러다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없어 글을 쓰고 싶어진다면, 어떨까? 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다 보면, 좋은 글을 쓰기에 내 생각, 지식만으로는 부족해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이때 이미 써진 수많은 책들을 펼쳐들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글 읽기를 재촉하고, 글 읽기는 다시 글쓰기를 불러서 끝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 갇히는 느낌을 떨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과정이 이미 존재하는 책이나 앞으로 존재할 책을 통해 타인의 삶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열린 삶의 방식이라고 말해도 지나칠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을 쓰다 저녁나절 잠시 도서관에 다녀왔는데, 마침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파스칼 로즈란 프랑스 작가가 쓴 <로즈의 편지(마음의 산책, 2003)>란 책이다. 죽을 뻔한 작가는 이미 죽어버린 작가 톨스토이에게 자신의 생생한 체험과 뒤얽힌 생각들을 편지글로 풀어놓는다. 그녀의 이 독특한 얇은 책이야말로 인생의 신비가 낳았다 해야 할 것이다.
 
이번 글은 그녀의 책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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