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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백에 드럼채가?
오기와 끈기의 김춘자
 
김춘자. 그녀와의 최근 만남은 마침 중학동창모임 자리에서 이뤄졌다. 식사가 대충 끝나고 시국 이야기며 자녀들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우스개가 나올 때쯤, 그녀가 핸드백에서 나무도막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고 하니, 드럼채라는 것이여. 내가 시방 드럼을 배우는 중인데….”
 
▲  김춘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남을 웃기는 재주를 타고났다.
이번엔 또 무슨 얘기로 우리를 웃기려고 저러나. 잔뜩 기대에 찬 시선들이 그녀가 꺼낸 드럼채와 그녀의 표정 사이를 오갔다.

 
어려서부터 그녀가 있는 곳엔 늘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남을 웃기는 재주를 타고났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녀가 하면 어찌나 재미있게 들리는지. 학교 다닐 때를 돌이켜보면 오락시간과 그녀는 한 묶음으로 기억된다. 수업 중에라도 틈이 생겼다 하면 그녀의 우스개가 슬슬 풀어져 나와 교실을 한바탕 웃음 속으로 몰아넣곤 했다.

 
그런 그녀의 끼는 어른이 되어서도 소멸되지 않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모임이나 잔치 집에 가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사회가 맡겨졌다. 직장에서도 친목회장을 도맡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드럼채를 들고서 무슨 우스개 소리를 하려나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더니, “내가 이 나이에 드럼 배울 생각을 한 이야기 좀 들어볼텨?” 하면서 꺼낸 얘기인즉슨 이랬다.

 
“얼마 전 내 생일에 남편이 축하한다며 기타연주를 해주지 않았겠니? 그 양반이 원래 콩나물 대가리 하나 읽을 줄 모르는 위인이거든. 그거 연주하게 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 기타 배운지 3개월이 되도록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안되니까 때려치웠어. 그랬다가 언제부턴가 다시 배우러 다니더라고. 난 그러나 보다 했는데, 글쎄 이렇게 감동을 줄 줄이야…. 게다가 이젠 섹소폰을 배우러 다닌다. 아무리 바빠도 자기 일 끝나면 늦게까지 전철 갈아타며 학원 가서 배우고 오는 거야.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내년엔 둘이서 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우리 아이들이 보게 되겠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던 결혼

 
“그 영감님이 우리를 여러 차례 놀라게 한다야.”

 
우리는 저마다 말을 거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생활 내내 지병으로 앓던 남편이었다. 급기야 간암 선고까지 받았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누가 보아도 회복이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헌데 간이식수술을 한지 엊그제 같은데,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사회생활도 활발하게 하고 젊은 시절 못다 표현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힘든 삶을 살았지만 밝고 재미있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여줬다.
지금에서야 과거의 일이 되었으니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하지, 그녀는 결혼부터가 순조롭지 않았었다.

 
“내 결혼은 애초부터 부모님의 반대로 시작되었지. 내가 부모였대도 반대했을 거야. 신랑감이란 사람이 그때만해도 직장도 없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데다가 투병 중에 있었으니…. 돌봐줄 사람마저 없었거든. 그런 곳에 반듯하게 키운 딸 시집 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사람한테 시집가면 석 달도 못되어 과부가 된다’고, 점순 어미가 그녀의 부모에게 점발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집에선 사생결단으로 말릴 수밖에.

 
그런데도 그땐 무슨 꺼풀이 씌었던 것인지, 그녀는 ‘저 남자의 건강을 되찾아 주어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게 하리라!’는 마음 하나로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그녀의 표현대로 “순수하기에 앞서 무모하기 그지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니 내 인생여정이 어땠겠어? 나는 포기할 줄을 몰랐지만, 남편의 병세는 점점 종점을 향해갔어. 게다가 사춘기 지나면서 아이들의 방황은 끝간 데를 모르겠으니…. 내 직장생활인들 오죽했겠니?”

 
그렇게 힘든 삶인 줄 누가 눈치라도 챘을까. 교직에 25년간 몸 담아오면서 늘 평안하고 웃는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데다가, 사람들 웃기는 재주는 또 오죽 뛰어난지. 그녀는 삶의 힘겨움을 호소할 때조차, 밝고 재미있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여준 사람이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  친구들과 석모도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왼쪽이 김춘자
남이 듣고 웃음지을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도, 몇 년 전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친구들에게 드러내었다. 그녀의 남편은 간이 악화되어 급기야 간암으로 돌아섰고, 간이식수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몸이 아프니 주위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들고,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그녀는 운명을 탓하는 마음이 커졌으리라.

 
하지만 그녀에겐 우리가 “대장부”라고 부를만한 힘이 있었다. 위기와 불행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내가 누구냐, 오기와 끈기의 김춘자 아니냐!” 하는 자세로 치열하게 살았다.

 
남편의 거부를 무릅쓰고 중국 행을 결정하고, 결국 설득을 해서 간이식수술을 받게 했다. 수술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눈물 글썽이는 그녀다. 듣는 이의 마음도 조마조마해진다.

 
“수술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수술후유증을 이겨내기란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니까? 남편은 ‘나 죽이려고 일부러 중국까지 끌고 갔지?’ 하며 갖은 포악을 다하고. 수저도 못 들겠다, 물도 못 마시겠다, 차라리 죽겠다고 하는데….”

 
‘내가 정말 잘못한 걸까’ 하는 생각까지 교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 그녀가 택한 방식은 완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 죽어 버려! 내 앞에서 죽는 꼴 보기 싫으니, 멀리 나갔다가 일주일 후에 장의차 끌고 올 테니 그리 알라고 악을 버럭버럭 썼어.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꿈쩍 안 하던 사람이 수저를 들고는 엉엉 울면서 죽을 마구마구 입에 퍼 넣는 거야.”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라서 사생결단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음식이 보약이라 했던가, 정말 먹으니까 살았다. 그녀의 남편은 건강이 나날이 좋아졌고, 젊은 시절보다 더 생생한 기력을 회복했다. 마치 언제 아팠던 날이 있었냐는 듯이.

 
이제 치열한 전투는 끝났다

 
▲  노년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만 나이 예순이 된 그녀는 “생각해보면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승리의 기쁨에 젖어있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직장 은퇴한 후에 유아원과 양로원 등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곳 저곳 여행 다니면서 평화로운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새 세상을 살게 해준 여인에게 들꽃을 꺾어 바치는가 하면, 생일선물로 기타를 배워 연주해주고, 자라면서 속을 썩였던 아이들도 각자 자신의 길을 찾고서 든든하게 제 몫을 해주고 있으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함께 가는 여행은 되도록 삼간다는 점이다. 이유인 즉 “부부가 함께 가는 팀을 보면, 재미있기는커녕 여행지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걸 보고” 두 사람은 따로 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그녀는 10월 중순께 동창들과 홍콩에 갈 예정이고, 남편은 현재 자신의 동창들과 여행 중이다. 언제 봐도 재치가 있고 지혜가 있는 친구다.

 
“말년에 춘자가 복 받은 겨. 남들은 이혼합네 외롭네 하는 나이에.”
“내년 생일 때는 우리도 초대해라. 그래야 이중주를 구경하지. 안 그래?”

 
우리는 한껏 웃으며 그녀의 ‘드럼채 이야기’에 장단을 맞췄다. 지금 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과거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던 것을 다 갚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즐거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오기와 끈기의 김춘자, 잘 살아왔다!

 
그녀의 내년 생일에 어떤 이벤트가 있을지 기대해본다. 2008/09/29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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