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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  (33) 책 읽기의 놀라운 경험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경신  
 
 
 
▲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 표지.  
  

 
지금 나는 부엌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를 읽고 있다. 가까스로 실내로 비집고 드는 햇살에 의지해 책의 활자를 천천히 눈으로 더듬어간다.
 
우리 집에서 책 읽기 가장 좋은 공간은 부엌이다. 온갖 자료와 책들, 컴퓨터, 프린터,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책상 위보다는 식탁 위가 한가롭기 때문이다. 적어도 독서대를 펼칠 정도의 여유 공간은 언제나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식탁은 빈 공간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답답하지 않아 좋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식탁을 책상 대신으로 사용해 온 까닭도 도서관의 열람실이나 독서실의 칸막이 책상보다는 그냥 앞이 탁 터여 있는, 넓지막한 탁자가 책 읽기에 이상적이라는 개인적 취향 때문이었다.
 
막힌 공간도 싫지만, 인공조명의 불빛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제나 전기불로만 방안을 어둑하게 하고 책상에만 불을 밝힌 채 책을 읽도록 해야 한다’는 작가 마그리트 뒤라스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다. 당연히 하루 일과를 끝내고 책을 읽다 잠드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강렬한 야외 햇살 아래 책을 읽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실내에서, 비록 미미한 빛이라도 자연채광에 의존해 독서하는 것이 편안하다. 해질 무렵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전기불도 밝히지 않은 채 글자와 씨름하는 것은 나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책 읽기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읽고 있는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왜 책을 읽는 수고를 하느냐말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일까? 천만에. (...)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해.”(카프카의 편지글, ‘찢겨나간 첫 페이지’, 독서의 역사)
 
사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재미와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쉬고 싶거나 잠들기 위해 책을 들기도 한다. 또,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모르는 것을 배워 알기 위해 책을 뒤지기도 한다.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손쉽게 퍼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책의 매력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말하는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독서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독서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카프카가 편지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잘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지만―부합하지 않더라도 관계없다. 어차피 책 읽는 사람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바로 떠올린 책은 잠자는 우리 정신을 일깨우는 책, 그래서 우리가 마구 불편해지는 책이었다. 그런 책을 발견하는 감동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만약 휴식이나 재미를 얻고자 한다면,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음악 감상, 야외활동, 수면, 영화 감상 등을 통해서도 목적달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생각의 날을 세우고 성찰의 폭과 깊이를 키우는 데 책에 비할 만한 것은 없다. 철학책이 존재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을 읽는 데서 얻는 만족감을 알기 때문에, 내게 시간과 건강이 허락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찾아 읽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독서가가 만들어내는 의미
 
그런데 이처럼 내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독서는 대부분 묵독할 때, 즉 소리 내지 않고 읽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소리 내어 책을 읽게 되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념은 물리칠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사색 속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묵독의 역사는 소리 내어 읽기의 역사에 비해 짧다고 한다. 고대의 도서관에서만 해도 다들 소리 내어 웅얼거리며 책을 읽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독서가들이 얼마나 집중해서 책을 소화해낼 수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책이 많지 않던 시절이니, 어쩌면 같은 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반복적인 독서가 암송으로 이어지고, 암송을 할 수 있을 정도니 의미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읽을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독서법으로 묵독이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책을 소리 내어 읽건 소리 없이 읽건, 책의 글자가 제공하는 사전적 의미-글쓴이가 애초에 의도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그친다면 독서의 묘미는 줄어든다. 책 읽는 이가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대단한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똑같은 책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약 10여 년 전에 읽었던 그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청어람 미디어, 2001)>만 해도 다시 읽어 보니, 그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독서가는 분명 수동적인 의미수용체만은 아니다. 책 읽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면서 변화해간다. 침묵한 채 정신을 긴장시키고, 찬찬히 문자를 눈으로 집중해 따라갈 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발견해 낸다면, 이미 변화의 출발점에 섰다. 우리가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일 수 없다.
         
저항과 해방을 위한 책읽기
 
이런 멋진 독서를 누구나 항상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자,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책에 접근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만약 인쇄술과 종이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대중적인 교육이 보급되지 않았다면, 독서는 아직도 최상류층, 권력층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 사회는 대부분의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시켰을 뿐만 아니라, 글 읽기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읽기를 허락했을 때조차 읽을거리를 제한했다.  ‘기도서’나 ‘오락물 중심’의 읽기만 권했던 서양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중세 도덕주의자는 ‘수녀가 될 뜻이 없는 소녀에게 글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우리 역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항상 그렇듯,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현실을 인식하고 자유와 해방을 찾아 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래서 불온서적이라며 금서목록을 만들고, 책을 감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불태워버리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 아닌가. 아니, 아예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맹으로 만들어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니, 끔찍한 일이다.
 
피해자로 굳이 과거사의 흑인 노예나 여성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지구 어딘가에는 그와 같은 피해자가 여전히 존재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을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없어 비참한 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공공도서관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면서 수많은 책을 자유롭게 읽으며 살아가는 나는, 독서에서 배제되는 잔혹한 경험을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나는 누구나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책도 무료로 빌릴 수 있는 공공도서관을 칭송하고 싶다. 독서를 대중화시켜 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이라는 책 
 
▲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이자 시인, 평론가로 활약한 보르헤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책 읽기와 관련한 좋은 점들을 나열하자면 길다. 그럼에도 책 읽기는 솔직히 위험하기도 하다. 천식을 유발하는 책 먼지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시력이 약해져서 안경을 써야 하고, 심지어 보르헤스와 같은 작가처럼 영영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두꺼운 안경이 없으면 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지금처럼 책을 계속 보다가는 언젠가 시각장애인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한다. 비록 곁에서 책을 읽어 줄 사람을 구하거나 점자책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대안을 찾기야 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는 없을 테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무엇보다도 독서의 가장 큰 위험은 현실의 삶과 단절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읽는 습관이 지나치게 되면 실제 삶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책 읽기의 중독에 빠지면 진짜 현실이 아니라 책 속의 현실에 갇혀 삶을 등한시할 것도 같다. 나는 책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책이 우리를 지나치게 사로잡는다 싶으면, ‘이 세상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펼쳐져 있는 책’이라는 시인 월트 휘트먼의 말을 떠올리자. 하늘을 바라보며 시시각각 바뀌는 일기를 읽고, 바깥을 둘러보며 계절의 변화를 읽고,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몸이 알려오는 신호를 읽자. 꼭 문자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이렇듯 읽을거리는 많다.
 
그럼에도 내 앞의 책과 창밖의 푸른 하늘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독서의 역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을 접을 수 없어서……. (이경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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