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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알래스카에서 사람을 만나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8. 9. 24. 14:45
알래스카에서 사람을 만나다
6박7일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이 남긴 것  
지난 여름, 무려 한달 열흘 동안을 길 위에 있었다. 그것도 내 생전 갈 일이 있을까 싶었던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알래스카 여행! 비행기 타는 걸 그닥 즐겨 하지 않던 아줌마의 행보치고는 좀 넘치는 호사였다.

 
1년을 기한으로 미국에 있던 후배 진영이의 오랜 꼬드김에 편승한 결과물이었는데, 그는 NGO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당시 인디애나폴리스에 있었다. 그가 던진 낚시 바늘에 제대로 꽂힌 건, 캐나다와 미국에 이민 가 있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밑밥으로 던져진 알래스카 크루즈가 결정적이었다.
 
난 TV나 영화를 통해서만 보면서 내 생전에 저걸 직접 볼 수 있을까 싶었던 에스키모의 얼음집도 보고 싶었고, 흰 곰이 얼음 위를 걷다 미끄러지는 모습도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해외경험도 많지 않은 인간이 무슨 알래스카냐고 비웃음을 샀지만, 나의 강렬한 희망 앞에 그들의 콧방귀는 고양이 하품만큼이나 가볍고 경망스러웠다. 


긴 뱃고동 소리와 함께 시작된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시애틀에 있는 66번 부두에 도착하자 거대한 크루즈 선박인 Norwegian Star호가 주변의 웬만한 건물들을 압도하는 듯한 몸집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1천여 명의 승무원 그리고 2천5백 명 정도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총 14층으로 구성돼있으며,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극히 일부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료다. 그 안에 레스토랑, 바, 헬스클럽, 영화관 등 모든 게 다 있어서 마치 떠다니는 마을 같았다.

물론 Norwegian Star호는 초호화급 크루즈는 아니었고, 프리스타일 크루즈여서 딱 우리 정서에 맞는 레벨이었다. 그래도 영화에서나 보던 크루즈에 탑승한다는 사실이 꿈같아 가슴을 두근거리며 배에 오르는데, 우리 객실이 있는 9층에 가기까지 여권과 티켓검사를 수없이 해대서 완전 그로기 상태가 돼버렸다.

이번 여행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이 함께했다. 나와 태국에서 온 찬야(후배가 태국서 일할 때 만난 동료)만 제외하고는, 모두 후배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와 있던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그들이 낯설어서 좀 뻘쭘했지만 모두들 남에 대한 배려를 잘하고 쿨한 성품의 소유자들인지라, 곧 천년지기나 되는 것처럼 환상의 여행집단이 돼버렸다.

긴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부두를 떠나면서 6박7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에서 모였다는 여행객들은 우리만큼이나 들떠 이곳 저곳을 탐색하며 부지런을 떨었다. 우리는 배가 고파 우선 베르사이유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코스 요리를 주문했는데, 맛도 훌륭하고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완전 ‘공짜’였다. 우리로선 그런 호사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이런 대접 한번은 선물로 받을 만하지 않겠냐고 너스레들을 떨면서 즐거운 식사를 했다.

해안협곡 ‘인사이드 패시지’를 지나 케치칸으로 

▲  케치칸 토템바이트 주립공원   ©박민나
포트 하디를 지나 프린스 루퍼트를 통과하고 첫 기착지인 케치칸으로 가는 동안, 캐나다와 알래스카 섬 사이의 협곡을 항해하는 ‘인사이드 패시지’(Inside Passage of The Alaska)를 지난다. 세계의 해안 협곡 중 가장 뛰어난 풍광으로 유명하다는데, 그 거대한 배가 아름다운 뱃길을 가는 동안 갑판에서 바라본 풍경은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그냥 바라만 볼 뿐, 입으로 어떤 말을 쏟아내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애틀에서 출발해 하루 하고도 15시간이 지난 뒤, 드디어 아침 7시에 케치칸에 도착했다. 스케줄 표에 의하면 8시부터 외출해서 오후 2시까지는 돌아와야 하는 여정이 미리 계획돼있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이미 배 안에 있는 서비스센터에서 기항지 관광상품을 산 뒤, 배에서 내려 관광을 했지만 그럴 경우 비용이 비싸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곳마다 항구 가까이에 있는 비지터 센터에서 직접 가격 흥정을 한 뒤 선택해서 관광을 했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헬기를 타고 빙하로 가서 그 위를 하이킹하는 것과, 작은 배를 타고 나가 고래구경을 하는 것이었는데, 두 상품 모두 너무 가격이 비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가 케치칸에서 선택한 것은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토템바이트 주립공원과, 통가스 역사박물관 방문 및 시내구경이었다. 수산업과 목재산업으로 성장하여 알래스카에서 네 번째 도시가 되었지만, 인구 총 8천명에 불과한 이 도시에서 몹시 분주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 여행객들이었다.

저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크루즈를 즐기는 사람들


다시 배는 밤새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크루즈를 즐긴다. 세계 각국에서 왔다지만 어째 느낌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른들을 모시고 가족끼리 왔거나, 애인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생전 처음 돈 좀 들여 온 여행으로 들뜬 모습이 우리랑 많이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몸짓으로 수영복을 입고 핫 탑을 즐기거나, 드레스를 떨쳐입고 파티에 참석하거나, 저녁마다 있는 쇼를 보거나, 우리처럼 좁은 인사이드 객실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크루즈 앨범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 자체가 모든 걸 내려놓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딱 좋은 여행방식이지만, 특히 그동안 단체활동을 열심히 하며 살아온 우리 일행들에겐 너무도 훌륭한 휴식이 되었다.

난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말썽을 부렸던 허리통증이, 오래 사용돼 푹 꺼진 객실 침대로 인해 도져서, 이 아름다운 여행을 충분히 소화하지도 못한 채 또 일행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치는 진상 캐릭터를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선상 내의 응급실은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문이 열려있고, 게다가 외제 의사를 잠깐이라도 만나면 우리 돈으로 8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니, 이럴 때 찜질팩 하나만 있으면 만사형통인데 아쉬웠다.

문득 우리나라만큼 편리한 곳이 있으려나 싶어 값싼 애국심이 불타오른다. 결국 명상으로 내공이 깊은 후배가 자기 손을 내 허리에 댄 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치 찜질하듯 허리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핑계로 둘러앉아 수다를 떠는데, 사람 좋은 정옥이 만병통치 유머를 날리고, 한국말을 잘 못하는 찬야조차도 눈치로 다 알아들었는지 박장대소를 한다.

신비스러운 빙하와 호수, 사진으로만 보던 알래스카


아침에 눈을 뜨니, 어느새 배는 알래스카의 주도인 주노에 정박해 있었다. 맑고 깨끗한 공기, 멀리 눈 덮인 산들, 청명하고 투명한 강물, 그 위로 펼쳐진 자연림. 그래, 알래스카….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그 알래스카였다.

아침을 먹은 둥 마는 둥 하고는 비지터 센터를 들러 우리는 멘델홀 빙하를 보기 위해 투어버스를 탔다. 알래스카에 있는 수많은 빙하들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심각하게 그 몸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굉음을 내며 떨어져나가는 빙하 조각들은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맑은 날씨를 보는 게 쉽지 않은 회색빛 알래스카 하늘 아래 너비 2.5km, 길이 19km, 깊이 93m인 멘델홀 빙하가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빙하는 너무 신비스러워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그 빙하가 녹아 너렁청한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니, 조만간 호수는 물이 더 많아지고 멘델홀 빙하를 사진에 담으려면 줌렌즈를 더 바싹 당겨야 할 것이다. 가까이에는 빙하가 녹은 물이 폭포를 만들어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 아래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찬 기운을 받는 듯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주노에서 다시 스캐그웨이로 가는 도중엔 쏘여 빙하를 보기 위해 배가 멈춰 섰다.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 방향에서 본 것도 아니었는데, 여기 저기 떠다니는 유빙을 볼 수 있었다. 물위로 보여 지는 부분은 작았지만 초록빛이 짙은 물밑으로 어슴프레 보이는 거대한 유빙이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저 물은 또 얼마나 차고 깊을 것인가? 수많은 세월이 녹아 바다로 넘쳐, 이제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었다.

비밀스런 제전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듯 황홀한 순간 


다음날 아침엔 인사이드 패시지의 마지막 기항지인 스캐그웨이에 도착했다. 1800년대 말 유콘 강에 불어 닥친 골드 러쉬로, 한때 알래스카 최대의 도시이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금을 실어 나르던 화이트패스는 아름다운 협곡과 눈 덮인 산들을 사이에 두고 달리는 관광열차로 인해, 연인원 백만이 넘는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우리는 스캐그웨이 역에서 티켓을 사들고 화이트 패스 열차에 올라탔다. 증기기관차의 경적소리와 함께 우리는 마치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듯 흥분이 됐다.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철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주변에 펼쳐진 풍경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주 작고 한적한 어촌 마을 같은 이곳에 어떻게 이토록 빼어난 산과 협곡들이 숨어있는지 너무도 황홀해서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제 크루즈는 방향을 다시 돌려 시애틀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잠깐 인사이드 패시지를 거쳐 바다로 나가 마지막 기항지인 프린스 루퍼트로 향하는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고래떼를 만났다. 만만찮은 비용을 지불하며 작은 배로 옮겨 타야 만날 수 있는 그놈들을 크루즈에서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높은 산등성이에서는 하얀 곰이 움직이는 게 포착되어 모두들 망원경으로 곰을 보겠다고 소동이 벌어졌다. 알래스카에 와서 곰도 못 보고 가나 싶었는데 그나마라도 봐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오후 4시쯤 도착한 프린스 루퍼트에서는 흰머리 독수리 떼가 우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놈들에겐 크루즈가 익숙한지 우리 머리 위를 자연스럽게 날아다녔다. 그곳에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비지터 센터에서 사려고 했던 기항지 관광 상품이 이미 매진이 돼서 우리는 그저 시내구경이나 하자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종점에서 내렸다. 그런데 마침 그곳은 수상 헬기장이었다.

그동안 타보고 싶었던 헬기투어를 드디어 이곳에서 실현하게 됐는지라, 두려워하는 몇몇을 운명공동체 운운하며 좁은 헬기 안으로 밀어 넣고는 환호성을 올렸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털털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고물엔진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모두들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곧 헬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온통 눈 덮인 산들의 정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데, 마치 신들만이 일별이라도 할 수 있는 비밀스런 제전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듯 우리는 두렵고 그리고 황홀했다. 


마지막 밤. 일행 중 부부가 함께 와 작은 객실을 따로 쓰고 있었던 성선배가 그동안 꼬불쳐 둔 라면을 풀고, 우리가 무척 애용했던 12층 뷔페에서 음식을 가져와 알래스카 크루즈 쫑파티를 열었다. 크루즈 내내 우릴 즐겁게 만들었던 정옥의 입담이 다시 행복 바이러스를 방안 가득 풀고, 사람 좋은 우리들은 눈가에 주름을 잡아가며 밤새 웃느라 배가 다 아팠다.
 
이번 여행에서 그토록 바라던 에스키모인의 얼음집도 못보고 커다란 흰 곰이 눈밭에서 구르는 모습도 못 봤지만, 후배가 촘촘히 세팅해놓은 이 길 위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며 서로의 행복한 감상을 긍정해주고 북돋워 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조직에 익숙한 우리는 ‘알래스카팀’이라는 쉬운 이름을 하나 갖다 붙이고는, 여행계를 다시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모두 귀국하는 대로 1박2일 뒤풀이를 약속했다.
 
벌써 그들이 보고 싶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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