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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선 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 송부자 부이사장
  

▲ 도쿄 신주쿠 <문화센터 아리랑>의 입구.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만남의 장'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일본 젊은이들이 북적대는 도쿄의 신주쿠 거리 한편, 50대의 일본인 여성이 주저하면서 작은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딸이 아빠를 혐오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병원에 보내도 좋을 만큼 딸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느 날 싸우면서 털어놓더군요. 아빠가 한국인이라 싫다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계속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귀화한 한국인을 남편으로 둔 일본인 여성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곳은 이 작은 도서관뿐이었다. 일본 유일의 ‘한국-조선 도서관’인 문화센터 아리랑. 이곳은 한반도의 역사를 재일조선인과 일본인들에게 바르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탄생된 곳으로, 재일조선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2년 전 작고한 재일조선인 2세 故박재일씨가 2억 5천만 엔의 큰 빚을 내, 1992년 11월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 이 센터를 세웠다. 박재일씨는 변호사를 꿈꿨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시험 볼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40대가 되어 역사학자들과 만나 ‘진짜 역사’에 눈 뜨면서 역사교육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사재를 털어 문화센터 아리랑을 무료로 운영하게 되었다.
 
지난 6월 이 센터가 도쿄에 있는 고려박물관 건물로 이전 개관하면서, 새롭게 운영책임을 맡게 된 이가 있다. 예술가이자 인권운동가로서 20여 년간 1인극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알려온 송부자씨(71)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송부자씨는 한-일 교류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역사박물관인 ‘고려박물관’의 명예관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매일 매일이 드라마예요” 
 
▲ 1인극 예술가이자 인권활동가로, <문화센터 아리랑>을 운영하고 있는 송부자 부이사장.  

 
송부자씨는 귀화한 한국인 아버지와 한국을 혐오하는 딸 때문에 찾아온 일본인 부인의 이야기를 이어서 들려주었다.
 
“마침 이 부인을 대응한 사람이 일본인 자원봉사자였는데, ‘사춘기니까. 누구라도 겪는 방황기이니까’ 라고만 대답해줬어요. 그걸 보고 다른 재일조선인 활동가는 화가 났지요. 딸이 한국과 아버지를 혐오하게 된 건 진짜 역사를 배우지 못한 탓이니까요. 진짜 역사를 배웠다면 한국인에게 편견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역사를 말해줘야겠다. 접수단계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상담을 해줘야겠다’고 회의에서 결정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문화센터 아리랑의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송 씨는 “센터에서의 매일이 드라마”라고 말한다. 이렇게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가지고 도서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은 목소리도 작고,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머리로 얼굴을 가린 대학생 정도의 남자가 한국어로 된 불교 관련 책이 있는지 물어왔어요. 그런데 좀 더 얘기를 해보니 말하는 내용이 모두 재일조선인에 대한 것들이었지요. 아마도 부모가 재일조선인인 듯싶었습니다.”
 
송부자씨는 그 학생에게 자신이 쓴 책을 건네주었다. 송씨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그린 책 <사랑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재일3대사(三代史)>였다. “전형적인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대해서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해주자, 그 청년은 바로 책을 사러갔다. 청년이 찾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어째서 ‘재일조선인’ 인지, 왜 그 이유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던 것이다.
 
“문화센터 아리랑은 정말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특히 도쿄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중심지 신주쿠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큰 장점이죠.”
 
초등학교에서 맞닥뜨린 차별
 
송부자씨는 31살 때 만난 한권의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 전까지 송씨의 삶은 ‘재일조선인’인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교토부 나라현에서 태어난 송부자씨는 태어난 후 2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36세에 홀로된 송씨의 어머니는 고물을 주워 6남매를 키워야 했다. 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아침까지 통곡하시던 어머니.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뼈가 아프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의 그 의미를 그 때는 몰랐다. ‘그저 어른들은 잠을 안자나 보다’ 생각하고 그걸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이후에 조선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엄마가 내뱉던 한숨과 통곡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비가 내려 장사를 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한국 노래를 알려주었다. “엄마가 ‘너 주소가 어디니’ 물어보면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하고 대답했지요. 엄마는 음치였는데 그래도 열심히 우리에게 조선노래를 알려줬어요. 엄마가 ‘조선노래 해보래이’ 그러면 우리는 달아달아 밝은 달아. 아리랑 같은 노래를 열심히 불렀지요. 우리에게 ‘혼’을 심어주셨던 거죠.”
 
송씨는 이렇게 민족적 정서에 대한 기반이 어머니에 의해 형성되었고 나중에 역사를 알게 된 후 1인극을 통해 꽃피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릴 때는 그래도 가족끼리 즐겁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송씨가 살던 마을은 부락민(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 중 최하층에 위치한 천민계급을 지칭하는 용어. 신분제 철폐이후에도 부락민의 후예라는 이유로 차별 대상이 되고 있다)들과 조선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고 최소한 겉으로는 차별적인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정말 공부하고 싶고, 밝고 정의감 있는 아이였어요.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으면서 초등학교 3학년의 머릿속이 자살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지요.”
 
사회과 시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을 배울 때 선생님을 비롯해 반 아이들이 모두 송씨를 보면서 웃었다. 충격을 받아 지적 능력마저 사그라졌다. 구구단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바보취급을 당할지 몰라 그 이후로 갖은 핑계를 대고 사회과 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있어서 역사교육에 더욱 목숨 걸게 되었어요. 역사를 모르면 사람은 자존감을 잃고 간단히 죽음을 결심하게 될 수도 있지요.”
 
기모노를 입고 일본인으로 
 
▲ 송부자씨의 책 <사랑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재일3대사(三代史)> 표지.    

 
16세부터 20세까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임시직으로 일을 하면서 스물 두 번이나 일을 바꿨다고 한다. 20세에 같은 재일조선인 남성과 선을 봐 결혼했다. 교육을 잘 받지 못하고 자존감이 없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살기를 바라면서, 자식들에게 당당히 본명을 쓰게 했다. 그러면서도 괴롭힘이 걱정되어 학부모위원회 활동을 했다.
 
한 일본인 학부모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다른 재일조선인들은 말투도 난잡하고 폭력적인데 당신은 안 그렇다. 아름답고 교양 있으니까 기모노를 입고 일본인처럼 살아도 좋다.’
 
“정말 그런가 싶었지요. 70만 엔짜리 기모노를 할부로 샀어요. 매일 기모노를 입고 모피도 둘렀습니다. 학력, 돈으로 가치관을 바꾸고 자본주의 체제에 전형적으로 순응했어요. 그러나 아이들이 당하는 괴롭힘은 줄지 않았지요. 조선학교 출신에 좋은 집안 출신인 남편은 내가 가진 두려움을 몰랐어요. 아이들이 나처럼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고, 내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노이로제가 되었어요.”
 
그렇게 4년을 살면서 몸과 마음에 병이 단단히 들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사쿠라모토 보육원’을 가보라고 했다. 재일동포가 많이 사는 가와사키 지역에서 한인교회를 운영하는 인권운동가 이인화 목사가 만든 곳이었다. 이 목사는 딸을 일본 유치원에 보내려고 했는데 거절당하자 자신이 보육원을 만들었다.
 
이 목사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십시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우선 민족명을 쓰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송부자 씨는 전기가 흐르는 듯 했다고 한다.
 
“31년간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게 맞는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면 전쟁도 없고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목사님 말 들은 날 아침까지 울었습니다. 처음으로 머릿속에 물음표가 들어왔어요. 처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왜 내가 일본에 있는 걸까. (태평양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어요.”
 
그 이후 송부자씨의 삶은 180도 바뀌고, 히타치 취직차별 재판(1970년 일본 기업 히타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시험합격 후 박종석씨의 합격을 취소시켰다. 이에 박씨는 재판을 걸고 1974년 승소판결을 얻어내었으며 이는 재일조선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등 인권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고귀한 어머니의 모습을 담아 1인극을 시작하다
 
그러던 중 신야 에이코라는 일본배우의 1인극을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이상한 ‘재일조선인들의 일본어 발음’을 소재로 웃기는 연극이었다. “나 또한 웃었지만, 괴테의 시구절이 떠올랐어요. 왜 웃는지, 네가 아는가?” 송씨는 재일조선인을 우습게 흉내 내는 연극을 보며 웃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을 멸시와 조롱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 사람들에게 송부자씨는 1인극을 통해 조선인들이 가진 고귀함과 인간다움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춤도 배웠고, 노래도 좋으니까. 나는 나의 고귀한 어머니의 모습을 알고 있고, 그걸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나만의 1인극을 만들어갔지요.”
 
야심차게 시작한 1인극이지만 반년 정도 하니 그만두고 싶어졌다. “공연이 끝나면 일본인들이 와서 ‘송부자씨, 힘내세요!’ 하고 가요. 너희들이 차별하니까 여기까지 말하게 되는데 왜 나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가느냐. 너희들의 문젠데.” 화가 나고 허무함이 찾아 왔다.
 
1인극으로 말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바꿀 수 있을까. 깊어진 고민이 도달한 곳은 ‘역사박물관’이었다. 일본사회에 바른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역사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1인극을 통해 모금에 나섰다.
 
어느 날 아침 아사히신문에 ‘고려박물관’을 만든다는 기사가 실렸다. 20년간 460여회의 공연을 ‘목숨 걸고’ 하면서 모은 115만 엔을 모두 기부했다. 2001년 `일본 내 유일한 한반도 관련 역사박물관'인 고려박물관이 도쿄 신주쿠에 열렸고 2007년까지 관장을 맡았다. 그리고 2010년 6월, 71세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고 송부자씨는 자신의 소명을 찾아 재개관한 문화센터 아리랑의 부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운영의 어려움에 처한 <문화센터 아리랑> 
 
송씨는 ‘한국-조선 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을 인생의 마지막 일로 받아들이고 ‘목숨을 거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31세에 한권의 책을 통해 자신이 너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도서관 운영도 단지 천 엔짜리 책을 건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살아온 인생과 나에게 맡겨진 과제가 같습니다.”
 
‘진짜 역사’를 알려줄 도서관이 필요하지만, 문화센터 아리랑은 지금 운영에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송부자씨는 “이런 현실이 일본이 어떤 사회인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일본 근대 100년사의 거울이에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알려면 재일조선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되죠.”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한 지역의 시청공무원으로 일하는 재일조선인 남성이 있었다. 귀화해서 조선인임을 숨기고 사는데 집안에 상례가 생겼다. 그는 동네에 사는 재일조선인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장례식에 와서 ‘아이고’라고 울지 말아 달라”고 일일이 부탁하고 다녔다고 한다. 친구들이 장례식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웃지 못 할 촌극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재일조선인들의 현실이다.
 
송부자씨는 “차별은 하는 자도 받는 자에게도 안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인간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31세 때 재일조선인으로 삶에 대해 각성했을 때 송씨는 “내가 역사교육 못 받았다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잘못된 과거를 가르쳐야 거기에서 정의가 생겨난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송씨는 2001년 8개월간 한국에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멸시의 시선이 있었다.
 
“나와 일본인이 함께 있으면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에게만 말을 걸었어요. 재일조선인에 대한 교육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나라를 떠나 부유하게 살고 있는 동포로 알고 있었죠. ‘돈은 있지만, 민족심은 없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 한국여성에게 ‘부유하면서 한국말도 못하다니 동포가 아니라 똥포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 말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직접 한국인에게 들으니 정말 놀랐지요.” 잘못된 역사를 알아야 하는 책임은 한국 사회 또한 가져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문화센터 아리랑의 간판에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만남의 장”이라는 문구가 달려있다.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도서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이 함께 교류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현재 문화센터 아리랑은 새 책을 한권 사는 것도 힘들 정도로 운영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다. 송부자씨는 센터를 살리기 위해 도서기증과 2천만 엔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모금 통장은 국민은행 023502-04-019391이며 예금주는 송만자(송부자씨의 어릴 적 이름)이다. (박희정 / 일다)

*통역 지원: 조경희   [관련 기사 보기] 조선인학교에 대한 ‘증오범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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