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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12)  ‘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여성운동하는 레즈비언 아자님과의 대화 
 
한 달 전인 5월 첫째 주에 인터뷰 칼럼의 열두 번째 주인공, 아자님을 만났습니다. 아자님과 저는 올해로 9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자님을 알고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참으로 귀여운 외모와 특이한 성격을 가진 분입니다. 뭐랄까요, 제 눈에 아자님은 정말 귀여운 캐릭터 인형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아자님은 여러 사람이 함께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면서 "어, 찰스! 어디 가는 거야?"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아자님에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갑자기 검지 두 개를 꼼지락 꼼지락하면서 맞대는 등 매우 귀엽고 독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랍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자님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간혹 이런 말을 하고는 하죠. "아자에게 진지함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어"라고 말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선했던 5월 초 우리는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식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자님은 왜 레즈비언가요?"
 
"대답하기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언니가 이 질문을 첫 질문으로 한다기에 얼마 전 잠들기 직전에 생각해 봤거든요. 결국, 정리를 하지는 못 했어요. 물론, '나의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생각해보니 어느 시점엔가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설명은 매우 부족해요. 나는 '내가 이러저러하니 레즈비언인 것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레즈비언일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레즈비언으로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더 많이 가지면서 지내왔거든요. 저한테 중요한 것은 내가 레즈비언이냐 아니냐, 왜 레즈비언이냐가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레즈비언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 이것이 중요해요."
 
아자님의 얘기는 스스로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성애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사람들'이라느니,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느니 하는 생각들이 있지만, 아자님은 레즈비언으로서의 자신의 삶은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죠.
 
이성애의 원인, 동성애의 원인
 
최근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큰 인기를 얻고 있죠. 동성애자들의 현실을 어둡지 않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대사 중에 이런 식의 대사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이건 DNA 문제라고요!" 김수현 작가님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타고 태어난', '선택의 여지없이,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이점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겠네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를 "어떤 성을 가진 사람과 '섹스'할 것이냐?"와 같은 성기중심적인 사고로 정의하는 것, 또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타고 태어났으며 동성애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는 가정에서 이제 그만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가 '누구(들)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선택 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들 중 일부는 이성애자로서의 삶을, 또 다른 일부는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겠죠.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겠지요. "나는 타고난 동성애자다", "나는 타고난 이성애자다", "나는 이성이고, 동성이고 다 싫다. 나는 혼자가 좋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애만을 권장하고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엄마도, 우리 언니도 이성이 아닌 동성인 누군가와 가족을 만들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물론 이성애도 대부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형태의 감정일 뿐'이라는 점을 100번 강조해도 모자랄 판에, '본성'이니 뭐니 하는 설명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또 표본 집단이 이렇게나 많은 이성애자들의 '이성애의 원인'을 연구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동성애의 원인' 연구하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는 둥 이상한 결과 발표하는 행태에 화도 납니다. '타고 태어났다' 주장하는 활동가들의 주장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다시, 아자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죠.
 
‘아, 몰라’ 정신으로 레즈비언 관련 논문을 쓰다
 
"오래 전에 '장애여성공감'에서 발간한 소식지와 정희진씨의 책 <나는 꽃을 받았어요>를 읽었어요. 그 두 권의 책자가 저에게 '여성주의'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죠. '여성주의'는 소외된 사람들, 피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하면서, '나는 앞으로 여성주의자로, 레즈비언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내가 레즈비언이어서 레즈비언으로 살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저 레즈비언으로, 여성주의자로 살겠다는 의미에요."
 
그리하여 아자님은 현재 여성운동을 하는 레즈비언으로 살고 있답니다. 본격적으로 여성운동단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아자님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했고요.
 
"여성주의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소기의 성과는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내 논문이죠. 내 논문.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논문 한 편을 쓰고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는 아자님을 이해하기 어려운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아자님이 이렇게 표현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더군요.
 
"내가 쓴 레즈비언 관련 논문이었으니까요. 내용이나 질에 있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대로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대로 써보고 완성했으니까요. 내 논문이 이론논문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주제를 식상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나는 내 주제가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주제였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자님은 소위 '대학원' 사람들이 관심 갖는 '이론논문' 혹은 '외국 이론을 많이 가지고 와 쓴 논문'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그의 관심은 일종의 '실태조사'와 같은 것이었답니다. 저의 관심도 '이론' 자체보다는 '실태파악'에 도움이 되는 연구들에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아자님의 논문이 매우 유익한 논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내 레즈비언들의 현실을 보여 준 좋은 논문이었죠.
 
그런데 레즈비언이 레즈비언 논문을 쓴다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내 논문이 언제 나오는지 학수고대하는 가족들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죠. 아자님의 부모님은 딸이 논문을 완성하기를 학수고대한 분들이랍니다.
 
"레즈비언 관련 논문을 쓰기로 결심을 하고는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집에 뭐라고 말하지?'였어요. 그리고 논문을 완성하기 전까지 걱정을 많이 했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단 한 번도 집에서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요. 레즈비언에 관한 책 한 권 집에 들고 간 적이 없어요."
 
이런저런 걱정이 가득했지만, 아자님은 결국 레즈비언 관련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요?
 
"논문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내가 내 생각을 가장 잘 정리해서 쓸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게 있어 그 주제는 바로 레즈비언 관련 주제였던 거죠. 고집도 있었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쓰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못 써야 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해야 하는 거야?'"
 
결국 아자님은 '아, 몰라!' 정신으로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논문 작성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논문을 보게 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논문을 딱딱한 좋은 커버로, 금색으로 인쇄한 논문 제목이 반짝반짝 더 빛나도록 검정색 하드커버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논문은 원래 제출해야 하는 몇 권만 비싼 하드커버로 만들고, 나머지 지인들에게 선물할 논문들은 소프트커버로 간단하게 제본을 하기 마련인데, 아자님은 모두 비싼 하드커버로 처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논문을 선사해야 하는 순간 이런 질문을 하시면 뭐라 답할까 고민을 했다고 해요. 부모님이 아자님에게 이렇게 묻는 상상인 것이죠. "네가 왜 이런 논문을 쓴 거니?", "네가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자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거에요. 당신들의 딸이 논문을 쓴 거잖아요. 그 사실에 굉장히 기뻐하였어요. 기뻐하시는 것을 넘어 모든 친척들에게 내 논문을 배포하기까지 하셨죠."
 
“지금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졸업 후 아자님은 모 여성단체에 입사하였습니다. 레즈비언으로서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것, 어떤지 물어봤어요.
 
"입사할 때 혹 내가 레즈비언 논문 쓴 게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논문 제목을 쓰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죠.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거에요. 우리 단체에 레즈비언 활동가들도 이미 많고,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특수한 사실이 되거나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혼자 괜한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죠.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밍아웃 했어요. 지금은 모든 활동가들에게 커밍아웃했고요."
 
아자님은 운이 좋네요.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큰 단체와 다른 지역에 있는 단체들 간의 차이가 있겠죠. 제가 알기로는 여전히 서울 외 지역 여성단체 활동가들 중 레즈비언 활동가나 회원이 커밍아웃을 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에요. 경상도의 모 여성단체 대표는 커밍아웃을 하고 쫓겨나기도 했다죠.
 
서울에 본부를 두고 다른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단체 활동가들의 경우, 이 문제에 있어서의 지역별, 단체별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자님의 경우에는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것이죠. 다른 지역 단체에서도 레즈비언 회원과 활동가들이 편하게 커밍아웃하고, 지지 받고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정착되었으면 좋겠네요. 이미 변화하고 있는 단체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좋은 변화들이 더 많이 활기차게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자님에게 "아자님은 참 운이 좋네요"라고 말을 하니, 아자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저는 제가 굉장히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보호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단체를 선택해 활동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장점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문제도 있어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무감해진다는 점이 그래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고 할까요.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거든요. 나는 이렇게 무감하게 살 수 있다지만, 내 경우가 그런 것일 뿐이잖아요. 다른 사람들, 또 다른 레즈비언들의 삶의 무게를 잊은 채 살고 싶지는 않아요."
 
“연애도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자님은 '무감각의 원인'을 커밍아웃이 자유로운 단체 분위기에서도 찾지만, 재미있는 또 하나의 원인을 제시해 주었어요.
 
"아마, 제가 연애를 안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연애를 하고 있지 않으니 불편할 일이 없고, 불편할 일이 없으니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순간들도 별로 없는 거에요. 이를테면, 연애를 하는 상황 속에서 이런 불편한 일들이 생기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애인과 손을 잡고 있는데, 우리가 한 똑같은 모양의 커플링을 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릴까 봐 조심하게 된다든지, 집에서 애인하고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거냐?'물으면 100% 거짓말을 해야 한다든지, 극장에서 영화 보면서 애인하고 손잡고 보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내가 레즈비언이어서 조심하고 신경 쓸 것이 생기고 세상과 자꾸만 부딪히게 될 일들이 생겨야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될 텐데, 그런 일 자체가 없는 거죠. 아무래도 레즈비언 문제에 있어서는 연애도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 하니 말이죠. 요즈음 저는 부모님에게 그저 '연애 안 하고, 결혼생각 없는 여성주의자인 이성애자 딸'인데요, 마음이 정말 편하거든요. 연애하면서 가끔씩 이런 생각도 하곤 했어요. '아, 피곤해. 차라리 연애 안 하고 말겠다'"
 
아자님이 그리 말씀하시기에 제가 이렇게 말했죠. "그럼, 그냥 연애하지 말고 살아보는 것 어때요? 스트레스도 적고 좋은데요." 다음은 아자님의 대답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레즈비언인데, 그럴 수야 있나요!"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아자님,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나요?".
 
"활동하면서 깨달은 건데, 저는 운동 이슈에 관해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고 쓰는 일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관련한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시선의 폭력과 같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문제에 관해 연구해보고 싶어요. 이를테면,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문제가 그렇죠.
 
레즈비언 커플들이 편하게 사진을 찍고 필름을 맡길 수 있는 여성전문 사진관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아, 그리고 레즈비언들이 자기들 필름 편하게 가지고 와서 인화도 하고, 커플 사진도 촬영하고, 액자도 만들어가고 하는 작은 상점을 만들어 운영하고 싶기도 해요."
 
1시간 정도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고 제가 말을 하니, 아자님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너무 짧아요!"라며 "더 하자"고 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더니 정말 좋아하는 것이에요. 덕분에 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 시간을 가졌고 말입니다.
 
아자님과 저는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 언제고 만나 1시간이 아니라, 100시간 이상 아자님의 진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답니다. 아자님, 나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으니 연락해요. 그리고 인터뷰 응해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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