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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8) ‘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인터뷰 칼럼]의 여덟 번째 손님은 지훤님입니다. 지훤님은 저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을 함께해왔던 동료입니다. 2005년에는 상담소 간사로 활동했지요. 지훤님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온 지도 벌써 7년이 되었네요.

 
제 기억 속의 어린 지훤님은 대학생이었고, 진로와 연애에 대한 고민으로 미간에 약간의 주름을 잡고 다니던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격 유형을 아홉 가지로 구분하는 에니어그램을 독학해서 상담소 활동가들에게 열심히 설명해주는 재미있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고요. 지훤님 덕에 우리 상담소 활동가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에니어그램 삼매경'에 빠져있었다지요. 아, 지훤님은 누가 보기에도 소위 '교회 언니' 이미지를 풍기고 다니던 개신교인 이었습니다. 레즈비언 기독교인이었던 것이죠.
 
7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동안 지훤님의 삶에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변화하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요. 이를테면, 지훤님은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인이 되었고, ‘교회 언니’로만 보였던 지훤님은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 3월 12일, 지훤님과 만났습니다.
 
잊지 않고 공식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훤님은 왜 레즈비언이에요?” 이 질문을 받고, 지훤님은 수줍게 입을 열었습니다. “언니, 나,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중간에 레즈비언 안 하려고 했어요.”
 
지훤님이 소위 ‘탈반’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었죠.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공식 질문”이고 뭐고 이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만을 나누다가 인터뷰를 마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7년 전에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나 자신에게 커밍아웃했어요. 그 후로 상담소 활동도 정말 열심히 하고, 별다른 정체성 고민 없이 그럭저럭 잘 살아왔어요. 그런데 졸업할 무렵에 진로 문제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고 연애하고 하는 것도 아니어서 ‘레즈비언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연애를 했어도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보다, 힘들고 불행한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정체성 문제가 진로 문제와 닿으니까 ‘나는 그냥 남들이 그러하듯, 그냥 그렇게 결혼하고 살 수도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로 고민을 하는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잖아요. 취업은 언제 하고, 결혼은 언제 하고, 아이는 몇 명을 낳고 하는 등의 ‘평범한’ 계획들이요.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데 나에게 미래는 너무 막막한 거예요. ‘가뜩이나 취직 문제로 머리가 아픈데, 이 따위 정체성 문제로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버거웠어요. 모든 것들이. 결국 나는 ‘결혼, 그것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 여자 만나서 연애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리고 연애를 하게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관두자. 믿을 구석도 없는데 편하게 생각하자’ 하는 생각이 들더니,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코스’를 ‘내 코스’로도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진로 고민과 취업 준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지훤님은 ‘주변 사람들이 결혼할 때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나라고 못할 것이 있겠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사람들도 그냥 다 때가 되니 하는 것을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이성애자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미래에 관한 고민이 더 깊어지지 않더랍니다. 당장 급하던 불, 취업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지훤님은 취업 준비생의 기간을 거치고 소위 ‘사회인’이 되었답니다. 취업 후 시간이 지나고 직장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나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내던졌던 ‘레즈비언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리움’으로 찾아오더랍니다. ‘내던졌던 정체성이 그리움으로 찾아온다’. 멋진 표현이네요. 그런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리움으로 찾아온 레즈비언 정체성’이라.
 
“직장 생활이 안정이 되면서 결혼에 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전에 정리했던 결혼에 관한 생각이 그 이상 발전하지 않는 거에요.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그 다음 단계에 관한 그림을 전혀 그릴 수가 없었죠. 그 와중에 이런 경험들을 했어요. 길을 걷다가 레즈비언 커플로 보이는 이들을 만나면 눈을 뗄 수가 없고,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왼쪽 사람이 오른쪽 사람을 더 좋아하는 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마음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에요. 한 동안 의식적으로 접어 두었던 레즈비언 정체성이 그렇게 ‘그리운 것’으로 다시 내게 다가오더군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훤님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지훤님은 ‘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나는 레즈비언이고, 나는 내가 레즈비언인 것이 기쁘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나를 설레게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답니다. ‘연․애․를․하․지․않․더․라․도’ 말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연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떼어버려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연애 자체가 내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을 한다는 마음도 결국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우리 주변의 커플들을 보면 보이잖아요. 서로 공감하고, 위로가 되는 부분들도 크지만 동시에 조금 더 가지려고 하는 소유하는 마음도 내잖아요. 사랑의 감정을 하나의 소유욕으로 보기 시작하니까 연애 자체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더라고요. 
 
이 뿐만이 아니에요. 과거에는 ‘사랑은 없어’라면서 사랑을 부정하기도 했었는데, 요즈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이미 나에게 충분하게 다가온다고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물론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이제 사랑은 내게 더 많은 것들을 포괄하는 낱말이 되었어요.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라는 가능성 자체가 내게는 이미 사랑인 것 같아요. 그런 내가 좋고, 나의 그런 느낌과 생각이 참 좋아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더니, 내 옆에 사람이 없다는 생각만 해도 쓸쓸하고 외로워서 우울해지는 제 입장에서는 지훤님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존적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존적인, 자아독립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이 지훤님의 저 깊고, 맑은 생각을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끄럽군요.
 
‘사랑은 하나의 소유욕이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불교적입니다. 아무래도 지훤님이 불자가 된 후에 이런 생각에 까지 다다르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잠시 불교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취업 준비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에 내 몸과 마음은 병이 들었어요. 위경련에 시달려야 했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마음의 병이 온 몸으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결국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죠.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던 중에 상담소 회원 프로그램 중에 언니가 만든 금강경 소모임을 알게 된 거에요.”
 
2006년 7월에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회원 프로그램에서 제가 이런 강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금강경을 통한 우울증 극복하기. 20대 중반에 아우팅을 당한 후에 밑바닥에 있던 저의 분노 에너지가 마구 분출되었는데, 치밀어 오르는 분노 에너지와 함께 제가 경험했던 것은 깊은 우울감이었습니다. 매우 정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던 저는 병원도 찾아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경복궁 등 서울 시내에 있는 궁이란 궁은 모조리 돌아다니는 취미도 만들어보는 등 우울증을 극복해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다다른 것이 다름 아닌 불교였답니다. 우연히 ‘인생은 공’, ‘오직 할뿐’,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 등의 내용이 담긴 <금강경>을 접하였는데, 덕분에 저는 우울증을 상당히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혹,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회원들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강좌를 열었던 것이죠. 그 공부 모임에 지훤님이 참여해서, 2개월 간 함께 공부를 했던 경험이 있어요.
 
“별 기대 없이 갔어요.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평소에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큰 거부감은 없었고요. 그리고 불교나 금강경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금강경으로 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의문이 들어 참여하게 된 거에요. 솔직히, 믿음은 없었지만 그냥 갔죠.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금강경을 읽으면서 갑자기 어느 한 순간에 내 가슴 안에 있던 답답한 것들이 '탁!'하고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직후에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나 불자해야겠다!”
 
매우 혼란스러워했던 시기에 지훤님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평소에 놓기 어려웠던, 꼭 붙잡고만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해야 할 일’이라고 자신이 정해 놓은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능력 밖의 문제라는 판단이 들면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지라기보다 집착으로 느껴지는 것들과 하나씩 결별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내 마음들 중 어떤 것들이 집착하는 마음인가를 보기 시작한 지훤님은 결국 ‘사랑과 연애’에 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느끼는 편이에요. 누군가를 짝사랑을 하던, 교제를 하던 나는 자기비하가 심한 편이었어요. ‘내가 그렇게 못난 사람인가’, ‘내가 조금만 더 잘난 사람이었다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 텐데’, ‘나는 부족한 사람이구나’라며 늘 자책하는 마음을 가졌죠.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답을 준 것이 ‘우리는 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분별을 해놓고는 괜히 고통에 빠지는 구나’라는 생각이었어요.
 
나 스스로 ‘못난 사람’과 ‘잘난 사람’을 구분해 놓고는 나를 ‘못난 사람’에 가두고, 고통스러워했던 거에요. 그 후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구나’ 라는 감정 자체에 집중해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성애자여서’ 등의 이유로 가졌던 억울한 감정이 올라오지 않더라고요.”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는 지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지훤님 머리 뒤에서 노란색 쟁반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재 지훤님은 천주교 성당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지훤님이 불교로 개종을 하고 천주교 성당에 다닌다는 것이죠. (참고로, 저도 지훤님도 천주교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신도이기도 합니다. 저의 세례명은 ‘젬마’라지요.) 어쩌면 레즈비언들은 이렇게 종교에 있어서도 퀴어(queer) 한지요. 지훤님의 행보에 웃음이 나옵니다.
 
“이상하게 나는 혼자 절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상상해보면 마음이 무거워져요. 아마, 오랜 시간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다가 개종을 하고나니 절에 관한 정보가 적어 그런지 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최근에 성당에 나가게 되었죠.”
 
지훤님의 기묘한(queer) 종교 생활을 듣고 키득키득 웃으며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한 사람으로서, 한 명의 레즈비언으로서 겪게 될 불안과 고통에 맞서 잘 싸우고 싶어요.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서 그 힘으로 불안과 고통으로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나도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인터뷰를 마치고, 지훤님은 법정스님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길상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데, 시간이 더 흐른 후 날 좋은 때에 꼭 한 번 길상사에 들르고 싶다고 하네요. 그간 지훤님이 저에게 “절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자주 했었는데, 아직 한 번도 함께 절에 간 적이 없어요. 조만간 제가 먼저 지훤님에게 연락해서 ‘길상사에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해야겠습니다. 길상사 산책 후 돌아오는 길에는 지훤님이 다니는 성당에도 잠시 들러 오래간만에 성모님과 예수님께 안부 인사도 드려봐야겠습니다.

[Over the rainbow 인터뷰] 씩씩한 레즈비언 명개님의 홀로서기  |  커밍아웃, 언니로부터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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