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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4)  ‘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파트너와 나, 우리가 사는 이야기  

인터뷰 칼럼을 기획하면서 파트너 S씨와 함께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글로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과거 연애지사며, 현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글로 만들어지는 것에 부담이 있었을 텐데도 S씨는 인터뷰를 허락해주었습니다. 늦은 밤, 우리는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첫 질문으로 칼럼 작성을 위해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레즈비언 지인들에게 할 공통의 질문 하나를 던져보았습니다.
 
"왜 레즈비언이에요?"
 
"여자만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좋고, 여성과 사랑하는 게 좋고, 익숙하고 편해요. 굳이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여자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렇게 살기로 내가 스스로 결정했고요."
 
저는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은 '나는 누구(들)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선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요. 스스로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레즈비언으로 살기로 한 사람이든 어떠한 경우에도 이들은 이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했을 겁니다. 아,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쳤고요. "스스로 결정했다"고 말하는 S씨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습니다.
 
"내가 가장 편하게 느끼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마치 이성애자가 동성애 관계를 어색해하는 것처럼, 나는 오히려 이성애 관계가 더 어색하다고 할까요. 동성애 관계가 나한테 맞고, 내가 원하는 삶이에요. 레즈비언이라고 정체화하기 시작한 초기단계에는 '내가 계속 이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내가 과연 결혼에 대한 압박을 버티면서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어요. 그래서 일종의 여지를 두고 스스로를 '양성애자'라고 정체화했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한 적은 없어요. 이성애 관계라는 것은 해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죠. 10년 정도 연애를 해보고, 주변에 레즈비언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레즈비언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S씨는 정체화 초기단계에서부터 주변에서 많은 레즈비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정체화하던 시기에 단 한 명의 레즈비언도 볼 수 없었던 환경과 대조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지요. S씨는 여대를 나왔는데, 그 대학은 레즈비언이 많기로 유명한 대학입니다. 그런 환경적인 요인이 S씨가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 대학에는 왜 그렇게 레즈비언들이 많죠?"
 
"글쎄요. 왜 우리 학교에 그렇게 레즈비언이 많았던 것일까요?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레즈비언들을 만났으면서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요.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는. 다만, 내가 활동하던 동아리나 내 주변 사람들 중에 꼭 자신들을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서로 좋아하고,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해요. 왜 우리 학교에 다른 여대에 비해서 레즈비언이 많은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활동을 해오면서 왜 그 대학에 유독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정체화한 이들이 많은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여성학의 성과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지요. 학생들이 여성학 수업을 들어서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교 교육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여성주의적인 가치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과 '다른 삶을 그리고 살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저의 막연한 설명을 듣고 S씨가 한 마디 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말로하지 않는 교육도 교육이니까.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이 '저 둘이 연인 사이래'라고 말해도 주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수군거리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받은 영향들이 있겠죠."
 
그렇다고 당시에 여성들과 교제를 하던 이들 모두가 계속해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소위 '탈반'을 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졸업하고 여전히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여성과 연애를 했던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졸업 후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면서 이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해 살고 있어요. 내가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레즈비언인 지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요. 내가 다른 환경에 있었다면 그리고 다른 자극이 가해지고 레즈비언 커뮤니티와도 단절되고 그랬다면 나도 어땠을지 모를 일이죠. 하지만 제도 결혼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우리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선배들이 결국 결혼을 하고 출산, 육아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결혼해. 정말 좋다'고 강조하는 것은 듣기가 힘들더라고요."
 
이를테면, 그들은 "동성애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동성 간 섹스 장면은 보고 싶지 않다"라고 하거나 레즈비언인 후배들이 많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결혼해라"고 조언하는 선배들인 것이지요. 문제는 이들이 나름대로 '진보적인' 사고와 행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을 겁니다. 갖은 진보적인 사람인 척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은 어디에든지 있기 마련이지만, 뒤통수를 치는 그 순간, 그 장소에 머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소위 '진보적인 단체 활동가와 교수'들이 많았는데,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한 후에 그 '진보적인' 분들이 제게 했던 언행을 생각하면 불쾌해집니다. 그 중엔 가만히 앉아 있는 제게 성기를 대고 문질러 대는 활동가도 있었지요. 은근히 궁금해서 물어본다며, 집단 섹스에 관해 묻는 사람도 있었고, 인사를 한다며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온 몸을 꽉 껴안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 교수까지. 그 순간에서는 웃고 말 수도 있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입니다. 차라리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이나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얘기를 계속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이 정도로 정리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자 둘이서 가족을 꾸릴 수 있다는 발상을 내가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그림-erim

나의 파트너 S씨에게 동거에 관해 물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동거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동거하고, 우리 강아지들과 이렇게 사는 것. 나에게 있어 이것이 주는 가장 좋은 의미는 '내 가족'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어요. 내가 만든 가족이죠. 예전에는 '가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싫고, 부담스럽고 그랬는데, 그 가족은 내가 선택한 가족이 아니었잖아요. 내가 꾸린 가족은 다르죠. '여자 둘이서 가족을 꾸릴 수 있다'는 발상을 내가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자신에게는 정말 큰 변화에요.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가면서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족과 함께 많은 부분들을 협의해 가면서 꾸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요."
 
지난 연애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파트너와 동거를 하지 않았던 S씨가 저와 동거를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동거하고 있는 기간에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었죠. "여자 둘이서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 것 같은데, 어때요?"
 
"일단은 우리 관계를 법 등 외부적으로 묶어주는 끈이나 강제하는 것들이 없잖아요. 본인들이 스스로 마음을 내어서 미래를 약속하고 가족을 꾸린다는 것, 그래서 참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도 해요. 미우나 고우나, 어려운 일이 있으나 슬픈 일이 있으나 그것을 외부적인 울타리가 없어도 우리 스스로 마음의 울타리를 짜서 극복해 가야 하는 것은 '도 닦는 일'인 거죠. 이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내었으니 그런 면에서 하나의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또, 커밍아웃하지 않은 나로서는 언제 가족들이 집에 들이 닥칠지 모르니까, 우리 관계를 가족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게 될 지, 매번 우리 관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갖는 불안감이 있어요. '그냥 같이 사는 거지!'라고 간편하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죠. 용기를 내어야 하는 문제죠. 어디 그 뿐이겠어요? 지역 주민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친인척들 모여 사는 길가를 걷는 일에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니 스스로 단속해야 할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가끔 인사성 좋은 옆집 남자와 오가며 만날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밝은 미소로 저와 우리 집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는 하는데, 솔직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 일찍 어디에 가는지, 어려보이지 않는데 학교를 다닌다니 왜 그렇게 공부를 오래 하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등을 묻고는 했는데, 답변을 하다가도 이러다가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등 시시콜콜 질문을 받고, 답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피곤해지더군요.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일이기도 하지만, 레즈비언 두 명으로 구성된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들이 그저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나름대로의 대응 방안을 마련하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파트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았습니다.
 
"아직 가족들에게 언제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일정부분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겠죠. 살아가면서 때때로 짜증나고 괴로운 순간들도 있겠지만, 마음 관리 잘 하면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최대한 단속한다고 하면서 살겠지만, 결국 부모님이 알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때 가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혹자들은 이 대목에서 "그럼, 커밍아웃을 해버려! 네가 레즈비언인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네 삶에 자신이 있으면 커밍아웃하라고! 왜 그렇게 스스로 피곤하게 살아?"라고 말하겠지요. 이에 관해 S씨의 견해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죠.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에 관한 문제에요. 모든 경우에 있어 일장일단이 있어요. 나는 우리 부모님을 잘 알아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죠. 자기 가족들처럼 쿨하게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겠지만, 모든 가족이 그럴 리 만무하죠. 우리 부모님이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걸 알아요. 내가 어떤 일을 겪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파트너가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내가 결혼하지 않아서 외롭게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커밍아웃을 하기 보다는 자기를 내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천천히 알아가게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S씨에게 커밍아웃의 계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생들에게는 시기를 잘 봐서 차차 알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에게도 파트너의 커밍아웃 계획은 매우 중요합니다. 함께 살면서 늘 하는 걱정이 하나 있어요. 이를테면, 파트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파트너의 가족들이 저의 존재를 모르니 어떤 소식도 제게 전해줄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S씨에게 저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게 한다면,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 단 한 명의 가족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S씨는 동생들이 자신에게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함께 계획하기로는 2년 정도 후에 여자 동생에게 커밍아웃을 하기로 했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나마 구성원 중 한 명인 제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점입니다. 저의 커밍아웃은 저 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숨통도 트이게 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장점이 정말 많아요. 연애를 하면서 파트너의 부모님이나 자매, 형제들에게 보인 적이 없었어요. 공개를 하고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자기와 함께 자기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데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 눈 앞에 막 펼쳐지는데 정말 신기하고, 많이 감사하고 그렇더라고요. 굉장히 든든해요. 스트레스가 반으로 줄어든 거잖아요. 안부도 물어봐 주시고."
 
감동의 물결이 파트너에게만 몰려온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가족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가족을 꾸려준 고마운 사람이라며 파트너를 소개한 순간은 제게도 감동이었습니다. 나의 가족들에게 소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어 자신을 드러내주고, 우리 가족들을 또 하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파트너에게 항상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답니다. 여전히 저의 엄마도, 언니도, 동생도 파트너 S씨와 저의 관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파트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 가족들'도 '우리 가족'을 인정해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또 조만간 파트너의 동생들에게도 조심스럽게 커밍아웃을 할 계획이니, 앞으로 더 많은 가족들로부터 우리 가족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트너와 저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커밍아웃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자고 약속했습니다. 마지막으로 S씨에게 앞으로 '우리 가족', 어떻게 살면 좋을지 물었어요.
 
“현실적으로 불안한 문제들, 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보일 두려움, 쓸쓸함, 화... 이런 마음들이 가끔씩 치밀어 오르겠지만 서로 협력 잘 해서 지혜롭게 헤쳐 나갔으면 좋겠어요. 각자가 하고 싶은 일, 각자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서로 지원해주면서 살았으면 좋겠고. 꾸준히 잘 살아서 자기 엄마를 더욱 안심시켜드리고 싶은 생각도 커요. '여자 애들 둘이서 살아도 저렇게 살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우리 강아지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아픈데도 많아지고 그렇지만, 우리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살다 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초반에 했던 질문, “왜 레즈비언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도 파트너도 살아오면서 ‘레즈비언이니 뭐니 하는 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더군요.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파트너의 말을 빌자면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인간사에서 살아가면서 비슷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 그런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 정체성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동성애자임'을, '레즈비언임'을 자각하게 하는 순간들 역시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 사람으로서, 한 명의 레즈비언으로서 2중, 3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복잡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런저런 작고 큰 사건 사고들을 겪어 나가면서 남들이 갖지 못하는 '새로운 차원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 인생의 동반자 S씨와 함께 이 복잡다단한 세상, 잘 한번 살아 볼 작정입니다. 
ⓒ일다 www.ildaro.com

[관련 칼럼 보기-> 동생의 기억, 나의 기억 | 언니로부터 온 편지 | 긴 터널을 빠져나온 엄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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