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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가 주는 이국의 정취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이영란의 라오스 여행’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이영란의 라오스 여행'을 마치며
 

지난 주말 부산에 다녀왔다. 라오스 사람과 한국 사람이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 내겐 각별한 결혼식이 있어서였다. 사실 그 날은 이미 한달 전부터 라오스에 다녀온 몇몇 한국해외봉사단 동기들과 라오스음식을 해먹고 놀자고 약속해놓았던 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늦게 들었어도 당연히 결혼식이 먼저였다.

 
결혼식은 날이 추운 가운데도 따뜻해서 좋았다. 라오스가족으로 부모님 두 분만 오셨지만, 열 일 제쳐두고 찾아온 또 다른 몇몇 해외봉사단원들과 신랑 가족친지들의 배려로, 신부 쪽 자리가 북적북적해서 더욱 좋았다. 신랑은 친구들과의 피로연도 미루고, 한국에 와서 잠깐이나마(신랑신부는 결혼식을 마치고 라오스로 돌아간다) 답답했을 신부와 그녀의 부모님을 위해, 라오스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래서 마치 라오스에서처럼 라오스 술자리가 벌어졌다. 우리가 신부 부모님을 정말 처음 만난 걸까, 내가 정말 라오스를 떠나온 지 한 해가 넘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빨리 친근함을 느꼈다. 라오스의 정감을 바로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글감을 잡았다.
 
‘이영란의 라오스 여행’을 마치는 글로, 바로 이것을 이야기해야겠다. 이제 라오스를 가까운 이웃으로 여기고, 라오스로 여행을 하게 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면 나와 같이 라오스에서 잠시나마 살게 되고, 또 이 신랑신부와 같이 가연을 맺을 수도 있을 <일다>의 독자들에게, 심각하지 않지만 우리와 조금 다른 라오스 사람들의 예절과 여행자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일상에 함께 하는 경건함에 대해 들려드려야겠다.
 
우리와 조금 다른 술자리 예절
 
라오스에선 술자리에서 주인이거나 좌중의 어른인 사람이 술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보통 가장 어리거나 술을 잘 권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술 뒤치다꺼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술을 돌린다. 우리가 술을 따르는 것을 보통 술을 ‘내리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라오스 사람들은 술을 ‘올리는 것’, 대접하는 것으로 여긴다.

 
술을 마시는 법도도 다르다.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잔에 술을 따라 좌중에 보이며, 자기가 술을 돌리겠노라고 하고 먼저 그 잔을 마신다. 자신이 마시고 난 잔에 다시 술을 부어 보통 자신의 오른쪽 사람부터 술을 권한다. 잔을 받은 사람은 한 번에 술을 마시고 잔을 돌려준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바퀴 돌고 나면 잠시 쉬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술을 돌리기도 한다.
 
물론 그 중에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은 거절해도 된다. 라오스에선 술을 절대 강권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한 잔으로 돌려서 마시지만, 우리와 같이 술을 돌리는 사람만 만취할 일은 없다. 왜냐면 우리와 달리 술을 돌리는 사람이 따라주는 사람에게서 다시 술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맨 처음 자기가 시작한 잔만 마시는 것이니, 술은 좌중 모두가 거의 똑같이 먹게 되기 때문이다.
 
가끔 분위기가 무르익어 격의 없어지면, 어른들이 우리에게 술을 따라 줄 때가 있었다. 이럴 때 한국의 예의범절이 몸에 익어 두 손으로 술잔을 받는 것은 좋지만, 우리 식 최고의 예의 바름, 몸과 고개를 살짝 돌려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예의가 없는 행동으로 비친다.
 
행복한 착각을 만들었던 라오스의 예절
 
내가 파견된 믿따팝 중학교 수업참관을 시작한 날이었다. 참관할 수업을 담당하는 아짠에게 미리 말씀을 드려놓고, 학생들에게도 최대한 피해가 안 되도록 시간 전에 교실에 들어가 맨 뒤에 서 있었다. 종이 울리면서 학생들이 뒷문으로 우르르 들어오는데 모두 허리를 숙이고 내 앞을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 교실을 나오고 복도를 지나 교무실로 들어가는 동안, 눈이 마주친 학생들은 당연히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는데,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내 앞을 지나가게 되는 학생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어! 좀 놀랐지만 온지 며칠 안 되었어도 일단 나를 선생님으로 아짠으로 생각해주는가 보다 생각했다. 무어 아무 한 일도 없이 이미 뿌듯해져 버렸다.
 
아짠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아침 회부터 신입당원(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다) 환영회까지 수업참관 하듯 꼬박꼬박 찾아갔다. 좁은 교무실이나 도서실에서 주로 갖게 되는 아짠들의 회의에도 역시 입구 쪽 맨 뒷자리에 서거나 앉았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든 막내 아짠이든 내 앞을 지나는 아짠들이 모두 가볍게는 고개를, 심지어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건 딱히 나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당연히 너무나 일상적인 라오스의 예의범절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연 중에 또는 극장에서 사람의 시선을 가리지 않기 위해 허리를 숙여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특별한 상황, 특정한 장소에서만 이런 에티켓을 지키는 반면, 라오스 사람들은 학교에서든 가게에서든 잔치에서든 거리에서든,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상대방의 시선을 가리거나 가로지르는 것에 대해 대단히 조심한다.
 
2년 정도 지나니 내게도 몸에 배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하다. 한국사람들에게 나는 아마도 아주 겸손하고 순박하게 보일 것이다. ㅎㅎ
 
소 잡은 날 처음 딱받을 보다
 
라오스를 여행한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었느냐 물으면 대부분 새벽 딱받(탁발)풍경을 든다. 나도 라오스를 찾는 지인들에게 딱받을 꼭 한 번은 보고, 가능하면 직접 공양해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막상 나는 라오스에 사는 동안엔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저 아침잠이 많아서 일뿐. 그래도 어찌 되었든 2년을 살았으니 볼 수는 있었다. 딱 한 번, 그것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날에.

 
라오스는 두 가지 큰 명절을 가지고 있다. 삐마이(라오스 새해, 양력으로 4월 중순 경인데 올해는 4월 13일이다)와 분억판싸(하안거를 마치고 우기를 무사히 남을 축하하는 명절, 우리로 치면 한가위와 비슷하다). 명절의 의미도 뒤지지 않지만 흥겨움으로 보면 봄 삐마이보다는 가을 분억판싸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분억판싸를 준비하기 위해 계를 하듯 서로 돈을 모아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했다. 각자가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돈을 모아 소를 사고 직접 잡아 보탠 액수만큼 고기를 나누는 게 훨씬 싼 모양이다. 그 소를 잡는 의식은 가장 어두운 시간, 동이 트기 전에 학교에서 치른다고 했다. 와! 내 이런 걸 놓칠 순 없지.
 
나는 이상한 흥분에 밤 열두 시에 겨우 누워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 네 시에 일어나 집을 나왔다.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안개까지 짙은(고도가 높아서인가 싸이냐부리는 건기가 되면 아침마다 안개가 낀다) 길을 달려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주위 담장엔 주홍색 노란색 꽃이 두세 송이씩 올려져 있었다. 어제 저녁 시나브로 정화의식을 치른 것이다. 교문에서 운동장을 지나 안쪽에 있는 작은 교무실 건물 뒤에서 불빛이 새나왔다. 남자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거의 모든 준비가 된 듯했다.
 
새벽잠을 뿌리치고 과감하게 학교까지 왔지만 막상 거기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건물에 가려 현장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까지만 다가갔다. 시작됐다. 주문 소리에 이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와 또 어떤 소리가 이어졌다.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게 있던 선생님들은 술꾼도 보통 석 잔 이상을 마시지 못하는 라오카오(라오스 독주, 보통 45도가 넘는다)를 연거푸 마셨다.
 
너무나 경건했던 딱받의 경험
 
나는 무언지 모를 마음을 안고 먼저 학교를 나왔다. 어느새 사위가 밝았다. 그래서 내가 지나야 할 길을 향해 앉아계신 할머니 모습이 멀리 보였다. 분명 딱받을 하러 나온 할머니 같은데 여행책자에서 본 루앙파방 딱받 사진과 전혀 달랐다. 아직 스님행렬도 보이지 않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넓고 조용하기만 한 길가에 오도카니 홀로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자전거를 타고 쌩 그 앞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내려섰다.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할머니를 가운데 두고 저 편에 스님들의 주홍색 가사가 나타났다. 이러다간 할머니 앞에서 스님들 행렬과 맞닥뜨릴 형세다. 서둘러 길을 건넜다. 그리고 건너편을 아주 천천히 지나며 싸이냐부리의 딱받을, 내가 처음 보는 딱받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아직 어두운 새벽에 일어났을 것이다. 정갈하게 씻고 곱게 단장하고 마지막 파비양(의례에 필요한 띠 모양의 천)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밥과 꽃을 정성스레 담아 집 앞 스님들이 지나시는 길에 나와 공양을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딱받하는 스님들도 많고 공양하는 사람들도 많고 구경하는 여행자도 많은 루앙파방과는 달리, 한 사람이 공양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일고여덟 분의 스님들에게 밥을 담아 드리는 할머니의 손길도 급하지 않았고, 또 행렬의 맨 앞에 서계셨던 스님은 할머니를 위해 독경도 하고 축원도 해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아예 자전거를 멈추어 섰다. 길 건너 살피는 너무도 경건하고 청신한 새벽 딱받 광경에 절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아, 마침 살생의 죄업에 함께한 날 라오스에 와 처음 딱받을 접하는 인연은 무엇일까? 무언지 모를 마음을 안고 있던 가슴에서 또 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영란 연결된 글 -> 신기하고 놀라운 세상, 라오스에서의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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