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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침묵의 순간을 지키고 싶다 
 
일부러, 없는 시간을 쪼개서 짬을 냈다. 굳이 화석연료를 소비하는 이동의 불편함도 감수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위대한 침묵> 때문이었다. 상영시간이 2시간이 넘는데도 ‘말’ 없이 진행된다고 하니, 그 궁금함이 더했다.
 

필립 그로닝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 2005

영화를 보는 동안, 수도원 안에서는 수행자의 발걸음 소리, 찬송 소리, 또 수도원 밖에서는 천둥, 번개, 비소리, 새소리, 벌레소리가 들릴 뿐, 수행자의 침묵수행으로 사람들의 말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영화적 분위기를 더하는 배경음악과 같은 별도의 효과도 없었다.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침묵한 채 관람에 집중했지만, 영화관 안은 자잘한 소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통화하는 소리, 코고는 소리, 기침소리, 음료수 마시는 소리,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아주 작은 소리조차 불편한 소음으로 민감해졌다. 침묵을 방해할까 내내 긴장하며 앉아 있어서인지, 영화가 끝난 후 머리도 무겁고 온 몸이 피곤해졌다.
 
자연의 소리, ‘상대적 침묵’이 있는 곳
 
나는 왜 그토록 이 영화가 보고 싶었을까? 갖은 소음에 시달리는 것이 도시의 일상이니,  ‘침묵’의 영화라는 것만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도시인인 나의 일상은 틈새 없이 소리로 채워져 있다. 자동차, 핸드폰, 광고, 가전제품이 만들어내는 자극적인 소음, 아파트 이웃이 들고 나거나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란 등. 확실히 도시는 침묵을 잃어버린 공간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소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다. 소음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그 스트레스가 도시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테니, 나도 모르는 사이 생존적 차원의 적응이 이루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소음에 익숙해져 조용하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질 만큼 고요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소음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도시를 닮아가는 나 자신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바로 내가 일상적으로 겪는, 그 짜증스러운 소음이 빠져 있었다. 숲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이 도시와 판이할 수밖에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말을 교환하지 않는 수행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 적막함은 극단적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리가 부재하지는 않았다. 살고 있는 사람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끊임없이 소리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계절과 기후가 바뀌면서 소리도 변화하고,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들도 자신의 소리를 교환하며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는 사람들의 넘치는 말소리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 환경에서 파생한 소음이었다. 나는 영화 속에서 바로 내가 찾고 있던 침묵, 사람의 침묵, 인위적 환경의 침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흔히 침묵은 아무런 소리도 만들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분명, 침묵이란 지극히 상대적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갈구하는 것은 침묵 자체라기보다 도시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소리’, 즉 도시가 잃어버린 소리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들리지 않는 소리 듣기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야기하는 소음으로 놓치는 소리 이외에도, 인간의 청각적 영역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하되 우리 귀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존재한다. 은하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고주파, 초저주파의 소리는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소리의 바다 속에 푹 빠져 있더라도, 귀로 들을 수 없다면 고요한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침묵, 고요, 적막함, 조용함’과 같은 단어들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이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정의’(定義)의 일반원칙을 벗어나 있긴 해도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그렇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우리 귀가 포착할 수는 없지만, 침묵 속에서 내면을 통해 듣는 비감각적 경험과 연결시킬 때다.
 
영화 속 수도사들의 침묵수행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고, 귀로 감각할 수 있는 소리 저 너머의 소리, 즉 신의 목소리를 듣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침묵은 그들로 하여금 내면 깊이 침잠하게 하며, 자연적 세계 너머로 확장되는 신비적 체험으로 자신을 열어두는 일이 된다. 내면의 울림, 초자연적 진동, 신의 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말을 닫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의 뿌리는 침묵에 있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잠시 일상적 소음을 줄이며 그들의 고독한 명상의 시간에 동참해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 깊은 침묵에 동참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너무 부스럭댄다.
 
침묵을 엿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수행자들처럼 침묵, 명상, 고독을 일상으로 삼고 있지 못하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대화에 집중할 때, 자연의 소리나 음악에 귀 기울일 때, 책 읽고 글쓰기에 몰두할 때, 또 생각에 몰입할 때나 침묵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침묵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긴 시간 동안 지속되지 못한다. 일상 속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침묵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은 ‘잠깐 동안’이다. 짧은 간격을 둘 때만이 침묵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 속에 주의를 집중해, 내면 깊숙한 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짧은 시간도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감동적인 것, 경이로운 것, 경외감을 주는 것을 ‘신’이라 불렀다 한다. 어쩌면 이같은 심오한 내적 체험이야말로 ‘신’이라는 술어가 꼭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다. 제도적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신과의 만남’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성스러운 체험이 가능할 것도 같다.
 
반복적이고 잡다하고 지루하다 치부되는 일상 속에서 잠시 동안 침묵을 통해 의식을 깨울 수 있다면, 폐쇄적이고 한계에 갇힌 나를 열어놓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도 그때다. 집중이 내 안을 파고들거나 나의 바깥을 향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수도원 독방의 삶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사람이기에 밖을 향한 침묵도 내면 속으로 가라앉는 침묵만큼이나 중요하다. 삶이란 나의 밖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것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와 같이, 외부로 나를 열어놓는 침묵도 내면으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방해 받지 않고, 자연의 소리이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집중할 수 있는 짧은 침묵, 그 침묵을 지켜낼 수 있는 그런 일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 침묵에서 풍요롭고 창조적인 일상을 퍼 올릴 수 있으니까. 침묵을 엿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필자의 다른 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 음악에 마음을 다시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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