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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음악에 마음을 다시 열어
 
틈만 나면 음악을 듣곤 한다. 때로는 집중해서, 때로는 배경처럼. 지난 여름, TV가 벼락맞아 망가진 이후부터 생긴 변화다. 게다가 대대적인 집안정리를 끝낸 여동생이 카세트테이프 한 보따리를 안겨준 다음, 음악 들을 일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덕분에, 먼지가 쌓여가던 어머니의 유품 카세트테이프와 최근 10여년 동안 거의 밀쳐두다시피 했던 CD까지 더불어 꺼내 듣게 되었다.
 
새롭게 알아가는 낯선 곡부터 이미 여러 번 들어 귀에 익숙한 곡까지, 요즘 내 귀는 그 어느 때보다 갖가지 선율들을 받아 안느라 분주하다.
 
기억을 깨우는 음악
 

*함께 읽자. 로베르 주르뎅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궁리, 2002)

무엇보다도 음악이 제공하는 청각적 기억의 생생함을 즐기고 있는 참이다. 신기하게도 음악은 그와 함께 했던 사건과 상황, 사람과 풍경, 당시에 느꼈던 기분, 가끔은 체험했던 날씨까지도 되살려준다.

 
어떤 팝송은 열광하던 어린 동생의 모습을 눈 앞에 되살려 놓았고,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늘어나 망가진 테이프의 노래가락은 그것을 사온 날의 젊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또, 초등학교 시절, 매일 아침마다 교실에서 피아노 연주에 열중하셨던 곱슬머리 담임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바하, 돌로 지은, 천장 높은 프랑스 대성당 안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넋 놓고 들었던 모짜르트, 더 이상 만나지 않아 잊고 지내는 친구들을 불현듯 생각나게 하는, 영화의 인상적인 주제곡 등, 기억이 음악의 선율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평소 추억에 잠기거나 기억을 더듬는 과거 돌아보기에 무심한 나조차도 음악을 듣다 보면, 먼 시간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기억의 단편들을 퍼올리고, 잠시 그 곁에 머무르는 일이 흔하다. 곡에 따라, 단 하나의 기억만을 깨워내는 것도 있고, 여러 기억들을 중첩적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음악이 일깨우는 추억은 아련할 뿐, 감정이 넘치지 않아 좋다. 이러한 회상들은 하나같이 정화된 감정과 함께 재생되어 현재와 더불어 풍요로워지는 듯 하다. 그래서 수 차례 들어 잘 알고 있는 곡을 다시 반복해서 들어도 변함없이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지금 새롭게 알아나가는 곡들도 언젠가는 추억의 공간을 열어주는 또 다른 열쇠가 되어 주리라.
 
어린 시절 꿈을 떠올리며
 
이처럼 나를 과거로 안내하는 것은 바로 감상을 통한 음악이다. 비록 평범한 음향기기의 힘을 빌리고 70년대의 카세트 테이프, 80년대의 CD와 같은 녹음.재생 기술에 의존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중음악을 접하기 어려웠던 먼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그 정도라도 음악을 즐기기에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음악에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감상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피아노 곡을 듣다 보면 아직도 연주자, 작곡가를 꿈꾸는 작은 꼬마가 떠오른다. 그 기억이 어렴풋하긴 하지만, 할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날부터 난 음악을 하는 예술가를 꿈꾸었다. 어린 시절 난 피아노란 악기가 좋았고, 그 악기를 두드리는 일이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 일은 나를 미래로 비상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날고 있던 꿈은 곧 그 날개를 접고 현실 속에 갇혀버렸다. 피아노 치기는 중요한 취미가 되어 내 일상으로 계속 남았지만, 더 이상 음악 속에서 미래를 보지는 못했다. 음악은 멜로디와 화음에 대한 감상의 영역으로 더 깊숙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가끔은 피아노를 치며 잊혀져 가는 꿈에 대한 아릿한 감정에 젖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한때 내 동생도 청소년기에 드러머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동생이 건네준 오래된 팝음악을 듣다 보니, 동생의 잊혀진 꿈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동생은 그 이후 단 한번도 그 꿈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사실 지금은 그녀가 그런 꿈을 꾸었는지조차 희미할 지경이다.
 
그 소녀들이 자라면서 꿈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음악은 여전히 그 꿈을 품고 있었다.
 
음악이 휴식과 위로를 안겨주고
 
비록 음악이 어느 순간 꿈의 날개를 잃긴 했어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일에서 놀이가 된 음악은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휴식이 되어 갔다. 아주 고독하고 피로하고 어려운 순간순간, 나를 위로하고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도 바로 음악이었다. 특히, 일상이 벅차고, 심신이 지쳐있던 유학시절, 음악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무엇보다 피아노가 내게 안식이 되리라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음악이 일상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행복해지면서 였던 것 같다. 내 일상 속에서 일로, 놀이로, 휴식으로 그 의미는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깊숙이 뿌리내려온 음악이 마침내 그 자리마저 내어놓게 되었다. 음악이 아니라도 즐거울 수 있었고, 편히 쉴 수 있었던 나는 서서히 음악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슬프고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고 쉴 수 있게 해 주었던 음악, 나는 그 음악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난 더 이상 음악에 집중하지 않게 되었고, 음악은 내 일상의 부수적인 무엇이 되어 버렸다. 버스 라디오, 텔레비젼, 인터넷, 거리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아니면 모임이나 식사의 배경음악으로도 아쉬움이 없었다. 당연히 피아노를 가까이 하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 난 우연히, 다시 음악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음악은 내게 과거의 저장고가 되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시각, 촉각, 후각, 미각이 상당히 발달한 이후에야 비로소 마지막으로 진화했다는 청각, 그 감각이 수용하는 소리들 가운데 인간의 두뇌경험과 만난 질서정연한 진동으로서의 음악. 어쩌면 음악의 체험은 복잡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란 생명체에게 특혜로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형식적 묘미뿐만 아니라 황홀함의 감흥까지 안겨주는 것이 음악 아닌가.
 
앞으로도 내가 음악의 세계에서 마주하게 될 새로움과 경이로움은 무한할 듯 하다. 그것이 멜로디건, 화성이건, 리듬이건, 장르이건, 연주자이건…. 나는 음악과 미래를 동행하고 싶다. 아직도 음악이 나를 꿈꾸게 한다.   일다는 어떤 곳?
 
* 함께 읽자. 로베르 주르뎅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궁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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