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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에서 “철학하는 일상”으로 글을 써 온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이제 나란 사람이 일상 속에서 철학을 어떻게 접목시켜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접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들만의 세상, 강단철학
사실 내가 철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유들로 철학과에 입학하면서였다. 평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이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말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그곳에서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철학과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동안 만나왔던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부가 유별난 취향의 겉모습으로 자기를 부각시키거나 과도한 오만을 내면화하고 있어, 평범한 사람과 달라 보이긴 했지만, 그들 역시도 내가 소통을 원했던 이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평균 성비(性比)가 적용되지 않는, 구성원 절대다수가 남자인 -학생들 대부분도 남학생들이었지만, 교수진 전원이 남자인- 철학과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여성비하, 여성차별이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그곳에서 소통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게다가 철학과 수업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평소 듣기도 힘든 동서양의 난해한 철학이론들이 난무하고, 일상어와는 다른 현학적인 언어가 판을 치는 별난 곳.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다. 내가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삶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육체도, 물질 세계도, 감각과 감정도, 생명도, 여성도 모두 그곳에서는 평가절하되었다.
대학 강단의 철학 전문가들은 세상 사람들이 철학을 무엇으로 생각하건 세상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소위 대단한 철학자의 사상을 곱씹고 되새김질할 뿐,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생각을 공유하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들 누군가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삶과 괴리된, 갇힌 철학은 고사 직전이었다. 그런 마당에야 ‘철학의 종말’을 외치는 자가 등장했다 해도 뭐 놀랄 일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의 철학은 사주팔자?
대학이 삶으로부터 철학을 감금해놓고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 곁에는 사이비 철학이 떠돌고 있었다. 먼저 ‘철학관’부터 떠올리는 그들에게 철학은 ‘사주팔자’, ‘손금’, ‘관상’을 보는 것이었다. ‘철학관’ 사업하는 남편과 같은 공부를 한다며 반가워했던 아주머니, 철학과를 다닌다는 내게 손을 내밀며 손금을 봐달라던 어머니 친구분, 철학연구소를 냈을 즈음 ‘철학관’ 간판을 본 기억이 난다며 아는 척하던 이웃 등.
일상적으로 ‘철학’이라는 용어를 접할 기회가 길거리 철학관 간판 이외에는 없기 때문인지, 철학과 입학 이후 지금까지도 이같은 경험은 변함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가끔 장난스레 사람들에게 ‘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보다 믿거나 말거나 한 관상과 손금, 사주팔자를 봐 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철학도인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재미나다.
그나마 ‘돈벌이에 별 도움 안 되는 공부’, ‘굶기 딱 좋은 공부’, 아무튼 ‘어려운 공부’, ‘별난 공부’를 하는 존재로 취급 당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낫다. 지금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들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부의 추구를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나 지금 당장 생존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철학이 비현실적이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없어도 그만인 관심 밖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또 근거 없는 설명을 제공하며, 철학관의 철학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학이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철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아무튼 대학 강단의 철학도, 세상 사람의 철학도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을 가까이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대체 그런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그런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을 깊은 사색을 통해 조금씩 얻어가면서 그 답을 삶 속에 적용해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 하는 삶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좋은 방향을 향해 생각을 잡아나가고 세상의 좋은 창을 얻어나간다. 방향을 잘 잡은 좋은 관점은 세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 책임감 있는 생각에 도달하게 한다. 이렇게 얻어진 좋은 생각은 일상 속에서 적절한 행동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되어 주고, 좋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지침이 된다. 성실한 실천이 더해진다면, 나날이 조금씩 더 나은 삶을 낳고, 우리를 성장시킨다.
결국, 철학한다는 것은 더 깊고 더 열린 생각을 추구하고, 그 생각을 삶 속의 행동으로 실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더 깊고 더 열린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같은 철학하는 삶의 과정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생각한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을 이렇게 재해석해본다면 무리일까?
그렇다면, 진리, 진실, 지혜를 찾아가는 공부, 즉 철학이 특정인의 몫일 이유가 없다.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좋은 삶을 갈구하고 열망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철학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 진실, 지혜를 꼭 대학에 가둬둘 까닭도, 대학에서만 추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꼭 대사상가의 책을 붙잡고 땀 흘릴 필요도 없다.
또, 누군가에게 ‘내 삶을 대신 설명해 달라’ 요구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내 삶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다른 생명체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하는 삶이 좀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일상 속에서 철학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밖에 없다. 바로 ‘철학하는 일상’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었다.
어느 누구도 홀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나 홀로 헤쳐나가기는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길을 안내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 대부 분을 독서를 통해 만나왔다(그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까지 참고로 소개해 보았다). 하지만, 때로는 삶 속에서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좋은 삶, 좋은 삶의 이상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분적이나마 좋은 삶을 실현하고 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부단히 노력 중이라면, 내 삶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믿고 따를 만하다. 처음에는 남의 옷처럼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내 몸에 꼭 맞는 옷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다.
아무튼 내 삶, 생각이 전적으로 나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이유가 그렇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수준의 내 일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도 홀로 하되 함께해야 하며, 행동 역시도 홀로 하되 함께 행하는 것이다. 누구도 홀로 성장하지 않는 법이다.
내게 꼭 맞는 좋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꼭 맞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구체적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없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삶이라고 해도 그것이 내게 어울리는, 내가 해낼 수 있는 삶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내가 이루고 싶은 좋은 삶이 아닐 수도 있다.
각자가 꾸려가는 일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개개인의 성향과 능력, 그리고 각자가 처한 삶의 여건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고민과 실천에서 있어 문제의식의 우선 순위도, 방향, 질, 수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각자 자기자리에서 깊이 생각해보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소개한 나의 일상은 무수한 실천사례들 중 하나일 뿐 좋은 삶의 모범일 수 없다. 더 깊이 있고, 더 나은 방향의 생각, 더 진지하고 철저한 실천이 어찌 없을까! 나 역시도 지금 이 순간 더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삶 속에서의 성장은 일회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실천, 쉼 없는 노력을 통해 가능할 따름이다. 유한하고 부족한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삶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 테지만, 좀더 나은 삶을 향한 성장은 바라는 자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다.
지금껏 “철학하는 일상”에 관심을 가져 주신 분들께 마지막으로 ‘일상 속의 철학을 포기하지도, 좀더 나은 삶으로의 희망을 접지도 말고, 성장의 꿈을 함께 꾸자’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이 칼럼을 끝으로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이어 필자의 새로운 칼럼 [도서관나들이]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 www.ildaro.com
그들만의 세상, 강단철학
사실 내가 철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유들로 철학과에 입학하면서였다. 평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이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말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그곳에서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철학과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동안 만나왔던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부가 유별난 취향의 겉모습으로 자기를 부각시키거나 과도한 오만을 내면화하고 있어, 평범한 사람과 달라 보이긴 했지만, 그들 역시도 내가 소통을 원했던 이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평균 성비(性比)가 적용되지 않는, 구성원 절대다수가 남자인 -학생들 대부분도 남학생들이었지만, 교수진 전원이 남자인- 철학과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여성비하, 여성차별이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그곳에서 소통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게다가 철학과 수업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평소 듣기도 힘든 동서양의 난해한 철학이론들이 난무하고, 일상어와는 다른 현학적인 언어가 판을 치는 별난 곳.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다. 내가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삶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육체도, 물질 세계도, 감각과 감정도, 생명도, 여성도 모두 그곳에서는 평가절하되었다.
대학 강단의 철학 전문가들은 세상 사람들이 철학을 무엇으로 생각하건 세상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소위 대단한 철학자의 사상을 곱씹고 되새김질할 뿐,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생각을 공유하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들 누군가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삶과 괴리된, 갇힌 철학은 고사 직전이었다. 그런 마당에야 ‘철학의 종말’을 외치는 자가 등장했다 해도 뭐 놀랄 일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의 철학은 사주팔자?
대학이 삶으로부터 철학을 감금해놓고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 곁에는 사이비 철학이 떠돌고 있었다. 먼저 ‘철학관’부터 떠올리는 그들에게 철학은 ‘사주팔자’, ‘손금’, ‘관상’을 보는 것이었다. ‘철학관’ 사업하는 남편과 같은 공부를 한다며 반가워했던 아주머니, 철학과를 다닌다는 내게 손을 내밀며 손금을 봐달라던 어머니 친구분, 철학연구소를 냈을 즈음 ‘철학관’ 간판을 본 기억이 난다며 아는 척하던 이웃 등.
일상적으로 ‘철학’이라는 용어를 접할 기회가 길거리 철학관 간판 이외에는 없기 때문인지, 철학과 입학 이후 지금까지도 이같은 경험은 변함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가끔 장난스레 사람들에게 ‘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보다 믿거나 말거나 한 관상과 손금, 사주팔자를 봐 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철학도인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재미나다.
그나마 ‘돈벌이에 별 도움 안 되는 공부’, ‘굶기 딱 좋은 공부’, 아무튼 ‘어려운 공부’, ‘별난 공부’를 하는 존재로 취급 당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낫다. 지금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들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부의 추구를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나 지금 당장 생존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철학이 비현실적이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없어도 그만인 관심 밖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또 근거 없는 설명을 제공하며, 철학관의 철학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학이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철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아무튼 대학 강단의 철학도, 세상 사람의 철학도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을 가까이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대체 그런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그런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을 깊은 사색을 통해 조금씩 얻어가면서 그 답을 삶 속에 적용해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 하는 삶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좋은 방향을 향해 생각을 잡아나가고 세상의 좋은 창을 얻어나간다. 방향을 잘 잡은 좋은 관점은 세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 책임감 있는 생각에 도달하게 한다. 이렇게 얻어진 좋은 생각은 일상 속에서 적절한 행동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되어 주고, 좋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지침이 된다. 성실한 실천이 더해진다면, 나날이 조금씩 더 나은 삶을 낳고, 우리를 성장시킨다.
결국, 철학한다는 것은 더 깊고 더 열린 생각을 추구하고, 그 생각을 삶 속의 행동으로 실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더 깊고 더 열린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같은 철학하는 삶의 과정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생각한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을 이렇게 재해석해본다면 무리일까?
그렇다면, 진리, 진실, 지혜를 찾아가는 공부, 즉 철학이 특정인의 몫일 이유가 없다.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좋은 삶을 갈구하고 열망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철학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 진실, 지혜를 꼭 대학에 가둬둘 까닭도, 대학에서만 추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꼭 대사상가의 책을 붙잡고 땀 흘릴 필요도 없다.
또, 누군가에게 ‘내 삶을 대신 설명해 달라’ 요구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내 삶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다른 생명체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하는 삶이 좀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일상 속에서 철학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밖에 없다. 바로 ‘철학하는 일상’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었다.
어느 누구도 홀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나 홀로 헤쳐나가기는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길을 안내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 대부 분을 독서를 통해 만나왔다(그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까지 참고로 소개해 보았다). 하지만, 때로는 삶 속에서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좋은 삶, 좋은 삶의 이상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분적이나마 좋은 삶을 실현하고 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부단히 노력 중이라면, 내 삶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믿고 따를 만하다. 처음에는 남의 옷처럼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내 몸에 꼭 맞는 옷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다.
아무튼 내 삶, 생각이 전적으로 나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이유가 그렇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수준의 내 일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도 홀로 하되 함께해야 하며, 행동 역시도 홀로 하되 함께 행하는 것이다. 누구도 홀로 성장하지 않는 법이다.
내게 꼭 맞는 좋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꼭 맞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구체적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없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삶이라고 해도 그것이 내게 어울리는, 내가 해낼 수 있는 삶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내가 이루고 싶은 좋은 삶이 아닐 수도 있다.
각자가 꾸려가는 일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개개인의 성향과 능력, 그리고 각자가 처한 삶의 여건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고민과 실천에서 있어 문제의식의 우선 순위도, 방향, 질, 수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각자 자기자리에서 깊이 생각해보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소개한 나의 일상은 무수한 실천사례들 중 하나일 뿐 좋은 삶의 모범일 수 없다. 더 깊이 있고, 더 나은 방향의 생각, 더 진지하고 철저한 실천이 어찌 없을까! 나 역시도 지금 이 순간 더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삶 속에서의 성장은 일회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실천, 쉼 없는 노력을 통해 가능할 따름이다. 유한하고 부족한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삶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 테지만, 좀더 나은 삶을 향한 성장은 바라는 자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다.
지금껏 “철학하는 일상”에 관심을 가져 주신 분들께 마지막으로 ‘일상 속의 철학을 포기하지도, 좀더 나은 삶으로의 희망을 접지도 말고, 성장의 꿈을 함께 꾸자’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이 칼럼을 끝으로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이어 필자의 새로운 칼럼 [도서관나들이]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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