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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지난 주말부터 기력이 소진되어, 조금씩 나아지곤 있지만 회복되지 않고 있다. 신체의 리듬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 활력이 줄어들었다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다만, 몸 상태에 따라 일상을 조절해나가려면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평소에 대비해두는 지혜는 필요한 것 같다. 그나마 이렇게 기운이 없고 무기력할 때에조차 책은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여백이 많은 책을 선택하자
 
물론, 집중력이 떨어져 일하듯 독서하지는 못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책장을 넘길 뿐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 내용을 잘 기억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보를 구하기 위해 책을 펼쳐 든 것이 아니니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놀이 삼아, 휴식 삼아 책을 읽을 때는 활자를 자유롭게 따라가다 마음 꽂히는 대목에 잠깐씩 주의를 집중할 뿐이다. 그 순간 생각은 날개를 달고, 비상한다.
 
언젠가 읽은 적 있는 구절이 불현듯 떠올라 서로 이어지기도 하고, 저 깊은 곳에서 잠자던 과거의 기억을 깨워 생명을 불어넣기도 한다.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몽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 현실의 사슬을 끊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도 한다. 제멋대로 마구 자라난 생각은 읽고 있던 책과도 동떨어진 낯선 것, 미리 짐작하지도 못한 무엇으로 탈바꿈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책에서 거론하고 있지 않는 생각을 끌어내어 풍성하게 키워내는 것이다.
 
이처럼 흥미진진한 생각놀이가 가능하려면 여백이 많은, 생각의 간격이 많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친절하게 세세히 잘 알려주어 내 생각이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촘촘한 책, 구체적인 책이라면 적당하지 않다. 물론, 그 어떤 책도 간격을 가지고 있어, 생각이 활발할 때는 이런 책 속에서도 빈 곳을 찾아 재빨리 내 생각을 심어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쳐 있을 때는, 정신도 몸도 활기 없이 늘어져 있기에 금방 지치고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면 생각이 채 펼쳐지기도 전에 책장을 덮게 된다.
 
아무튼 생각의 여백이 많은 책이 꼭 특정 장르, 특정 분야의 책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에세이, 소설, 그림책 등, 어떤 장르의 책이라도 상관없다. 철학, 과학, 문학, 예술 등 어떤 분야라도 좋다. 오히려 개개인의 흥미와 더 밀접한 연관이 있을 듯싶다. 관심이 있으면 집중하기 마련이고, 몰두하다 보면 생각도 절로 자란다.
 
“난 아직도 충분히 웃지 못했어!”

 
지금 나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플라톤(고대 그리스 철학자. B.C. 427-347)이 등장하면서 미소는 사라진다”는 구절을 읽고 있는 중이다. 미소를 거둬버린, 최초의 사변철학자가 플라톤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이상국가의 철인왕이 된 플라톤이 진지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이 도시에서 시인을 추방한다!”라고 엄숙히 외치는 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진다. 시인이 없는 도시라니!
 
순식간에, 미소추방의 혐의를 받는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고대 그리스 철학자. B.C. 470-399)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생겨난다. 왜 소크라테스는 그 혐의를 떨쳐낼 수 있었던 걸까? 감방에서 독배를 앞에 두고도 ‘기쁜 낯빛’을 했다는 소크라테스. 아마도 그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미소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죽음이야말로 영혼의 감옥인 육신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영혼 해방의 기회이니 말이다.
 
나는 지금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는 그 감방으로 달려가 사람들 곁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지막 순간 ‘아스클레피오스(의약의 신)에게 빚진 닭을 대신 갚아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진정으로 영혼을 치유하는 바로 순간이 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미소’를 뒤에 남겨놓은 채, 난 다시 키 큰 포플라 나무들이 울창한 높은 언덕을 향해 ‘데모크리토스(고대 그리스 철학자. B.C. 460-370)의 웃음’을 찾아 달려 나간다. 미소도, 웃음도 없는 플라톤, 미소 짓는 소크라테스, 그리고 비웃는 데모크리토스가 차례차례 등장하다니, 대단한 놀이판이다. 관대한 미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웃음, 광인의 웃음, 아니 냉소하고 조롱하는 웃음. 데모크리토스는 마구 비웃고 있다. 루벤스(플랑드르 화가, 1577-1640)가 남겨놓은 판화 속에서 그는 미친 듯이 웃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웃고 있는 데모크리토스가 미친 사람일 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에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다름 아닌 ‘악의, 탐욕, 불만족, 증오, 계략, 음모, 질투’에 가득 찬 인간이다. 그는 그 어리석은 인간을 비웃고 있으며,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면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동물들도 다 만족할 줄 알지만, 인간만이 만족을 모른다면서.
 
결국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광인처럼 보이는 자가, 실은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 영혼을 치유토록 돕는 현자인 것이다. 그의 웃음이야말로 각성의 소리로 보아야 하겠다. 광인의 웃음이 베일을 벗기는 진리. 진실은 항상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철학자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을 언짢게 만드는 자인 모양이다.
 
철학자의 광기를 치료하러 방문한 히포크라테스(고대 그리스 의학자. B.C.460(?)-377(?))에게 데모크리토스가 건네는 말을 살짝 엿들어 본다. “난 아직도 충분히 웃지 못했어! 그들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네. 의사는 그들을 치료할 수 없어.” 이야기를 끝낸 현자는 더 이상 웃지 않고, 길 떠나는 의사를 미소로 배웅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철학자도 만나보았으니 이제 울고 있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고대 그리스 철학자. B.C. 544-484) 생각이 난다. 사람을 피하는 그를 어디에서 찾나? 플라톤 못지 않게 시인들을 경멸한 철학자. 시인들을 국가에서 쫓아낼 궁리를 했던 플라톤과 달리, 그들로부터 몸을 숨겨 지내는 쪽을 택한 그. 그래서 그토록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를 찾으려면, 강가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모든 건 흘러. 세상은 쉼 없이 변하는 것이지’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조용히 홀로 울도록 내버려둬야겠다.
 
난 다시 내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날아다니던 생각도 날개를 접고 책 속으로 얌전히 내려 앉았다. 상상과 기억은 한 쪽으로 밀쳐두고, 멈추었던 구절에서 다시 책 읽기를 계속한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참으로 마음 편안하고 한가한 오후다.
 
*함께 읽자. 플라톤 <플라톤의 대화>(종로서적, 1985) 중 ‘파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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