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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작가 최규석 (창비, 2009.6)
-‘2009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
남녀 간 차별의 벽이 과거와 달라지는 가운데, 만화계도 성별유통구조 즉, 남성작가-여성작가, 남성독자-여성독자이라는 이분법이 허물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만화작품 속 여성주의적 시각은 어느 정도 진일보했을까. 어느 정도 균질화됐을까. 2009년 지난 한 해 만화관련 기관과 단체에서 우수작품을 선정했다. ‘오늘의 우리만화상’, ‘부선만화대상’, ‘독자만화대상’ 등의 수상작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검증 받은 작품이다. 이들 작품을 대상으로 여성주의적 읽기를 시도해 본다. 스포일러 유의.
언제나 대한민국의 현재를 그리는 작가, 최규석
최규석이란 작가를 알게 된 건 둘리 때문이었다. 지금의 30,40대라면 둘리를 모를 리 없다. 이들이 아이였을 때 가난하든 부자든 모두 둘리를 보고 자랐다. 그런데 그 귀여웠던 ‘우리의 둘리’를 최규석은 외국인노동자로 성장시켰다.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 빈민층에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시켰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가 책으로 묶여 나왔던 때가 2004년. IMF 파고 이후 청년 실업난이 심화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던 시기다.
그가 쓴 책이라서 부러 사서 읽게 된 작품이 <대한민국 원주민>이다. 이 작품이 나온 지 1년이 안 돼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이를 쫒아 내려는 사업자-정부가 한편에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원주민에겐 생사를 건 투쟁이었다. 끝내 공권력에 의해 원주민의 목숨들이 순식간에 산화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산골 가족의 도시 이주사’라는 책 내용은 뒤로 하고, 작년 한 해 그 제목이 불쑥불쑥 깔깔하게 떠올려지던 작품이었다.
우연일까. 그가 쓴 작품마다 한국사회의 현재가 포개진다. 2천 9년, <100℃>가 발간됐다.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용산참사가 일어났고 봄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 가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또다시 많은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소통과 연대, 용서와 화해가 화두가 됐다.
최규석은 이 작품을 당초 단행본으로 발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6월 항쟁을 모르는 중고등학생을 위해 보충교육용으로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의지와 달리 너무 많은 이들이 이 만화를 봤다. 작가는 이들의 호응에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부록을 덧대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열혈 독자가, 많은 민중이, 그의 작품을 인터넷 밖으로 호출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기에, 어떻게 이야기하기에, 많은 대중의 호출을 받은 걸까. 먼저 그 내용에 주목해보자.
가족 서사로 풀어낸 6월 민주항쟁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오래된 구호가 있다. 사적이고 하찮은 문제로 치부됐던 가정 안의 여성문제를 가부장제 사회라는 공적 구조에서 살펴보자는 외침이다. 비단 여성문제만이 아니다. 이 모토에 따르면 모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돼 흐른다.
최규석의 작품은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확장해 공적 영역의 문제를 꼬집는다. 그것도 가족이라는 혈연집단을 다루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엄마와 누나들의 존재, 욕망,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앞서의 작품들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긍정 마인드가 흐른다. 어둡고 음습한 현실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100℃>는 말하자면 영호 가족구성원 모두가 1987년 6월 10일 민주항쟁의 거리에 어떻게 서게 됐나를 밝히는 이야기다. 엄마와 아빠, 형과 누나, 그리고 영호는 지방의 한 소도시 출신이다.
먼저 영호 이야기. 대학생 영호는 반공소년이었다. ‘저 광주의 폭도들을 보십시오’ 라고 웅변하던 어린 영호는 서울의 한 대학생이 돼 광주학살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거짓과 진실을 마주하게 된 대학 1년차. 신입생인 영호는 운동 서클에 들어오라는 선배의 권유를 받고 고민한다. 데모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고 절대 참여하지 말라는 부모의 밥상머리 훈계와 다짐을 받지만 누나의 책망에 운동권에 가담하게 된다. 영호의 서클활동은 ‘웃으면서’ 발랄하게 그려진다. 열렬한 운동권 학생이 돼 건국대 사태로 구속된다.
6월 민주항쟁에 영호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은 엄마다. 엄마 장옥분은 유년시절 보도연맹 사건으로 엄마를 잃었다. ‘빨갱이 딸년’이라는 배척을 받으며 두려움 속에서 컸다. 정부의 말이 진실인 걸로 알았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으나 일가족의 어머니가 됐다. 둘째 영호가 구속된 후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한다. 서울의 민주화 항쟁 현장에 서서 수많은 운동권학생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영호의 누나. 오빠와 남동생 학비 때문에 공장노동자가 돼야 했다. 영호가 운동권학생에 대해 ‘미친놈들이죠’라고 발언하자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마!’라며 일침을 가한다. ‘노동 3권 보장’과 ‘노동자도 인간이다’를 대신 외쳐주는 그들을 노동현장에서 보고 눈물을 삼킨 기억이 있다. 뒷날 감옥에 갇혀있는 영호를 면회하면서 노조운동을 하겠다고 밝힌다.
형 권영진은 회사원이다. 장남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대학에서 공부만 했다. 구속된 동생을 보고 엄마가 빨갱이가 됐다고 절망하자, 그런 것 아니라고 옹호한다. 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두고 언쟁이 붙은 술집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만 슬퍼하는 게 아니라고 차분하게 말한다. 몸은 앞에 서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다. 여건이 주어지자 그도 6월 10일 민주화 항쟁의 거리에 선다.
아버지는 가장 늦게 합류한다. 영호가 구속됐지만 내내 면회하지 않았다. 자식뿐만 아니라 아내도 빨갱이가 됐다며 술을 마신다. 아내의 민가협 활동을 필사적으로 말린다. 그러나 아들 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외침에 맞춰 택시 안에서 경적시위에 손을 얹는다.
영호와 운동권학생, 누나와 공장노동자, 엄마와 민가협, 영진과 회사원 마지막으로 가장 고지식한 가부장인 아버지세대. 이들 개인의 고뇌는 당대 각 계층이 껴안고 있던 현안이다. 그래서 이들 가족이 겪는 내적 갈등과 외적 충돌은 우리사회 민주화 현장의 축소판이 된다.
엄마의 외침은 가장 낮은 곳의 소리
영호의 엄마, 장옥분은 어렸을 적 보도연맹으로 엄마를 잃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독재정권의 공포정치를 몸소 겪었다. 누구보다 ‘빨갱이들’을 향한 처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갇힌 아들에게도 ‘빨갱이’ 죄목을 물리자, 교도소 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민가협 실무진이 폭로하는 독재정권의 만행을 듣고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
“야이! 똥물에 튀겨 죽일 넘들아아아!”라는 장옥분의 욕설은 단지 감옥에 갇힌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권에 의해 희생된 자신의 모친에 대한 죽음,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농락당한 자신의 억울함이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이 소리는 모성(母聲)을 넘어 오랜 세월 독재정권에 희생된 민중의 한, 가장 순박하고 가난한 민중의 외침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장옥분의 캐릭터는 그 어떤 캐릭터보다 강하다. 그녀의 입과 행동은 그 어떤 칼이나 방패보다 더 통쾌하다. 독자는 순박하지만 거침없는 엄마의 욕설과 행동을 통해 권위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희열을 느낀다.
장옥분이 벌이는 행각 중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다. 바로 장옥분의 꿈이다. 구속된 아들 영호의 석방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어느 날 교도소 담장 아래에서 꿈을 꾼다. ‘인권탄압 중단하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군부독재 물러가라, 학생들을 풀어줘라’ 일련의 구호를 외치는 장옥분을 경비교도원이 그만하라며 껴안는다. 장옥분은 그를 감싸 안으며 ‘어이구 내 새끼’하고 흐느낀다. 이어 경비교도원은 징벌방에 갇힌 영호의 얼굴과 나란히 배치된다.
이 꿈은 민주화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한다.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편 가르식 이분법을 넘어선다. 6월의 민주항쟁은 체제에 순응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세력, 억압을 가르치는 권력, 폭력을 강요하는 독재자를 향한다. 꿈을 깬 장옥분의 교도소 담장 뛰어넘기는 민중운동이 되고 다수가 참여하는 범 시민운동이 된다. ‘내 새끼들 걱정 말고 싸워라! 니들이 잡혀가면 우리가 구해줄텐게!!’라는 연설은 민주화 운동에 나서는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응원이 된다.
갇힌 내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침내 모두가 펄펄 끊어 넘치는 100℃가 된다.
이들의 역사를 기억하기, 공부하기, 고민하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개방 반대’를 외치던 집회무리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비폭력”을 함께 외쳤다. 비단 서울의 광화문 거리에서만이 아니었다. 지방 도처에서 벌어졌다. 집회는 장기전이었고 인파는 꽤 많았다. 온 나라가 집회로 북새통이 됐다.
와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촛불소녀’라는 아이콘과 실제 교복을 입은 여중고생들, 그리고 ‘유모차 부대’다. 이들이 광장에 서게 된 것은 먹을 거리 소비의 주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따져보면 민주화 광장에는 늘 여성도 한 주체로 서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증언과 기록은 참 짧다. 여성들의 외침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부끄럽게도 30대 중반인 나는 6월 민주항쟁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위안이 되는 건 나이가 얼추 비슷한 작가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만화 제작을 거절하려 했다고 하니. 나는 「그래서 어쩌자고?」의 부록에 나오는 녹용처럼, 민주화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현 정치에 대해서는 시니컬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많은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록을 찾게 됐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그리고 6월 민중항쟁에 선 이후 여태껏 활동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들(박정기, 배은심 여사). 민족가족협의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임기란 여사. 성고문을 폭로하고 민주화 운동을 젠더 관점에서 연구한 권인숙 교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운동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제공하고 옷을 지어주며 때론 광장 한가운데 섰던 이들의 역사와 기록들.
더불어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남성의 두 배가 넘는 비정규직의 여성화, 조직과 가정 내의 실천적 민주주의에 대해. 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최규석 작가가 개인적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 '김은혜의 만화읽기' 필자 소개: <여성 다시 읽기>와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회원이자 방송작가. 네 살 난 아이와 함께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즐기는 유쾌한 워킹맘. 순정만화를 탐구하고 홍보하는 페미니스트. ▣ 일다는 어떤 곳?
[김은혜의 만화읽기]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환상녀 구미호,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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