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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교육일기] 감동을 나누고 싶어하는 아이들

유학시절, 꼭 3년을 살았던 집에 처음 이사를 갔을 당시, 주인집 큰딸 쥴리엣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사 온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쥴리엣이 내게 “너 색깔에 대해 알아?”라고 묻길래, 장난 삼아 “몰라”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갖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내게 색깔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색에 대해 배운 다음날, 우연히 다시 만난 쥴리엣은 나를 보자마자 어제 배운 걸 복습을 하겠단다. 여러 질문에 척척 대답하는 나를 보며, “너, 정말 똑똑하구나!”하면서, 쥴리엣은 자기 학생이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는 걸 매우 흐뭇해했다.
 
복습을 다 끝내고 쥴리엣이 내게 물었다.
“그럼, 너 시계는 볼 줄 알아?”

 
불어로 시간 읽는 방법이 얼마나 복잡한지 너무 잘 아는 터라, 나는 그녀에게 잡혀 그걸 다시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응, 시계는 볼 줄 알아”라고 대답했다. 쥴리엣은 색깔도 모른다는 애가 어떻게 시계는 볼 줄 아는지, 놀라운 듯 눈이 동그래져서는 “어디서 배웠어?”하고 묻는다.
 
“나도 학교에서 배웠지!”
 
그날 내게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걸 실패한 쥴리엣은 대신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쓰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틈만 나면, 시간이 없다고 다른 책들도 읽을 것이 너무 많다고 극구 사양하는 내게, 너무 재미있는 이것들을 제발 꼭 좀 봐 달라고 조르기까지 하면서, 책이나 비디오를 빌려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피노키오>와 <인어공주 2탄>을 비디오로 보았고, 그곳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도 여러 권 읽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줄리엣을 떠올린 건 아영이 때문이다. 나는 요즘 아영이에게 붙잡혀 책을 읽고 있다. 이번 주에도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했고, 그 짬짬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또 그 사이사이 운동을 했고, 수채화를 배우러 가고…. 그렇게 일주일을 바쁘게 보내고 휴일을 맞았건만, 오늘도 쉴 틈을 찾지 못한 채, 독서를 하고 있다. 바로 아영이가 읽으라고 건네준 동화책이다.
 
아영이도 줄리엣처럼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영이는 지금까지 내가 본 어린이 중 가장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다. 그에 걸맞게 그녀의 장래희망은 작가이고, 즐겨하는 놀이는 ‘동화책 만들기’다. 아영이가 내게 책을 빌려준 건 지난주뿐만이 아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주기적으로 읽어보라고 한 권씩 쥐어주고 있다. 지난주에도 난 ‘로티’인가, ‘로타’인가하는 귀여운 꼬마 이야기를 읽었고, 이번 주에는 투명인간이 된 한 소년 이야기를 읽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꼭 이런 어린이가 있다. 자기가 읽은 책이 너무 재미있다며, 함께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 하는 아이들!
 
지금은 중학생인 나래도 그런 아이였다. 당시 5학년이던 그녀는, “선생님, 이 책은 선생님이 꼭 읽어 보셔야 할 만한 정말 재미있는 책이에요” 하며, 동화책 한 권을 쥐어주고 갔다.
 
그 간곡하고 확신에 찬 모습이 하도 귀여워, 나는 그러겠노라고 하며, 책을 받아 들었다. 나래의 말대로 그 책은 꽤 읽을 만했다. 토론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도 몇 가지 눈에 띄어, 그 책을 텍스트로 <고정관념>에 문제 제기하는 공부와 <생명공학>에 관한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래와 그걸 가지고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래 역시 자기가 권한 책을 텍스트로 내가 공부 거리를 만든 걸 무척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리고 요즘은 아영이와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영이가 빌려준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 이번 것에서는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발견했다. 그것을 이용해 초등 1, 2학년 어린이를 위한 독서프로그램을 만들어봐야겠다. 아영이와도 함께 공부해 봐야지. 그녀가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영이가 다음 주에는 또 어떤 책을 빌려 줄지 기대된다. 
(※ 교육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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