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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의 라오스 여행] 일다는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라오스에서 만난 외국인들에 대한 첫인상
 

여행자나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 말고, 라오스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은 라오스어 학원 원장이었다. 한국해외봉사단원들이 라오스어를 배운 이 학원은 정확히 말하면 영어학원이다. 라오스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우리나라 종로와 압구정동을 합쳐놓은 것 같은 라오스의 수도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어민 강사를 보유한 이 학원의 원장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기억되는 백인남자였다. 원장이 수완이 좋았던지 영어를 배우는 라오스 학생이 없는 주간과 토요일에는 일본과 한국 봉사단원들을 가르치는 강좌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단다.
 
키도 크고 유쾌하게 농담도 잘하는 편인 그가 밉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부터 우리 네 분의 아짠들이 그를 어려워한다는 느낌이 들어 개운치 않더니(우리 아짠들은 라오스에 하나밖에 없는 종합대학, 라오스국립대학 라오스어학과 교수님들이었다), 어느 날은 불쑥 강의 중인 아짠을 불러냈다.
 
첫 번엔 우리도 당황하여 그냥 무슨 일인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아예 강의실에 불쑥 들어오더니 아짠에게 뭐라고 안 좋은 소리를 해대는 거다. 이런! 당장 우리는 그에게 항의를 했고, 수업이 끝나고는 대표가 찾아가 좋은 말로 다시 항의를 했다.

‘한국 사람들은 선생님을 매우 존경해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께 무례하게 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당신의 행동은 우리 수업권을 침해한 것이고 아짠들의 인격을 무시한 처사다.’ 그 후론 우리가 보는 데서만은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일면이긴 했으나, 이건 우리에게 저개발국가에 있는 ‘거만한 외국인들(우리 역시 외국인이면서)’이란 편견을 부추겼다. 특히 나에겐 라오스 사람들에게 애달픈 동질감을 느끼게 하면서, 배낭여행자들의 천국, 왕위양(Vangvieng) 카페 거리에서 반라(半裸)로 널브러져 노는 서양젊은이들과 인상이 합쳐지면서 백인이라면 일단 백안시하게 되는 증상까지 만들었다.
 
나를 괴롭히던 유럽적십자 직원 ‘콘 프랑’ 
 

학교를 순회하며 적십자사 활동을 홍보하는 직원. 2007년 무렵엔 유럽적십자사에서도 라오스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수도 위양짠에서 이렇게 외국인에 대한 나름대로 험한 경험을 해선지, 현지적응훈련을 마치고 파견된 시골 싸이냐부리가 외국인도 없고 조용해 싫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외국인을 만났다. 그것도 백인을. 내가 얻은 집에 살던 사람이 바로 ‘콘 프랑(직역하면 프랑스 사람이란 뜻이지만 보통 서양 사람을 뜻한다. 재밌는 건 라오스어와 거의 같은 말을 쓰는, 프랑스 지배를 받지 않은 타이에서도 서양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것을 쓴다)’이었다.
 
물론 직접 만난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들어오기 한참 전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외국인에게 이재(理財,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를 챙길 줄 알게 된 주인아줌마, 아저씨의 증언을 통해 수시로 그가 나타나 마음 가난한 나를 괴롭혔다.
 
‘콘 프랑’은 유럽적십자 직원이었던 것 같다. 2007년으로부터 2, 3년 전 유럽적십자가 싸이냐부리 읍내에 상수도 공사를 시작했다. ‘콘 프랑’은 그 지원사업의 책임자였단다. 그는 하는 일 말고도 사람이 좋았던지, 주인집 첫째 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단다. 또 인심도 후해 월세로 내는 200달러 외에도 한 달에도 몇 번씩 집을 비울 때마다 집안청소를 해주는 주인아줌마에게 20달러씩을 따로 챙겨 주었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는 돼지나 칠면조를 잡아 파티를 준비해 달라며 백 달러를 내놓았단다.
 
2007년 3월 내가 갔을 때도 유럽적십자사는 싸이냐부리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5월엔 우리학교로도 와서 적십자사의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해 홍보하기 위해 행사를 가졌다. 그 무렵에는 서양사람 없이 라오스 직원들이 모든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세이브더칠드런 할머니
 

2008년 읍내에 새로 지은 세이브더칠드런 싸이냐부리 사무소

2007년 4월, 5월에는 본격적으로 파견 지역조사, 주요기관 방문을 할 때였다. 싸이냐부리에 단 하나뿐인 도립병원은 우리 관할 기관이라 할 도교육청 다음으로 유사시(?)를 대비해 가장 중요하게 파악해두어야 하는 곳이었다. 우리 학교 교장, 아짠 완텅의 도움으로 공문을 보내고 교감, 아짠 텅한의 인솔로 병원을 방문했다.

 
도립병원은 당연 싸이냐부리 보건국 관할이어서 바로 옆에 있는 보건국을 먼저 들러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장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행정담당 의사의 안내로 외과, 내과, 집중치료실, 입원병동, 응급실 등을 둘러봤다. 병원의 내용, 그 진료 수준은 모르겠으나 형식, 병원 조직은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일단은 잘 짜여진 것으로 보였다.

특히 라오스에 와서 며칠 되지 않아도 의료지원이 절실하단 생각이 드는 산과와 소아과 병동이 비교적 잘 차려져 있어 그랬다. 싸이냐부리 도립병원엔 크게 쑨매래덱(모자병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있게 한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국제적인 어린이 지원단체) 사무실이 병원 행정동 한 구석에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그곳이 보고 싶었다. 행정의사가 당황스러워 하며 그 사무실의 주인공을 부르러 간 사이, 우리는 한 두 사람이 겨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을 한가롭게 둘러보았다. 좁은 사무실은 실제 업무를 위한 책상과 탁자 하나, 책장을 차고 넘치나 정리가 잘 된 자료, 활동홍보를 위해 벽면 가득한 도표와 사진으로 절대 라오스 사람이 근무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해주었다.

라오스를 돕는, 같은 일을 하는 외국인을, 선배를 만난다는 우리의 설렘과는 달리 사무실 주인은 무척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예순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급한 마음에 영어 잘하는 동료가 서둘러 이것저것을 물었다. 답을 안 해주는 것은 아니나 그 퉁명스러움에 기가 죽어, 이번엔 영어권 사람들과의 대화에 감각이 있는 친구가 천천히 물었지만 반응은 같았다. 그는 우리가 약속 없이 찾아온 것이 일단 못마땅했고 자기와 같은 수준의 전문성이나 직업의식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쩝….
 
그렇게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으나, 그는 갈수록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 그는 벌써 싸이냐부리에서만 10여 년을 넘게 살았단다. 루앙파방(싸이냐부리에서 가장 가까운 라오스 제2의 도시)이나 수도 위양짠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모자병동 설치보다 내실 있는 산부인과 소아과 진료를 위한 프로젝트들을 해냈단다.

저녁마다 강변에서 우리 집 앞을 지나 혁명영웅탑(도청소재지 정도의 마을에는 꼭 설치한다)을 왕복하는 운동을 하고 평생 살 생각인 듯 집도 잘 가꾸지만, 한편 라오스 말을 배우거나 병원 관계자 몇몇 외에는 이웃사람들도 전혀 교류하지 않는단다.

 
이상한 사람이다 싶고, 그렇게 해서 라오스 시골 동네에서 외로워 어떻게 살까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어쩌면 인생의 목표를 확실히 정한 사람이 그를 위해 고지식하게 세운 자기관리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는 지난 나의 싸이냐부리 ‘고향방문’ 때 간이 진료를 해준 우리 의사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세계보건기구(WHO)에 제출된 라오스 (싸이냐부리를 포함한) 북부의 의료관련 보고서가 장기간의 걸친 관찰과 아주 구체적인 자료로 무척 훌륭하다고 평가 받았다고 한다. 난 여러 정황들을 보건데 보고서를 작성한 주인공이 그 할머니일 것이라 주저 없이 지목하고 있다.
 
'진짜' 국제단체활동가로 보였던 케어인터내셔널 활동가
 

“정말 기뻐요. 내 아기가 예방주사를 맞았어요.” 유니세프 유아예방접종 홍보 포스터

길을 잘못 든 (싸이냐부리 도(道)내 코끼리로 유명한 홍싸 군(郡)이 있다) 여행자들을 한 달에 두세 명 보는 것 외에 우리 마을 싸이냐부리에서 외국인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유니세프(UNICEF)의 어린이 예방접종 포스터,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정부의 장학프로그램 포스터 등은 쉽게 볼 수 있다. 유럽, 라오스 적십자, 일본국제협력단(JICA)의 차량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결정적으로 앞에서 말한 할머니처럼 외국인 활동가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국제단체 사무소도 찾았다. 케어(CARE)인터내셔널. 가끔 끼니와 술을 때우는 단골 사거리 식당에서 멀지 않아 두어 번 맘 잡고 그 앞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전 같으면 무작정 들어가고 보았을 텐데 앞서 세이브더칠드런 할머니 경우도 있어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간판을 자세히 보니 이름은 인터내셔널이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운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업무시간이었음에도 들고 나는 사람은 물론 인기척도 없어 그냥 돌아오곤 했다.

나중에 싸이냐부리 군청 공무원인 아짠 미노의 아버지께 그들에 대해 들었다. 그 즈음 케어인터내셔널은 조류독감 예방사업을 하고 있단다. 하지만 외국인은 가끔 올 뿐이고 대부분 라오스 사람들이 일을 한다고. 아버지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군청 근무를 마치고 한 시간 정도 마을마다 하는 방문교육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일당은 3달러(하루 종일하는 모내기 일당이 3달러인데 비하면 아주 후한 거다. 물론 늘 프로젝트가 있는 것이 아니니 안정성은 없다).
 
그러나 또 나중에 정말 케어인터내셔널 활동가를 알게 되었다. 싸이냐부리 비행장에서 우리보다 라오스 말을 잘하는 서양인을 처음 본 것! 서로 신기해하며 인사를 나누었고 그래서 그가 케어 활동가라는 것을 알았다.
 
그도 라오스에서만 거의 7, 8년을 있었단다. 싸이냐부리 위쪽 우돔싸이라는 동네에서 지금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기를 가져 그 검진을 위해 위양짠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그는 집도 싸이냐부리 읍내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 건 아기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활동 반경이 넓어서였던 것 같다. 그도 역시 싸이냐부리를 한 거점으로 라오스 서북부를 돌아다니며 소수민족 산골마을의 소득증대 사업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인으로 케어인터내셔널에 지원해 케어 오스트레일리아 소속으로 버마, 캄보디아에서도 활동을 했다. 정말 다국적이다. 내가 한국출신이라고 해선지 북한에도 케어가 있는데 (현재 활동을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그곳에서도 활동해 보고 싶단다. 그는 추석 때 부인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놀러오기도 하고 우리를 초대하기도 해 자주 만나고 친해졌다.
 
그는 라오스 사람들도 모르는 라오스의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라오스 오지의 현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또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라오스어는 물론 소수민족의 언어도 손목, 손등에 (손바닥에 쓰면 땀이나 물에 지워지기 쉽다고) 그 소리를 써가며 익혔단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와는 영어로, 가끔 프랑스어로, 나와는 라오스어로 농담부터 깊은 이야기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그는 진짜 국제단체 활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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