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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의 라오스 여행] 일다는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아열대의 땅, 그리고 매컹
라오스는 제주도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태양에 보다 가까운 나라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라오스의 기후를 열대우림이라 기술하고 있지만,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아열대가 맞다.
라오스는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버마(미얀마)로 둘러싸여 바다가 없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어머니 강, 매컹(보통 메콩 강이라고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라오스 말 그대로 어머니 강, 매컹으로 하겠다)을 가장 많이, 1/3이나 차지하고 있는 행복한 땅이다.
라오스 최대의 수출품인 전기도 매컹이 있기에 가능한 수력발전으로부터 나온다. 매컹은 라오스의 북서부, 버마(미얀마)와 타이의 마약 재배로 유명한 골든 트라이앵글로부터 시작해 내가 살았던 싸이냐부리 지역과 남서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내내 라오스와 타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이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꼭 같다.
나라 생김새도 남북으로 길다. 크기도 한반도보다 조금 큰 정도로 비슷하고, 옛날엔 중국, 베트남과 교류할 수 없게 했던, 북동쪽이 아주 높은 산지인 것도 같다. 국립박물관에서 본 라오스 광물분포도 역시 종류는 거의 없는 게 없이 다양하지만, 정작 석유도 없고 경제성도 없는(라오스는 발굴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실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와 비슷했다.
콩고가 아닌 라오스로 가게 된 나를 위로해 국내훈련소장이 라오스를 일러 한 말이 있다.
“70년대 우리 시골 같은 그런 느낌이래요.”
정말 그랬다. 특히나 이국적인 야자수를 뺀다면 논과 밭이 많은 라오스의 시골 풍경은 영락없이 같았다.
코끼리의 영광과 슬픈 전쟁의 역사
라오스는 과거에 란쌍왕국, 즉 ‘백만 코끼리의 제국’으로 불리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어디나 그렇듯이 인접한 국가들과 교류가 많았다. 특히 타이와는 얽히고설킨 역사만큼이나 문화, 종교, 민족, 언어 등 모든 면에서 연관이 깊다. 지난번 자전거발전기 지원 문제로 주한라오스학생회 회장단을 만났을 때 라오스 무역부 공무원인 다는 말했다.
“타이 인구의 3,40 퍼센트 정도가 라오족이에요.”
전체 인구로 타이가 6천500만, 라오스가 650만이니, 단순하게만 따져도 타이에 라오족이 오히려 더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라오족이 아니더라도 타이어와 라오스어는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다. 정식 명칭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간단하게는 197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수립되었다라고 기술된다.
그러나 나는 보다 길게, 지금의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의 오랜 독립투쟁과 이후 베트남전쟁기간 동안 미국이 벌인 일방적인 비밀전쟁(호치민루트를 차단할 목적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이 라오스의 영토를 폭격한 것으로 시작된 전쟁. 지금까지도 미국은 이를 부정하고 있어 비밀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의 폐허 위에 가까스로 수립한 독립국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가 지금의 라오스에 얼마나 큰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 말이다.
베트남에 비해 훨씬 덜한 것 같으나, 식민제국으로서 프랑스가 라오스에 미친 영향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단적으로 1990년대 후반까지도 라오스는 제2외국어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한국전쟁기간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의 몇 배에 이르는 양이 비밀전쟁기간 하루마다 라오스 동부에 쏟아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된 씨엥쿠왕(라오스의 북동부 지역) 풍경이 아니더라도, 풀 한 포기 없이 초토화되었을 참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쟁지역이 아님에도 인구 구성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북서부 싸이냐부리 지역 교사들을 보면, 특히 내가 파견된 믿따팝(우정) 중학교를 보면, 내 또래인 30대 중반이 아예 빈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피해가 누적된 전쟁의 말미는 아기를 낳을 수조차 없을 만큼 라오스 전체가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현지훈련 동안 우리에게 라오스어를 가르쳐주신 국립대학 교수님 중 한 분이 북동부 출신이었다. 쉰을 바라보는 교수님은 눈앞에서 어머니를 앗아간 미국의 폭격 참상을 이야기하며 여덟 살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라오스에서 보는 사회주의, 그리고 공동체
2년 동안 라오스에 살면서 다행히 병원 신세를 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병원은 자주 가봤다. 함께 파견된 동료나 선생님들, 이웃들이 아파서, 또는 단순히 현지 주요기관 조사를 위해서.
지난 ‘착한 여행’에서 또 한번 라오스의 병원을 경험했다. 여행에 참여한 한 어린이가 하노이 공항에서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마침 탑승시간이 된 라오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루앙파방 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치를 받고 약도 받고 돈도 지불했다. 총 23만낍. 낍은 라오스 통화단위로 23만낍은 우리 돈 3천원 정도 된다. 여기엔 5일치 복용해야 할 두 종류의 항생제와 처치할 때 의사가 사용한 장갑, 반창고, 소독약, 심지어 핀셋 값까지 포함되어있었지만, 정작 의사와 간호사의 인건비라 할 진료비나 이윤 뽑기 가장 좋은 특진비 나부랭이는 없었다.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상의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스의 ‘무상의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년 믿따팝 중학교에 파견되어 있으면서 큰 수술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오토바이 사고로 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져 싸이냐부리 도립병원에서 1차 치료를 하고, 다시 수도 위양짠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했던 경우. 또 한 번은 결혼 후 아기가 없고 생리통이 극심해 처음부터 위양짠의 모자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양쪽 나팔관과 난소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경우. 두 분 모두 우리 학교 선생님이었다.
수술 후 남편들이 몇 장의 서류를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재직증명서 같은 것을 떼 갔다. 교장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저 서류들을 어디에 쓰는지. 병원비를 환급 받기 위해서란다. 환자가 소속된, 또는 환자 직계가족이 소속된 기관에서 경우에 따라 병원비의 50퍼센트 정도를 보조한단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인민 대부분이 당원이자 공무원인 라오스 사람들. 몇 장의 서류가 말해 주듯이 보통 환자들이 소속된 단체나 기관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의료비를 보조 받을 수도, 오히려 초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또 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수술이 있을 때마다 따로 돈을 모아주었다. 환자가 소속된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받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여성연합(여성당원들만 가입하는 조직)에 소속된 여자선생님들은 또 그쪽으로도 돈을 모았다. 가족과 진배없는 친척들과 이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지인의 결혼이나 장례에 돈을 보태는 것과 같이 라오스 사람들은 큰일을 치르는데 서로에게 하는 부조는 너무나 당연한 의례였다. 서류가 있어야 가능한 사회주의적 지원보다 지극히 유연하고 요긴한 나눔이었다.
라오스에서는 자연스레 닮아갔다. 선생님들이 돈을 모을 때마다 나와 동료들도 100달러씩을 모아 냈다. 이번 착한 여행에 덤으로 주어진 ‘고향방문’ 때, 마침 아짠 팓따니(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던 선생님)가 정강이에 넣었던 철심을 빼는 마지막 수술을 받았다. 넷이 아닌 혼자로 조금 벅찼지만, 이번에도 나는 당연히 부조를 했다.
거친 실밥자국을 만져보며 염려하는 내 손을 팓따니가 오히려 언니처럼 쥐고 안심시켰다. 고맙다. 가족, 공동체라는 말의 뜻을 이보다 선명하게 나에게 가르쳐 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www.ildaro.com [이어진 기사] 내 마음의 고향, 라오스와의 인연
아열대의 땅, 그리고 매컹
믿따팝 중학교 학생 쏨분이 그려준 라오스 지도. 라오스의 상징 코끼리와 국화(國花) 덕짬빠(황란)을 예쁘게 그려 넣었다.
라오스는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버마(미얀마)로 둘러싸여 바다가 없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어머니 강, 매컹(보통 메콩 강이라고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라오스 말 그대로 어머니 강, 매컹으로 하겠다)을 가장 많이, 1/3이나 차지하고 있는 행복한 땅이다.
라오스 최대의 수출품인 전기도 매컹이 있기에 가능한 수력발전으로부터 나온다. 매컹은 라오스의 북서부, 버마(미얀마)와 타이의 마약 재배로 유명한 골든 트라이앵글로부터 시작해 내가 살았던 싸이냐부리 지역과 남서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내내 라오스와 타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이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꼭 같다.
나라 생김새도 남북으로 길다. 크기도 한반도보다 조금 큰 정도로 비슷하고, 옛날엔 중국, 베트남과 교류할 수 없게 했던, 북동쪽이 아주 높은 산지인 것도 같다. 국립박물관에서 본 라오스 광물분포도 역시 종류는 거의 없는 게 없이 다양하지만, 정작 석유도 없고 경제성도 없는(라오스는 발굴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실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와 비슷했다.
콩고가 아닌 라오스로 가게 된 나를 위로해 국내훈련소장이 라오스를 일러 한 말이 있다.
“70년대 우리 시골 같은 그런 느낌이래요.”
정말 그랬다. 특히나 이국적인 야자수를 뺀다면 논과 밭이 많은 라오스의 시골 풍경은 영락없이 같았다.
코끼리의 영광과 슬픈 전쟁의 역사
라오스는 공식적으로 47개의 민족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사진은 그중 가장 지배적인 라오룸 무리의 전통 차림새
“타이 인구의 3,40 퍼센트 정도가 라오족이에요.”
전체 인구로 타이가 6천500만, 라오스가 650만이니, 단순하게만 따져도 타이에 라오족이 오히려 더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라오족이 아니더라도 타이어와 라오스어는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다. 정식 명칭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간단하게는 197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수립되었다라고 기술된다.
그러나 나는 보다 길게, 지금의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의 오랜 독립투쟁과 이후 베트남전쟁기간 동안 미국이 벌인 일방적인 비밀전쟁(호치민루트를 차단할 목적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이 라오스의 영토를 폭격한 것으로 시작된 전쟁. 지금까지도 미국은 이를 부정하고 있어 비밀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의 폐허 위에 가까스로 수립한 독립국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가 지금의 라오스에 얼마나 큰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 말이다.
베트남에 비해 훨씬 덜한 것 같으나, 식민제국으로서 프랑스가 라오스에 미친 영향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단적으로 1990년대 후반까지도 라오스는 제2외국어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한국전쟁기간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의 몇 배에 이르는 양이 비밀전쟁기간 하루마다 라오스 동부에 쏟아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된 씨엥쿠왕(라오스의 북동부 지역) 풍경이 아니더라도, 풀 한 포기 없이 초토화되었을 참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쟁지역이 아님에도 인구 구성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북서부 싸이냐부리 지역 교사들을 보면, 특히 내가 파견된 믿따팝(우정) 중학교를 보면, 내 또래인 30대 중반이 아예 빈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피해가 누적된 전쟁의 말미는 아기를 낳을 수조차 없을 만큼 라오스 전체가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현지훈련 동안 우리에게 라오스어를 가르쳐주신 국립대학 교수님 중 한 분이 북동부 출신이었다. 쉰을 바라보는 교수님은 눈앞에서 어머니를 앗아간 미국의 폭격 참상을 이야기하며 여덟 살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라오스에서 보는 사회주의, 그리고 공동체
2년 동안 라오스에 살면서 다행히 병원 신세를 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병원은 자주 가봤다. 함께 파견된 동료나 선생님들, 이웃들이 아파서, 또는 단순히 현지 주요기관 조사를 위해서.
라오스 수도 위양짠에서 가장 큰 병원. 막대기에 단 링거가 열악한 의료여건을 보여준다.
처치를 받고 약도 받고 돈도 지불했다. 총 23만낍. 낍은 라오스 통화단위로 23만낍은 우리 돈 3천원 정도 된다. 여기엔 5일치 복용해야 할 두 종류의 항생제와 처치할 때 의사가 사용한 장갑, 반창고, 소독약, 심지어 핀셋 값까지 포함되어있었지만, 정작 의사와 간호사의 인건비라 할 진료비나 이윤 뽑기 가장 좋은 특진비 나부랭이는 없었다.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상의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스의 ‘무상의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년 믿따팝 중학교에 파견되어 있으면서 큰 수술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오토바이 사고로 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져 싸이냐부리 도립병원에서 1차 치료를 하고, 다시 수도 위양짠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했던 경우. 또 한 번은 결혼 후 아기가 없고 생리통이 극심해 처음부터 위양짠의 모자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양쪽 나팔관과 난소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경우. 두 분 모두 우리 학교 선생님이었다.
수술 후 남편들이 몇 장의 서류를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재직증명서 같은 것을 떼 갔다. 교장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저 서류들을 어디에 쓰는지. 병원비를 환급 받기 위해서란다. 환자가 소속된, 또는 환자 직계가족이 소속된 기관에서 경우에 따라 병원비의 50퍼센트 정도를 보조한단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인민 대부분이 당원이자 공무원인 라오스 사람들. 몇 장의 서류가 말해 주듯이 보통 환자들이 소속된 단체나 기관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의료비를 보조 받을 수도, 오히려 초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는 국민 대부분이 당원이고, 또한 대부분이 군대 조직으로 편제되어있다.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사진은 올해 1월 17일 ‘라오스 군의 날’ 행진 모습
또 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수술이 있을 때마다 따로 돈을 모아주었다. 환자가 소속된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받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여성연합(여성당원들만 가입하는 조직)에 소속된 여자선생님들은 또 그쪽으로도 돈을 모았다. 가족과 진배없는 친척들과 이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지인의 결혼이나 장례에 돈을 보태는 것과 같이 라오스 사람들은 큰일을 치르는데 서로에게 하는 부조는 너무나 당연한 의례였다. 서류가 있어야 가능한 사회주의적 지원보다 지극히 유연하고 요긴한 나눔이었다.
라오스에서는 자연스레 닮아갔다. 선생님들이 돈을 모을 때마다 나와 동료들도 100달러씩을 모아 냈다. 이번 착한 여행에 덤으로 주어진 ‘고향방문’ 때, 마침 아짠 팓따니(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던 선생님)가 정강이에 넣었던 철심을 빼는 마지막 수술을 받았다. 넷이 아닌 혼자로 조금 벅찼지만, 이번에도 나는 당연히 부조를 했다.
거친 실밥자국을 만져보며 염려하는 내 손을 팓따니가 오히려 언니처럼 쥐고 안심시켰다. 고맙다. 가족, 공동체라는 말의 뜻을 이보다 선명하게 나에게 가르쳐 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www.ildaro.com [이어진 기사] 내 마음의 고향, 라오스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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