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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에 도착했다. 전화 통화를 끝낸 몇 분 후, 저만치서 하얀 모시옷을 입은 이유순 선배가 지축을 울리는 듯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밥 먹으러 가자! 멋진 총각이 하는 식당이 있는데 너 소개시켜주마!”
덥석 내 손을 잡아 끌더니 훠이훠이 앞장서 걷는다. 마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거인의 발걸음처럼. 팔월 더위에 무작정 잡혀진 내 손은 종종걸음으로 이끌려간다.
그렇게 온몸으로 다가와 말을 걸고, 금새 마음자리 한 켠에 턱 하니 자리 잡는 유순선배의 인상은 순간, 안도 미키에의 동화에 나오는 머리를 부딪힌 곰을 떠올리게 한다.
곰벌에게도, 거북이에게도, 송충이에게도 다정하고 친절한 그 곰처럼, 만나게 되는 모든 인연에게 막걸리 잔 철철 넘치듯 자기를 퍼주는 사람. 자기 안의 정을 주체할 수 없어 퍼줘야만 사는 사람. 바로 올해 환갑을 넘기는 유순선배다. 올해 환갑을 넘기는 이유순 선배는 정을 퍼주는 사람이다 40세 되던 해 '서귀포문학' 창간호에 시인 등단을 했다 유순선배는 제주 '올레마마'로 통한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냄새, 그리고 엄마
“학교 졸업하고 2년 동안 열심히 돈 벌었지.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엄마가 한 2년만 돈 벌어주고 (시집)가라고 했어… 엄마가 식료품 가게를 냈거든. 80kg짜리 쌀 두 가마를 배달하기도 하고… 내가 힘도 좋았지.”
엄마에게는 그야말로 아들 같은, 남편 같은 든든한 자식이었다.
“남자 같은 외모에 사람들이 쑤군대는 게 싫었던 것 같어… 미스 때, 23살에 아기를 낳았어. 그 아기가 50일 만에 폐렴으로 죽었지. 힘들고 괴로워하던 그 때에 담배도 못 피우는 엄마가 60원짜리 신탄진 담배 한 갑을 사서 주더라. 엄마가 담배를 가르쳐 준 셈이지.”
아이를 낳아봐서 엄마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선배. 삼매봉 언덕바위 어딘가에 묻혔다는 그 아기가 지금 살아있으면 37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였을까. 한때는 돈을 벌면 ‘미혼모의 집’을 짓겠다는 생각도 했노라 했다.
“29살 때 엄마가 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가난한 친정이 싫어서 오빠에게 재산 물려주고, 엄마 유품으로 이불호청 5장만 갖고 나왔지.”
담배를 사주고, 29살 때까지 생리대를 빨아주던 엄마를 추억하면서 “(엄마가) 사랑하는 것만큼 밉다”는 애증과 “얼마나 구만리 떠나버렸는지 꿈에도 안 보인다”는 그리움이 버무려진 범벅을 넘기는 선배의 목소리가 쿨럭인다.
고된 인생이 고운 시(詩)로 다시 태어나다
가난이, 식은 수제비가 냄비에 눌러 붙은 것 같았던 그 뜨거운 시대는 고운 시로 다시 태어나며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유순선배는 지금도 자기 주머니를 풀어놔야 할 나이라고 말한다. “산속의 나뭇잎이 지폐였으면… 바닷가 조약돌이 동전이었으면 좋겠다” 했다. 퍼주면서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퍼주는 즐거움을 아는 선배여서, 돈이 지천으로 널린 곳을 발견했다면 역시나 마을방송 하듯이 소문 내고 퍼줬으리라.
가난을 구제해주는 마더 테레사의 삶이 고귀해서 1천4백 권이나 되는 책을 구입해 기증하고, 모교에 발전기금을 내놓고, 양로원에 기부하고, 시신 기증에 사인까지 해둔 선배에게 이 생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착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퍼줄 상대가 있어 고마워요~”
이야기보따리 풀어내며 여행자의 정을 엮는 '올레마마'
“명숙이가 참 대견하지. 경제적으로는 아니어도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제주 올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이 묵어가는 게스트하우스 ‘민중각’은 동네의 다른 가게들처럼 유순선배의 나와바리(영역)다. 이전에 유순선배를 두 번째 만나던 그날도 영문 없이 이끌려갔는데, 모텔의 카운터안쪽 방이었다. 밥상이 차려지고, 막걸리가 나오더니 주인과 손님 구분할 틈 없이, 남녀 가릴 것 없이 한두 명 서너 명씩 밥상으로 모여든다.
뭍에서 섬으로 걸어온 사람들 사이에는 여행자의 설레임이 있고, 이야기보따릴 풀어내며 사람들의 정을 엮는 선배가 있다.
“올레길을 걸으러 온 23살 청년이 묻더라. 행복이 무엇이냐! 고. 하하하, 내가 행복이 이거(막걸리)다! 했지. 보이지 않는 행복을 왜 좇아~”
“내가 요새 올레길 걸었던 33살 전북 남원아가씨랑 펜팔을 시작했잖아~ 일상을 쓰고 싶은 대로 써서… 손으로 쓰는 글이 좋아… 우표딱지 붙이고.”
시 쓰는 즐거움이, 사람 만나고 엮는 즐거움이, 자기를 퍼주는 즐거움이 큰 시인이 즉석에서 막힘 없이 나오는 시 한편 옮겨 적는다.
편지
유도화 꽃망울은/ 새마을스러운 아지매 얼굴
풀비린내 물씬 / 붉은 잠자리 날개 끝에 퍼득이고
처서날 냇가에 입이 시리도록 / 물장구치던 아이는
물팡(바위)에 내 팔베개 배고 / 흐르는 물속에 끝없는 밀어로 편지를 쓴다
강아지풀 보송보송한 붓펜으로
“내가 50세부터 국민연금을 부었는데 그게 유일한 저축이야. 얼마 없으면 첫 국민연금 나온다. 그때 술 사마!” 아~ 퍼줘야 사는 여자!
어느 책에선가 박완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사람 나이를 옛날 사람과 똑같이 쳐서는 안 된다. 살아온 햇수에 0.7을 곱하는 게 제 나이다.” 올해 61세 되는 선배 나이에 0,7를 곱하면 42세. 아직도 유순선배는 생생하고, 쌩쌩하다. 박진창아/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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