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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 
 
부고를 받았다. 물놀이 사고로 50일 동안 뇌사에 가까운 상태로 있던 청소년이 결국 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듯 그를 아끼던 사람들도 그런 갑작스런 죽음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나갔던 20여 년 전 그날의 일을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도, 사고사의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죽은 자가 ‘사고로 죽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오기도 하고, 또 그 동안 죽은 자와 맺어온 친밀한 관계의 단절에서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다. 다른 죽음도 마찬가지겠지만, 불의의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아픔에서 헤어나오려면 충분한 시간이 흘러가야만 한다.
 
그런데 ‘기억’이 죽어가는 자뿐만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자에게도 시간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죽음 직전은 평화의 순간
 

추천서- 다우베 드라이스마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2005)

우리가 어둠 속의 공포가 아니라 빛 속의 평화를 경험하면서 죽게 된다면 어떨까?
 
죽음 직전에 되살아난 사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경험담에 귀 기울여 보면, 의식을 잃기 전 그 짧은 순간에 일생의 온갖 기억들이 한꺼번에 펼쳐지고, 정신도 맑아지고 마음도 차분해지며, 아무런 걱정근심 없는 평화를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기쁘고 즐겁기까지 하다니!
 
물에 빠지거나 높은 곳에서 추락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을 뻔한 사람, 심장마비나 수술 중 죽었다 깨어난 사람, 총에 맞아 목숨이 위태했던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이 많단다. 또 자살을 시도했을 때보다는 갑작스런 사고(특히 물에 빠지는 사고)에서 살아난 경우, 또 나이가 젊을수록(특히 스무 살 이하일 때) 평화로운 상태, 즉 “두려움도 없고 후회도 없고 혼란도 없고 고통도 없는 상태”를 체험한다고 한다.
 
의식을 되찾거나 의식을 잃기 직전 이런 놀라운 경험이 가능하고, 죽더라도 기분 좋은 환상이 곁을 지켜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다음의 설명들이 설득력을 더해준다.
 
우선, 우리 의식이 감당하기 힘든 위험하고 끔찍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무의식이 그로부터 주의를 돌릴 수 있도록 방어장치를 가동시킨다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이 흥미롭다. 또 생물학에서는 죽음 직전의 고통 없는 편안함을 생물학적 기능으로 설명한다. 쏟아지는 기억들이 두려움이라는 정상반응을 막아 몸이 굳어지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의식을 상실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신경의학에서도,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어 뇌가 활성화되면서 생각과 기억의 속도가 빨라지다가, 목숨이 위협적인 상황에 이르면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통증을 완화시키고 감각을 둔화시키며 차분한 기분을 갖게 하면서 의식상실에 이르도록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덕분에 안도한다. 사고사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은 이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가 아니라 고요와 평화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면, 죽은 자에게도 그렇겠지만 살아 있는 내게도 큰 힘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멋진 체험을 하고 죽는 것 같진 않다는 말이 김을 빼긴 하지만, 그래도 무조건 믿어 버리고 싶다.
 
기억과 꿈으로 죽은 이를 품고

죽은 자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이야기로 안도한다고 해도, 그 죽음에서 홀가분해지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그와 맺어온 관계가 갑자기 끝나버린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상적 삶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상실감과 아쉬움, 함께 살아오면서 부족했던 나의 처신에 대한 후회와 회한, 현재의 삶 속에서는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서글픔과 그리움 등은 분명 살아 있는 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장례식이란 의식을 거치면서, 죽은 이를 삶 속에서 떠나 보내고, 살아 있는 이는 삶으로 되돌아와 계속 살아가긴 하겠지만, 한동안 산 자는 이별의 고통을 삭혀내야 한다. 바로 그때, 의식의 기억과 무의식의 꿈이 죽은 자를 붙잡아 준다. 죽은 자를 기억함으로써 삶 속에서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내 경우도, 소중한 사람을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들을 내 기억 속에 품었다. 의식적으로 그들을 떠올리기 힘든 처음에는 그들을 꿈에서나마 자주 만나는 것이 좋았다. 떠나 보낼 준비가 덜 되어 있을수록, 다시 말해서 후회, 죄책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시달릴수록 꿈을 빌어 그들을 더 오래도록 잡아 두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가고 꿈에서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면서 그들을 회상해 낼 여유도 생겨났다. 기억이란 것이 신기하게도,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은 쌓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꿈에서도 잘 보이지 않고, 그에 대한 기억도 뜸해지는 때가 온다. 그리고 가끔 어쩌다, 죽은 이를 추억할 때면 행복하기까지 한 순간이 온다. 정말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온다. 그때가 오면, 그 죽음으로 인한 상처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마음에 작은 물결을 일게 하는, 앓았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난 누군가와 죽음으로 이별해야 했을 때, 그렇게 그들을 떠나 보내면서도, 또 그렇게 그들과 함께 머무를 수 있었다. 그들을 내내 기억 속에 살려놓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삶은 죽은 이들과의 행복한 공생으로 비탄스럽기 보다 오히려 풍성해진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우리 곁을 떠난 그 아이도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일 듯하다. “걱정 말아요. 두렵지 않았어요. 환한 빛 속에서 얼마나 평화로운 순간이었는지! 좋은 기억들을 안고 갑니다. 그러니 우리, 행복한 기억으로 만나요.” 이경신/ 일다 www.ildaro.com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자립적 삶을 위한 ‘필요노동’, 집안일  |  내게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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