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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를 읽고,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 3인좌담
교사들이 직접 쓴 학교폭력에 대한 생생한 현장보고서가 이야기책으로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학생생활연구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교사들이 8여 년간의 연구와 논의를 통해, 직간접으로 겪은 학교폭력 사례들을 재구성한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김경욱 등저, 양철북)를 펴냈다.
저자들은 학교폭력의 대안이나 평화유지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 실제로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상세히 드러내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교사들의 솔직한 심정과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폭력에 대해 열린 토론이 가능한 논쟁적 텍스트인 것이다.
학교폭력은 학생뿐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피해갈 수 없는 배움터와 일터의 현실문제다.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 선생님들이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를 읽고 좌담을 가졌다. 다음은 우완(고등학교), 우돌(고등학교), 미정(중학교) 세 교사가 나눈 학교폭력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학생들의 ‘쎈 척’을 분석해낸 점 흥미로워
우돌: “이 책 재미있었다. 특히 재미있었던 점은 아이들의 세계를, 상상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서 그려냈다는 거다. 굉장히 밀착된 시선으로, 아주 미시적인 부분까지. 아이들의 세계를 잘 나타냈다고 일컬어지는 청소년 소설들은 많지만-이를테면 ‘완득이’류-모두 일종의 어른들의 판타지가 개입되어 있다. 어른이 보고 싶어하는 청소년의 모습인 거다. 또 어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결말이고.
그런데 이 책은 아이들의 세계를 실제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해 분석해내고 있어서, 내가 가르치는 애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보고 싶어질 정도다. <김경태의 생존수칙>편에 보면 학급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칙’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 토론해보면 재미있지 않겠나?”
우완: “어, 정말 그렇겠다. 학생들에게 한번 들이밀고 얘기해보는 게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김경태의 생존수칙>편과 <그래도 연극은 계속된다> 두 편에 걸쳐 ‘쎈 척’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학생들 사이의 ‘쎈 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주의 깊게 보았다.
이번 학기 초에 1학년 수업에서 자기를 모두 발표하도록 했는데, 학생들은 싫어하는 것에 대해 공통적으로 ‘쎈 척’을 꼽곤 했다. 신입생으로 들어와 친구관계를 새로 맺어가는 시점에 언급되는 것인 만큼 뭔가 중요한 것 같았는데, 그때 난 그 ‘쎈 척’이 뭔지 잘 이해가 안되었다. 학생들에게 물어보고는 단지 ‘잘난척한다’, ‘포장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그게 ‘반항하는 행동’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그 ‘쎈 척’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새로웠다. 학생들마저 ‘싫다’고 하듯, 학교사회에선 소위 ‘반항하는 학생들’에 대해 단지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애들’이라거나, ‘규칙을 어기는 애들’, 그래서 ‘나쁜 애들’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선 학생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쎈 척’을 분석해낸 점이 매우 신선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우돌: “그런데 이 책은 아무 관점도 없이 애들을 맑은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고 관찰하며 쓴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관점’이 분명히 있다. 그 관점에 대해 토론해 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학교 안의 불의를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쎈 척’에 대해서도 신선하게 분석해 놓기는 했지만, ‘쎈 척’에 대해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거다.
‘지각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표현으로 학급분위기를 정리하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데,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기본적으로 있는 것이다. 소위 ‘쎈 척’이라고 불리는 행동들 중에서도, 용의복장 규율을 어기는 행동과 남을 괴롭히는 행동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똑같은 ‘쎈 척’=일탈로 보고 있다.
<그래도 연극은 계속된다>편의 마지막에 학생이 ‘왜 나는 쎈 척하면 안되느냐’고 묻는 질문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책에서 분석해 놓았듯 학생들의 ‘쎈 척’은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는 투쟁의 일환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근절되어야 할 것인가? 하나의 개성이고 생존전략이고 자신들만의 표현방식일 수 있다. 사실 어른들의 사회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완: “그럼 ‘쎈 척’에 대해서 단지 일탈행동으로 치부하지 않고 생존전략으로서 분석해낼 수 있었던 것과, ‘쎈 척’ 행동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 점이 어떻게 저자들의 가치관으로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우돌: “사실 세밀하게 보자면, 이 책 한 권 안에 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교사 자신의 혼란이 드러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들이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 두기가 되지 않는 거다. 교실 안의 상황을 그 안에 들어가서 보느냐, 밖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책에서는 교사가 그 안에 들어가서 학생들 중 어느 편에 속해 있다. 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애들을 무서워하는 느낌이 있고, ‘쎈 척’을 공론화함으로써 학생들이 당황하자 어떤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 애들이 ‘쎈 척이 왜 안돼요?’ 하자, 교사가 무기력해지는 모습이 묘사된다. 그걸 보면 그런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우완: “나도 책을 읽으며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내 안에 있는 감정과 만나는 걸 느꼈다. 사실 신규교사들이 학교 현장으로 들어오며 걱정하는 것들은 모두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항상 ‘요즘 애들이 말은 좀 잘 듣냐’고 안부를 묻는다. 이것도 다 그런 두려움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교사들이 내가 꼭 쥐고 있어야 할 권력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거다. 그런 나 자신이 책 속에 드러난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 있더라. <평화의 신은 없다>에 나타난, 작년에 말썽부린 학생들을 새 학년에 다시 맡게 되었을 때의 절망도 그런 거다.”
우돌: “교권이란 게 대체 뭔가? 그게 요즘 내 고민이다. 세상에서 보통 ‘교권’이라는 말은 학생인권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해지곤 한다.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 교권의 박탈이라고 느끼는 심리가 그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교권의 반대개념이 학생인권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 아닌가? 이 책이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책이 아니란 건 알지만, 구석구석에 보이는 그런 교사의 심리가 드러난 부분들이 당황스러웠다.”
‘개입’해야 할 때와, 해선 안될 때가 있어
우완: “내가 또 이 책의 내용과 내 고민과 만났던 지점은,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고, 학생들의 관계 안으로 파고들려고 했던 담임교사의 태도가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부분이다. <평화의 신은 있다>, <평화의 신은 없다>에 나오는 선생님들이나, <나이팅게일의 일기>의 주인공 선생님은 학생들의 관계에 굉장히 민감하고 개입하려고 한다. 나도 그런 교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나 아이들 간의 문제가 잘 보이고, 또 학생들이 스스로 나한테 이야기하러 많이 오고, 그런데 내가 해결할 방법은 몰라서 괴롭고….
그래서 다른 교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불쌍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런 관계문제에 차라리 무관심하면 학생들이 저희들끼리 해결하는데, 이건 우 선생이 너무 그런 문제에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다.’ 정말 그런 건지? 이 책에 등장하는 선생님들도 학생들 간의 관계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서 관찰하고, 개입하고, 뛰어다니지만, 결국 그래서 더 괴로워 보이기도 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학급을 전통적인 강압적 방식으로 지도하는 교사가 관계의 면을 보지 못해 문제를 키운다면, 나이팅게일 선생님은 지나치게 개입해 화를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았다.”
우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담임교사의 역할이 여러 가지 서류업무와 민원을 처리하는 동사무소 직원 같아지는 게 사실이다. 애들끼리의 관계는 못 본척하거나 은폐하려고 하는 교사들이 점차 많아진다. 아주 큰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는 이상, 못 본척하려는 현상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의 일기>에서의 나이팅게일 선생님처럼 하는 것이 대안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과연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학생들 간의 관계에 담임교사가 개입해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개입’의 문제에 있어서, 이런 것은 구분하려고 한다. 왕따라고 다 같은 왕따가 아니다. 그 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따돌림으로, 그 아이가 감당하고 지고가야 할 문제일 수도 있고, 그 아이가 어떤 학급에 가든 매년 맞이하게 되는 반복된 패턴일 수도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왕따 당하는 아이는 좋은 아이였는데 실은 그 아이를 왕따시키는 애들이 이상한 것이야. 그러니 나는 그 아이를 왕따시키는 아이들의 무리 속으로 돌려보낼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다른 반 친구와 학교생활 즐겁게 잘 하라고 했고, 실제로 그 아이도 그렇게 잘 지냈다. 그 아이만의 약점을 꼬투리 삼아 희생양과 같은 왕따를 만드는 경우에는 담임의 단호한 개입이 필요하지만, 이 경우는 담임의 개입이 필요 없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도 개입해서 가르쳐야 할 점이다. 사실 왕따의 핵심은 권력관계에서 비롯된다. 나는 학생에게 물은 적 있다. ‘너 내 성격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릴 수 있어?’ 학생이 나를 못 때리는 이유는 내가 선생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왕따는 왕따가 될 만해서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친구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때릴 수는 없는 거다. 이런 건 담임으로서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따’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을까?
우완: “<평화의 신은 있다>편에선 학생들이 글쓰기를 통해 서로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들여다보고, 서로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되고 공감하는 경험을 통해 학급의 대 화해를 불러오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같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학생들이 오히려 따돌림 당하는 학생이 얼마나 나쁜 불량학생인지 고발하는 내용만 가득 쓴 적이 있다. 불량학생이니 담임 너도 그 아이를 미워해라 이거다.
그때 학급에서 왕따 문제를 해결하겠답시고 학생들을 데리고 했던 이야기가 ‘모두를 좋아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미워하지는 말자’는 거였는데, 참 공허하더라. 미운 걸 어쩌겠는가? 마음이 그런 걸.
이 책을 보며 그 때 그 미움의 감정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교실 안에서의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보니, 좁은 교실 안에 하루 종일 머무르며 서로 상처 주고 아웅다웅하는 것이 참으로 가련했다. 실은 30~40명씩 모여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게 지내는 상황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스트레스 쌓이는 것도 당연하고, 그러니 그 나쁜 에너지가 서로를 미워하는 데로 가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 교실 안에서 끊임없이 서열을 만들고, 그룹을 만들고, 기 싸움을 하고….”
우돌: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공간을 돌아봐야 할 상황인 거다. 우리가 규율과 도덕이라고 가르친 것이 학생들끼리 서로를 찌르는 무기가 되는 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만들어 놓은 질서, 이 질서가 과연 왕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규격이 오히려 왕따를 만드는 것 아닌가? 과연 윤리교육, 정의교육이 왕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리타분한 프레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 본다. 학생들의 서열 짓기 문화, 생존수칙, ‘쎈 척’ 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미정: “그 서열 짓기 문화라는 게, 과거에는 남학생들만의 문화였지 않나? 남자아이들은 서열 짓고 대장 뽑고 꼬붕 정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조용히 구석에서 놀고. 그런데 과거와 달리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커지고 또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패거리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게 왕따, 따돌림이 아닌가 한다. 싫으면서도 싫지 않은 척, 놀아주던 착한 여학생들도 이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돌: “그럼 따돌림에서 긍정적인 면도 좀 찾아볼 수 있다고 봐야 할까?“
우완: “내가 보기엔 여자애들한테까지 좋지 않은 남성적 패거리문화가 전파된 거다. 여자애들이 더 폭력적이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차마 싫어하는 애들에게 그러지 못했는데.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싫지만 놀아주고. 그런데 요즘은 모욕을 주고, 야리고, 욕하고 하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만만한 대상을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도구로 여긴다.”
미정: “이런 측면도 있다. 힘을 써 본 사람이어야 힘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가족 내에서 폭력적인 아버지권력에 대한 싫은 감정을 인정하고 필요하면 싸워야 되듯이, 학생들이 부정적인 패거리라도 형성하면서 사회 내 권력관계에 대한 감을 익힐 수도 있는 거다. 과거의 여학생들이 전혀 모르던 사회적 망을 형성하는 것.”
우돌: “난 학급공동체의 붕괴가 큰 원인일 것 같다. 학급의 공동체가-사실은 상상의 공동체였지만- 공고했던 시절에는, ‘내’가 배제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학급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학생들이 배제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패거리를 형성한다. 행려병자들이 예전에는 마을공동체 안에서 묻어 살아갔지만 지금은 시설로 가야 하듯, 학급에서 권력관계의 약자들은 얼렁뚱땅 학급공동체에 기대 1년을 보내는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다면 지금은 불가능해진 거다.”
우완: “그렇다면 이전과 같은 학급공동체의 붕괴를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우돌: “나도 ‘정의로운 학급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교사들이 적극 개입하라’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과연 바람직한 방향인지 묻게 된다. ‘억지 공동체’를 애써 만들어 애들의 감정을 변화시키거나 교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룰로써 폭력은 쓸 수 없도록 하는, 공식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에게도 ‘나 상처받았다’가 아니라, ‘나의 권한을 침해 당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 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핵심 아닐까.
피해자를 위한 교사의 시도들도 다 상처를 준다. 교사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학생들이 안다. 난 차라리 제대로 된 ‘쎈 척’을 가르치고 싶다. 학생들이 담임 앞에서 ‘쎈 척’한다는 건, 담임이 권력이라는 걸 파악했다는 거다. 그건 대단한 통찰이다. 난 그런 것을 건강한 표현이라고 본다.”
폭력에 대처하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
우완: “학생의 ‘쎈 척’도 인정하고, 그러면서도 또 개입할 곳에는 개입하고, 그러나 너무 개입하지는 말고…. 너무 어려운 게 담임교사의 역할인 것 같다. 담임의 권력이라는 게 학생들과 대척 지점에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 담임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정: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사이의 길’. 폭력적인 방식에 대해선 배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원칙 정도가 최소한의 역할이지 않을까?”
우돌: “아무리 좋은 담임이라도 담임은 권력이 있고, 학생들이 그 권력을 자각하는 것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부담은 줄더라. 학급 행사하면서 뭐 공동체강화니 뭐니 거창하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게 됐다. 교사가 한 몸 바쳐 모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교육계에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화해하라는 식의 소용없는 개입 말고, 폭력적 행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다면 대체 폭력에 해당하는 행위는 무엇인지 교사와 학생 모두 공동체 안에서 합의하고, 공식적인 룰로 만들어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규칙을 만드는 거다.”
우완: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이 왜 안 되는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한데, 학생들에게는 그 과정 자체가 참 어렵다. 또 학생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명분만 남은 규칙이 될 수도 있다. 학생들간의 관계에는 담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크게 작용하는데, 감수성이 내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허한 규칙을 만들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미정: “나도 규칙 만들기는 우려되는 면이 있다. 성폭력의 문제도 피해자 중심주의, 혹은 세세한 성폭력 관련규범을 만들고 들이댔던 것이, 오히려 성폭력담론을 성숙시키기보다는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것을 지켜본 바 있다. 학교폭력에 있어서도 세세한 룰을 만드는 것보다 그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돌: “그런데 난 약자가 강자의 권한을 넘겨받아 동등해진다는 건 허상이라고 본다. 권력관계 그 자체는 인정해야지, 강자가 약자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해를 도모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강자가 약자에 대해 ‘난 널 이해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폭력이 시작된다.
이 책에서 <평화의 신은 있다> 부분에서의 전략이 통한 이유는 초등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아직 권력관계와 폭력의 방식이 내면화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권력관계의 문제면 권력관계를 직면하도록 하고, 폭력이 무엇인지 공언한 후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나이팅게일의 일기>에 등장하는 선생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사들의 현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계몽의 교사론이지 않나. 교사 개인이 열심히 하면 학급문제가 해결된다고 이야기하는 건 우리한테 유리한 담론은 아니다.”
우완: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제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여학생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미시적인 권력관계를 더 면밀히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런 걸 우리가 관찰하고 책으로 써도 재미있겠다. 혹은 ‘교무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칙’ 따위?”
미정: “난 여교사들이 남자아이들 처음 만날 때,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서열 짓기, 패거리문화 등에 대해 꼭 한 번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고 싶다.”
우돌: “이 책에서처럼 교사가 아이들에 밀착해서 미시적인 관찰을 하는 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허상 속에서 상상의 아이들,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으로 학생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무실 생존수칙은 정말 재미있겠다. 우리가 꼭 해보면 좋겠다.” 정리-우완/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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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 3인좌담
교사들이 직접 쓴 학교폭력에 대한 생생한 현장보고서가 이야기책으로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학생생활연구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교사들이 8여 년간의 연구와 논의를 통해, 직간접으로 겪은 학교폭력 사례들을 재구성한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김경욱 등저, 양철북)를 펴냈다.
‘삐삐 롱스타킹’ 3인의 교사들이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를 읽고 좌담을 가졌다. ©일다-박희정의 캐리커쳐
학교폭력은 학생뿐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피해갈 수 없는 배움터와 일터의 현실문제다.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 선생님들이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를 읽고 좌담을 가졌다. 다음은 우완(고등학교), 우돌(고등학교), 미정(중학교) 세 교사가 나눈 학교폭력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학생들의 ‘쎈 척’을 분석해낸 점 흥미로워
우돌: “이 책 재미있었다. 특히 재미있었던 점은 아이들의 세계를, 상상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서 그려냈다는 거다. 굉장히 밀착된 시선으로, 아주 미시적인 부분까지. 아이들의 세계를 잘 나타냈다고 일컬어지는 청소년 소설들은 많지만-이를테면 ‘완득이’류-모두 일종의 어른들의 판타지가 개입되어 있다. 어른이 보고 싶어하는 청소년의 모습인 거다. 또 어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결말이고.
그런데 이 책은 아이들의 세계를 실제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해 분석해내고 있어서, 내가 가르치는 애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보고 싶어질 정도다. <김경태의 생존수칙>편에 보면 학급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칙’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 토론해보면 재미있지 않겠나?”
우완: “어, 정말 그렇겠다. 학생들에게 한번 들이밀고 얘기해보는 게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김경태의 생존수칙>편과 <그래도 연극은 계속된다> 두 편에 걸쳐 ‘쎈 척’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학생들 사이의 ‘쎈 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주의 깊게 보았다.
이번 학기 초에 1학년 수업에서 자기를 모두 발표하도록 했는데, 학생들은 싫어하는 것에 대해 공통적으로 ‘쎈 척’을 꼽곤 했다. 신입생으로 들어와 친구관계를 새로 맺어가는 시점에 언급되는 것인 만큼 뭔가 중요한 것 같았는데, 그때 난 그 ‘쎈 척’이 뭔지 잘 이해가 안되었다. 학생들에게 물어보고는 단지 ‘잘난척한다’, ‘포장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그게 ‘반항하는 행동’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그 ‘쎈 척’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새로웠다. 학생들마저 ‘싫다’고 하듯, 학교사회에선 소위 ‘반항하는 학생들’에 대해 단지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애들’이라거나, ‘규칙을 어기는 애들’, 그래서 ‘나쁜 애들’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선 학생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쎈 척’을 분석해낸 점이 매우 신선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우돌: “그런데 이 책은 아무 관점도 없이 애들을 맑은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고 관찰하며 쓴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관점’이 분명히 있다. 그 관점에 대해 토론해 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학교 안의 불의를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쎈 척’에 대해서도 신선하게 분석해 놓기는 했지만, ‘쎈 척’에 대해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거다.
‘지각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표현으로 학급분위기를 정리하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데,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기본적으로 있는 것이다. 소위 ‘쎈 척’이라고 불리는 행동들 중에서도, 용의복장 규율을 어기는 행동과 남을 괴롭히는 행동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똑같은 ‘쎈 척’=일탈로 보고 있다.
<그래도 연극은 계속된다>편의 마지막에 학생이 ‘왜 나는 쎈 척하면 안되느냐’고 묻는 질문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책에서 분석해 놓았듯 학생들의 ‘쎈 척’은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는 투쟁의 일환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근절되어야 할 것인가? 하나의 개성이고 생존전략이고 자신들만의 표현방식일 수 있다. 사실 어른들의 사회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완: “그럼 ‘쎈 척’에 대해서 단지 일탈행동으로 치부하지 않고 생존전략으로서 분석해낼 수 있었던 것과, ‘쎈 척’ 행동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 점이 어떻게 저자들의 가치관으로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우돌: “사실 세밀하게 보자면, 이 책 한 권 안에 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교사 자신의 혼란이 드러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들이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 두기가 되지 않는 거다. 교실 안의 상황을 그 안에 들어가서 보느냐, 밖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책에서는 교사가 그 안에 들어가서 학생들 중 어느 편에 속해 있다. 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애들을 무서워하는 느낌이 있고, ‘쎈 척’을 공론화함으로써 학생들이 당황하자 어떤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 애들이 ‘쎈 척이 왜 안돼요?’ 하자, 교사가 무기력해지는 모습이 묘사된다. 그걸 보면 그런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우완: “나도 책을 읽으며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내 안에 있는 감정과 만나는 걸 느꼈다. 사실 신규교사들이 학교 현장으로 들어오며 걱정하는 것들은 모두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항상 ‘요즘 애들이 말은 좀 잘 듣냐’고 안부를 묻는다. 이것도 다 그런 두려움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교사들이 내가 꼭 쥐고 있어야 할 권력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거다. 그런 나 자신이 책 속에 드러난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 있더라. <평화의 신은 없다>에 나타난, 작년에 말썽부린 학생들을 새 학년에 다시 맡게 되었을 때의 절망도 그런 거다.”
우돌: “교권이란 게 대체 뭔가? 그게 요즘 내 고민이다. 세상에서 보통 ‘교권’이라는 말은 학생인권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해지곤 한다.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 교권의 박탈이라고 느끼는 심리가 그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교권의 반대개념이 학생인권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 아닌가? 이 책이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책이 아니란 건 알지만, 구석구석에 보이는 그런 교사의 심리가 드러난 부분들이 당황스러웠다.”
‘개입’해야 할 때와, 해선 안될 때가 있어
우완: “내가 또 이 책의 내용과 내 고민과 만났던 지점은,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고, 학생들의 관계 안으로 파고들려고 했던 담임교사의 태도가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부분이다. <평화의 신은 있다>, <평화의 신은 없다>에 나오는 선생님들이나, <나이팅게일의 일기>의 주인공 선생님은 학생들의 관계에 굉장히 민감하고 개입하려고 한다. 나도 그런 교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나 아이들 간의 문제가 잘 보이고, 또 학생들이 스스로 나한테 이야기하러 많이 오고, 그런데 내가 해결할 방법은 몰라서 괴롭고….
그래서 다른 교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불쌍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런 관계문제에 차라리 무관심하면 학생들이 저희들끼리 해결하는데, 이건 우 선생이 너무 그런 문제에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다.’ 정말 그런 건지? 이 책에 등장하는 선생님들도 학생들 간의 관계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서 관찰하고, 개입하고, 뛰어다니지만, 결국 그래서 더 괴로워 보이기도 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학급을 전통적인 강압적 방식으로 지도하는 교사가 관계의 면을 보지 못해 문제를 키운다면, 나이팅게일 선생님은 지나치게 개입해 화를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았다.”
우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담임교사의 역할이 여러 가지 서류업무와 민원을 처리하는 동사무소 직원 같아지는 게 사실이다. 애들끼리의 관계는 못 본척하거나 은폐하려고 하는 교사들이 점차 많아진다. 아주 큰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는 이상, 못 본척하려는 현상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의 일기>에서의 나이팅게일 선생님처럼 하는 것이 대안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과연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학생들 간의 관계에 담임교사가 개입해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개입’의 문제에 있어서, 이런 것은 구분하려고 한다. 왕따라고 다 같은 왕따가 아니다. 그 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따돌림으로, 그 아이가 감당하고 지고가야 할 문제일 수도 있고, 그 아이가 어떤 학급에 가든 매년 맞이하게 되는 반복된 패턴일 수도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왕따 당하는 아이는 좋은 아이였는데 실은 그 아이를 왕따시키는 애들이 이상한 것이야. 그러니 나는 그 아이를 왕따시키는 아이들의 무리 속으로 돌려보낼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다른 반 친구와 학교생활 즐겁게 잘 하라고 했고, 실제로 그 아이도 그렇게 잘 지냈다. 그 아이만의 약점을 꼬투리 삼아 희생양과 같은 왕따를 만드는 경우에는 담임의 단호한 개입이 필요하지만, 이 경우는 담임의 개입이 필요 없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도 개입해서 가르쳐야 할 점이다. 사실 왕따의 핵심은 권력관계에서 비롯된다. 나는 학생에게 물은 적 있다. ‘너 내 성격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릴 수 있어?’ 학생이 나를 못 때리는 이유는 내가 선생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왕따는 왕따가 될 만해서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친구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때릴 수는 없는 거다. 이런 건 담임으로서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따’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을까?
우완: “<평화의 신은 있다>편에선 학생들이 글쓰기를 통해 서로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들여다보고, 서로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되고 공감하는 경험을 통해 학급의 대 화해를 불러오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같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학생들이 오히려 따돌림 당하는 학생이 얼마나 나쁜 불량학생인지 고발하는 내용만 가득 쓴 적이 있다. 불량학생이니 담임 너도 그 아이를 미워해라 이거다.
그때 학급에서 왕따 문제를 해결하겠답시고 학생들을 데리고 했던 이야기가 ‘모두를 좋아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미워하지는 말자’는 거였는데, 참 공허하더라. 미운 걸 어쩌겠는가? 마음이 그런 걸.
이 책을 보며 그 때 그 미움의 감정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교실 안에서의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보니, 좁은 교실 안에 하루 종일 머무르며 서로 상처 주고 아웅다웅하는 것이 참으로 가련했다. 실은 30~40명씩 모여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게 지내는 상황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스트레스 쌓이는 것도 당연하고, 그러니 그 나쁜 에너지가 서로를 미워하는 데로 가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 교실 안에서 끊임없이 서열을 만들고, 그룹을 만들고, 기 싸움을 하고….”
우돌: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공간을 돌아봐야 할 상황인 거다. 우리가 규율과 도덕이라고 가르친 것이 학생들끼리 서로를 찌르는 무기가 되는 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만들어 놓은 질서, 이 질서가 과연 왕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규격이 오히려 왕따를 만드는 것 아닌가? 과연 윤리교육, 정의교육이 왕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리타분한 프레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 본다. 학생들의 서열 짓기 문화, 생존수칙, ‘쎈 척’ 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미정: “그 서열 짓기 문화라는 게, 과거에는 남학생들만의 문화였지 않나? 남자아이들은 서열 짓고 대장 뽑고 꼬붕 정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조용히 구석에서 놀고. 그런데 과거와 달리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커지고 또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패거리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게 왕따, 따돌림이 아닌가 한다. 싫으면서도 싫지 않은 척, 놀아주던 착한 여학생들도 이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돌: “그럼 따돌림에서 긍정적인 면도 좀 찾아볼 수 있다고 봐야 할까?“
우완: “내가 보기엔 여자애들한테까지 좋지 않은 남성적 패거리문화가 전파된 거다. 여자애들이 더 폭력적이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차마 싫어하는 애들에게 그러지 못했는데.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싫지만 놀아주고. 그런데 요즘은 모욕을 주고, 야리고, 욕하고 하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만만한 대상을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도구로 여긴다.”
미정: “이런 측면도 있다. 힘을 써 본 사람이어야 힘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가족 내에서 폭력적인 아버지권력에 대한 싫은 감정을 인정하고 필요하면 싸워야 되듯이, 학생들이 부정적인 패거리라도 형성하면서 사회 내 권력관계에 대한 감을 익힐 수도 있는 거다. 과거의 여학생들이 전혀 모르던 사회적 망을 형성하는 것.”
우돌: “난 학급공동체의 붕괴가 큰 원인일 것 같다. 학급의 공동체가-사실은 상상의 공동체였지만- 공고했던 시절에는, ‘내’가 배제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학급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학생들이 배제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패거리를 형성한다. 행려병자들이 예전에는 마을공동체 안에서 묻어 살아갔지만 지금은 시설로 가야 하듯, 학급에서 권력관계의 약자들은 얼렁뚱땅 학급공동체에 기대 1년을 보내는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다면 지금은 불가능해진 거다.”
우완: “그렇다면 이전과 같은 학급공동체의 붕괴를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우돌: “나도 ‘정의로운 학급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교사들이 적극 개입하라’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과연 바람직한 방향인지 묻게 된다. ‘억지 공동체’를 애써 만들어 애들의 감정을 변화시키거나 교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룰로써 폭력은 쓸 수 없도록 하는, 공식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에게도 ‘나 상처받았다’가 아니라, ‘나의 권한을 침해 당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 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핵심 아닐까.
피해자를 위한 교사의 시도들도 다 상처를 준다. 교사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학생들이 안다. 난 차라리 제대로 된 ‘쎈 척’을 가르치고 싶다. 학생들이 담임 앞에서 ‘쎈 척’한다는 건, 담임이 권력이라는 걸 파악했다는 거다. 그건 대단한 통찰이다. 난 그런 것을 건강한 표현이라고 본다.”
폭력에 대처하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
우완: “학생의 ‘쎈 척’도 인정하고, 그러면서도 또 개입할 곳에는 개입하고, 그러나 너무 개입하지는 말고…. 너무 어려운 게 담임교사의 역할인 것 같다. 담임의 권력이라는 게 학생들과 대척 지점에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 담임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정: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사이의 길’. 폭력적인 방식에 대해선 배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원칙 정도가 최소한의 역할이지 않을까?”
우돌: “아무리 좋은 담임이라도 담임은 권력이 있고, 학생들이 그 권력을 자각하는 것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부담은 줄더라. 학급 행사하면서 뭐 공동체강화니 뭐니 거창하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게 됐다. 교사가 한 몸 바쳐 모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교육계에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화해하라는 식의 소용없는 개입 말고, 폭력적 행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다면 대체 폭력에 해당하는 행위는 무엇인지 교사와 학생 모두 공동체 안에서 합의하고, 공식적인 룰로 만들어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규칙을 만드는 거다.”
우완: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이 왜 안 되는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한데, 학생들에게는 그 과정 자체가 참 어렵다. 또 학생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명분만 남은 규칙이 될 수도 있다. 학생들간의 관계에는 담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크게 작용하는데, 감수성이 내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허한 규칙을 만들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미정: “나도 규칙 만들기는 우려되는 면이 있다. 성폭력의 문제도 피해자 중심주의, 혹은 세세한 성폭력 관련규범을 만들고 들이댔던 것이, 오히려 성폭력담론을 성숙시키기보다는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것을 지켜본 바 있다. 학교폭력에 있어서도 세세한 룰을 만드는 것보다 그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돌: “그런데 난 약자가 강자의 권한을 넘겨받아 동등해진다는 건 허상이라고 본다. 권력관계 그 자체는 인정해야지, 강자가 약자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해를 도모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강자가 약자에 대해 ‘난 널 이해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폭력이 시작된다.
이 책에서 <평화의 신은 있다> 부분에서의 전략이 통한 이유는 초등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아직 권력관계와 폭력의 방식이 내면화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권력관계의 문제면 권력관계를 직면하도록 하고, 폭력이 무엇인지 공언한 후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나이팅게일의 일기>에 등장하는 선생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사들의 현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계몽의 교사론이지 않나. 교사 개인이 열심히 하면 학급문제가 해결된다고 이야기하는 건 우리한테 유리한 담론은 아니다.”
우완: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제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여학생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미시적인 권력관계를 더 면밀히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런 걸 우리가 관찰하고 책으로 써도 재미있겠다. 혹은 ‘교무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칙’ 따위?”
미정: “난 여교사들이 남자아이들 처음 만날 때,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서열 짓기, 패거리문화 등에 대해 꼭 한 번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고 싶다.”
우돌: “이 책에서처럼 교사가 아이들에 밀착해서 미시적인 관찰을 하는 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허상 속에서 상상의 아이들,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으로 학생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무실 생존수칙은 정말 재미있겠다. 우리가 꼭 해보면 좋겠다.” 정리-우완/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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