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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대해서 말하기 힘든 이유는 항상 진행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지난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했고, 새 학교에 진학했고, 집을 옮겼고, 활동의 거점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막 시작할 참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적응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고, 열어놓고는 아직 닫지 못한 변화의 품목도 많다.

변화는 끝나기 전에는 그게 어떤 모양새가 될 것인지 예상할 수 없기에, 변화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실없어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돌아보자면 1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나를 정의하는 외부적인 이름들이 거의 다 변화했다. 하지만 이 1년이 10년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눈에 보이는 조건들이 변화하는 와중에서도 정작 나를 숨 가쁘게 했던 것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조용하지만 폭발적인 변화였다.

마음의 밑바닥에서 

1년 반 전에 나는 길을 잃고 깜깜한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뭐가 옳고 그른지, 왜 살아야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고 이유도 없이 힘겹고, 어떤 것을 봐도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질 않았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미래가 한없이 불투명해 보여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으니 지방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홀로 외롭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굉장히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도 하고, ‘오복 중에 하나라는 이도 썩어가고 있는데 이대로 방치했다간 노년에 밥도 못 먹고 비참하게 살겠지’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미래가 두렵고, 생각만 해도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져서 삶을 놓아버리고 싶던 시간들이었다.

항상 과거를 보듬지 못하고 툭툭 끊어내며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기억과 함께 모든 기억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항상 과거를 부정하면서,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고, 그 시간들은 정말 끔찍했다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그 속의 나 역시 잘려지고 부정되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나’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나’라는 의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가 비슷한 선상에서 행동하겠구나 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의 나를 파악하는 고차원적인 작용이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나’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에 시달리고 나서야, 나는 결국 항복하고 학교 안에 있는 상담소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그 곳에서의 상담은 치료보다는 자기 성찰에 가까웠다. 처음은 매우 힘들고 더디었다. 무기력하게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하루 동안 뭘 했는지 적어오는 숙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게 부끄러웠다.

나를 혐오하도록 만드는 부정적 생각을 유포하는 나쁜 방송국, 모든 외부 자극에서 마음을 닫도록 만드는 철통, 닫혀 진 기억과 함께 구석에서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마음 속의 어린 아이, 그리고 어른이 된 나. 복잡하게 얽혀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나 자신과 분리해 나갔다. 남들이 봤으면 멍하니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마음을 들여다봤다. 어쨌든 그러지 않았으면 살 수 없었을 테니까.

삶을 진짜로 만들어 주는 것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던 상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질 때였다. 그럴 때는 상담실에 앉아, 아무 느낌도 느끼지 않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도 했다. 1초도 멈추지 않고 마음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얼마나 계속되는 것일까. 이런 상태가 영원히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고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던, 깜깜하고 유사-죽음 같은 시간들이었다.

조금 상태가 나아지고 나서도 그 시기 동안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어 대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겉보기엔 계속 정체되어 있는 것 같고, 실없이 굴고, 한 말을 여러 번 계속하고, 재미도 없는 얘기를 하며 나 혼자만 재미있어 죽고, 예전처럼 민첩하지도 총명해보이지도 않고, 찌질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얘기해줄 진짜 사건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멍청한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이 아닌 마음 속에서만 삶이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다음 단계로, 남들 보기에 그럴 듯한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다. 다시 예전처럼 그럴 듯한 일들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 내가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어 여러 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반 강제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아주 깊은 차원에서부터 변화시켰다. 벌어져서 피가 나는데도 모른 척 했던 묵은 상처들의 일부를 불완전하나마 치료하게 되었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도 배웠다. 삶을 관념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살갗으로 느끼는 연습을 계속했다. 불안이나 초조함, 두려움들이 밀려올 때 그것들이 곧 사라질 거라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는 삶이 꽤 살만해졌다.

항상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안의 어린 아이가 오랫동안 방치해 뒀는데도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아름답고 기쁘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삶의 본질이 즐거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쁨의 원천인 이 아이를 숨도 못 쉬도록 가둬놨으니 그동안 사는 게 그렇게 끔찍했나보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가장 강력하게 부정해 왔던 것, 나는 사랑 받길 원하고 살아가려면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쿨한 것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좀더 진득하고 살가운 관계들이 삶을 진짜로 만들어 준다는 것.

그렇지만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고 여전히 배워야 할 것과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젠 마음을 넘어 삶을 변화시켜야 하니 말이다. 오래 걸리고 힘들었지만, 계속 그 상태로 살아갔을 걸 생각하면 1년이라는 멈춤의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제 즐거운 일을 찾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가고, 따뜻한 관계들을 만들고 유지시켜가는 것과 같은 이번 변화의 마지막 숙제를 할 차례다. 세미 |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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