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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다른 몸’으로 돌봄을 고민하다 _박은영 글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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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끔씩 내가 과연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곤 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돌봄을 받고 자라면서 서서히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존재로 자라난다. 어깨를 주무르고, 수저를 놓고, 가게 심부름을 한다.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나도 가끔 그러긴 했지만, 심부름은 주로 동생들 몫이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돌봄 관계는 일방적이기보다 쌍방적이며, 시소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내가 앉은 시소는 영 둔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돌봄에 참여하고 싶어 기회를 노리곤 했다. 잽싸게 수저통을 잡아 식탁에 수저도 놓아보고 싱크대를 선점해 설거지를 독점해 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일을 쟁취해 내지 않는 한, 노동력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나의 입지는 불안정해 보였고, 돌본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기에 내가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에는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가족 안에서 내가 받는 돌봄과는 다른, 좀 더 평등하고 새로운 형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크면 독립을 하겠다고 종종 떠들고 다녔다. 현실적으로 일상 활동에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실현하기 쉬운 계획은 아니어서 한참동안은 그저 말뿐인 계획이었다. 그러다 실제로 독립을 감행하게 된 건 서른한 살 때였다. 전보다 더 돌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 독립 후, 친구들과 같이 살면서 함께 준비하고 차려 먹은 홈파티  ©박은영

 

나도 돌볼 수 있다는 믿음

 

이십대 후반, 내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 팔, 다리, 허리 등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균형이 맞지 않고 힘이 한쪽에 쏠리며 강직이 있는 몸이다 보니 올 것이 온 셈이었지만, 어쨌든 겁이 좀 나긴 했다.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나 책은 없었다. 다들 아프면 죽거나 낫거나,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동적 존재가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픈 것도, 의존하는 것도 공포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기껏 내놓는 대안은 안락사 정도였다. 이 중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통증은 내 몸의 새로운 특성이 되었다. 일종의 새로운 룸메이트인 셈이었다. 맘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날 죽이러 잠입한 연쇄살인마는 아니었다. 날 꽁꽁 묶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어놓는 강도도 아니었다. 난 그냥 녀석과 함께 내 삶을 살면 되는 거였다.

 

사실은 전혀 생소한 과목의 시험지가 내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수많은 문제 중에 난이도가 제일 높아보이는 것 중 하나가 돌봄에 관한 부분이었다. 나는 아프지 않을 때보다 추가적인 돌봄을 받아야 할 텐데,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돌볼 여력은 더 줄어드는 게 아닐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후자는 아니라고 믿었다. 몸이 아파도 대개 삶은 지속되며, 삶이 지속되는 한 나는 누군가로부터 돌봄 받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결국 해보기로 했다. 내 몸 그대로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돌봄 받고, 또 돌볼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집을 나왔다.

 

공동체 생활, 민폐 끼치는 연습

 

몸의 취약성을 직면했을 때 독립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참에 가족이 아닌 다양한 사람과 상호의존하며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그리고 나 또한 그 누군가를 돌보며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다양한 몸들이 혈연가족을 초월한 돌봄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조건은 나를 오랫동안 머뭇거리게 했다. 쓰레기봉투 묶기, 손발톱 깎기, 상처에 반창고 붙이기, 국이나 물 같은 액체류를 흘리지 않고 옮기기…… 모두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결국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거나 최소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 그래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이 독립을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닐 거라 믿었다.

 

마침 다니는 교회에서 만든 마을공동체가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무턱대고 들어간 마을에서 교회 안의 다른 비혼 여성들과 4년여를 함께 살게 되었다. 집이 필요해서, 혹은 공동체와 살고 싶어서 동거하게 된 룸메이트들은 예민한 부분도, 성격도, 상황도 모두 달랐다. 2030이란 유동적인 나이대였으므로 멤버 변동도 꽤 자주 있었다. 새로운 룸메이트가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긴장했다. 새로운 조합으로도 과연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면서 우리는 교회에서 배운 한 문장을 계속 기억하려 애썼다.

 

“서로 민폐를 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동거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데 가장 결정적인 힘을 준 문장이다. 혼자 스스로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인정하라는 문장, 기꺼이 서로 돌보고 또 돌봄 받으며 살자고 초대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공유하는 관계에서는 나도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 더운 여름 룸메이트가 몸을 식히기 위해 장만한 쿨링 베개. 그해 가을인가. 내가 허리가 아파 똑바로 누워 잘 수 없게 되면서, 내가 이 베개를 접수했다. 이 베개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다시 편히 잘 수 있었다.  ©박은영

 

그런가 하면 장애가 없는 룸메이트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돌보는 역할에 굶주려 있던 나는 할 일이 주어지면 신이 나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 다들 퇴근 후에 등을 바닥에서 떼고 싶지 않아 눈치만 보던 밤, 하루종일 집안에서 일한 내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봉투 묶어줘. 내가 내려갔다 올게.”

 

친구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일어나면, 차마 나를 시킬 수는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나를 제지했을 것이다. 나는 괜히 나섰다는 민망함을 삼키며 하릴없이 주저앉았겠지. 그런 관계에선 편견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딱딱한 ‘에티켓’ 이상을 기대할 수 없고, 나의 필요를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 사람에게는 나의 필요보다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룸메이트들은 나라는 고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 투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이 쌓인 우리의 집에는 장애인과 그 옆에선 언제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돌봄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나를 돌보는 자로 인정하는 것. 우리 사이에 형성된 돌봄의 모습이었다.

 (계속...)

 

 

≪일다≫ 누구나 돌봄이 가능하다고 우기는 법

※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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