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마리 도를래앙 글‧그림 『어떤 약속』
한참 자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고 말해요. “얘들아, 우린 약속이 있잖아?”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요.
그림책 『어떤 약속』(마리 도를래앙 글‧그림, 이경혜 옮김, 재능교육)의 시작 글이다. 상상해 보자. 그다음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 마리 도를래앙 글‧그림 『어떤 약속』 중에서.
|
책장을 넘기면, 두 아이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 장면이 나온다. 한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군말 않고’ 채비를 한다. 그다음 장은 막 집을 나선 가족의 모습이다. 맨 앞에 엄마, 그 뒤에 남자아이, 여자아이, 맨 뒤에 아빠가 일렬로 나아가고 있다.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들리는 여름밤, 네 사람은 차고 시원한 밤 공기에 실려 오는 붓꽃과 인동덩굴 꽃향기를 맡으며 골목을 걷고 또 걷는다. 아직 불이 켜진 두어 집을 지나기도 하지만 “낮 동안 지글지글 끓던” 동네는 깊이 잠들어 있다.
네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속 걷는다. 어느새 ‘마른풀 냄새가 코를 확’ 찌르는 시골길에 들어선다. ‘치르치르 메뚜기의 노래’에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고, 앉은 채 자는 들판의 소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저 멀리서 지나가는 밤기차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점점 더 숲으로 들어간다.
한여름 밤, 숲은 더없이 평화롭다. ‘비에 젖은 이끼 냄새에 나무껍질 냄새가 섞여서’ 난다. ‘와직와직’ 마른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리고 ‘고사리 잎들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숲속에 사는 동물이 혹시 네 사람을 보아도 놀라 달아나지 않을 만큼, 이들은 조심조심 ‘숲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들 앞에 무언가 나타난다. 이들은 놀라서 발을 멈추는데…
여자들의 도보여행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밤새도록 걷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인다. 낮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온통 차고 푸른 공기가 가득한 초여름 밤, 물기 머금은 풀 냄새, 흙 냄새를 맡으며 개구리들이 떼 지어 우는 들길을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합정부터 동대문까지, 도시를 관통하는 큰 길을 가능한 나무가 많은 길을 따라서 새벽 내내 걷고 싶다. 동행이 있다면 성산대교부터 잠실대교까지 한강 길을 따라 걸어도 좋을 텐데.
▲ 그림책 『어떤 약속』 표지 이미지. (마리 도를래앙 글‧그림, 이경혜 옮김, 재능교육) |
내게 이런 감각이 생긴 건, 여자들과 떼 지어 걸었던 어느 날 이후부터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다. 밤낮으로 한 무리 여자들과 떼 지어 시골길을 걸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은 쉬었고, 그 외 시간에는 정말로 내내 걸었던 초여름! 나는 ‘타고난 발바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보름 동안, 아무리 걸어도 물집이 생기지 않는 넓대대 발바닥!
그 시절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떨어지고 지방 분교에 입학한 나는 ‘실패자’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떤 꿈도 목표도 없이 대학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는 내 책상, 내 자리가 있었으나, 대학에는 내 자리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도 없다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막연히 대학에 가면 사회과학 이론 공부와 토론을 활발히 하며 내 안에 있는 어떤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때의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그런 걸 만나거나 만들 수 있는지 몰랐다. 사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동네 책 대여점에서 알바를 하며 ‘야오이’물부터 무협지까지 전에 모르던 책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루종일 정처 없이 떠돌았고 밤이면 나와 같은 불안을 갖고 있(었지만, 아직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줄 몰랐)던 친구들과 술을 마셔댔다. 그러던 어느 날, 종종 방문하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이런 광고 글을 보았다.
‘다이어트 도보여행, 15박16일. 다이어트도 하고 국토대장정도 하는 기쁨. 하루 1만원.’
여행 출발 이틀 전에 보았고, 충동적으로 도보 여행을 신청했다. 나중에 들은 걸로는, 다이어트 도보여행을 기획한 주최 측은 예전에 어린이 해병대 캠프 같은 걸 운영했던 사람들이었다 한다. 해병대 캠프의 억지스러운 고생이 체중 감량 효과가 크니, 이걸 성인 여성에게 적용한 상품을 만들어보려고 시험삼아 도보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라면 참여하지 않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 여행에 홀딱 반해버렸다. (계속)
[기사 전체 보기] 초여름 밤을 걷고 또 걸었던 우리 - 일다 - https://ildaro.com/9372
▶ 트라우마, 중독, 공동의존: 한국계 미국 이민자의 에세이 『남은 인생은요?』
'문화감성 충전 > 안지혜의 그림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낯선 길을 떠나는 것이야 (0) | 2022.05.22 |
---|---|
구석진 마음을 세상과 연결시켜 봐! (0) | 2022.04.29 |
딸들에게 “예뻐져야 해” 대신 자아를 탐구하라는 격려를 (0) | 2022.03.15 |
인생이 뒤집힌 것 같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건지도 몰라 (0) | 2022.02.23 |
낯선 이를 환대하는 마음은 바람을 따라 흐른다 (0) | 2022.01.08 |
‘폭포의 여왕’ 할머니의 실패담에 마음 끌리는 이유 (0) | 202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