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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렌 르루아 글‧그림 『바람의 우아니』
몇 해 전부터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남도 끄트머리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 찾아가곤 한다. 헌식굿을 구경하러 농악단 친구들과 함께 간다. 헌식굿은 음식을 바치는 굿으로, 집에서 죽지 못하고 거리나 바다에서 객사한 이들의 넋을 달래고 먹이는 잔치이기도 하다.
그날이 되면 마을 주민들은 커다란 대야에 나물과 국, 찰밥과 김치, 하얗게 찐 생선과 고기들을 담아 바닷가에 나온다. 모랫바닥에 볏짚 한 줌 펼쳐 놓고 그 위에 밥 한 수저, 김치 한 덩이, 나물, 고기, 생선 한 점씩 내어놓고 굿을 올린다. 잡귀 잡신이라고 불리는 영혼들을 초대해서 그날만은 배불리 먹이고 싶은 마음에 꽹과리에 징, 북도 두드리고 고사문을 읽는다.
▲ 프랑스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비올렌 르루아(Violaine Leroy)의 작품 『바람의 우아니』(이경혜 옮김, 곰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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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바람의 우아니』(비올렌 르루아 글‧그림, 이경혜 옮김, 곰곰)에도 보름달이 뜬 날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 한 마을이 나온다.
이 책의 첫 장은 하늘 풍경이 작은 원안에 담긴 모습이다. 다음 장으로 넘기면 설산을 담은 조금 더 큰 원이 나오고,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큰 풍경으로 확대되어서 보는 이를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한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어릴 적부터 들었던 전설 속 산골짜기 마을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눈보라에 휩쓸리기도 하고 칼바람에 발이 묶이면서 밤낮으로 산을 오르던 여자는 길을 잃어 더 이상 어렵겠구나 싶은 순간을 맞는다. 바로 그때, 마치 여자를 마중 나온 것처럼 낯선 이들이 나타나서 길을 안내한다. 이들이 전설의 마을 사람들일까? 여자는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서 그들의 마을에 머물며 이것저것을 묻는데, 사람들은 침묵의 돌멩이만 전해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면 그들은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내 주머니에 비밀의 돌을 넣었다.”
▲ 비올렌 르루아 글, 그림 『바람의 우아니』(이경혜 옮김, 곰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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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날, 여자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지혜로운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이들이 새벽까지 걸어서 당도한 곳은 꽁꽁 얼어붙은 거대한 배들이 동상처럼 우뚝 서 있는 설산이다. 여자와 아이들은 어떻게 이 거대한 배가 산에 있는지 까닭도 모른 채 그 배 앞에서 밤을 맞이한다. 아이들은 한밤중에 몰아치는 산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너무 추워서 소리도 듣지 못하고 온 감각이 마비될 것 같다. 그렇게 보름달이 뜬 밤에 얼음 속에서 잠든 여자는 다음 날 아침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오래 침묵으로 일관하던 마을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들 곁으로 올라와 바람과 배와 함께 합창하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어쩌자고 소리와 침묵의 비밀을 이 낯선 손님에게 공유하는 것일까.
▲ 비올렌 르루아(Violaine Leroy) 글, 그림 『바람의 우아니』(이경혜 옮김, 곰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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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마을에서 열리는 헌식굿은 고사가 끝나면 나 같은 손님들의 잔치로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오고 가는 손님들 아무나에게 손을 내밀고, 오곡밥 한 덩이를 김에 말아 들려준다. 이리 와 앉으라며 대야 앞자리도 내어 준다.
입김이 호호 나는 추운 겨울날, 뜨신 밥을 받아 든 손님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 대야 저 대야를 기웃거린다. 고사리에 박나물, 숙주나물, 호박 나물에다 온갖 갯것들도 게걸스럽게 얻어먹는다. 그날만은 꼭 우리 모두 바닷가에 떠돌던 잡귀 잡신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마을 분들이 주시는 대로 받아먹다가 뭇국이나 김국으로 속까지 뜨거워지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제야 바다 한번 하늘 한번 옆 사람들 얼굴도 한번 보게 된다.
낯선 손님들에게 밥을 내어 주며 내 조상, 내 가족, 내 핏줄이 아니라 남모르게 떠도는 타인의 영혼을 달래고 어르고자 하는 이 굿은 어떤 마음에서 오는 것일까.
어느 해부터 나와 친구들은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물을 무쳐 가거나 빵을 구워서 가거나 막걸리를 담가서 간다. 우리도 볏짚을 얻어다가 한 점씩 한 잔씩 가져온 음식을 올려두고 마을 분들, 구경꾼들과 나눈다. 어느 해부터는 청소년들이 좋아할 것 같은 과자나 주전부리를 사다가도 내놓고,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딸기를 이웃 농부에게 받아와 올린다.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한해의 끄트머리가 다가올 무렵부터 나는 새해 첫 대보름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적당히 추워도 좋을 텐데….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굿판에 있다 보면 눈물샘이 자극을 받아 별일 없이도 눈물이 흐르곤 한다. 그래서인가. 악기 치는 치배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마을 분이 주신 뜨거운 음식 한 입을 입에 넣을 때나, 아이들이 좋아할 간식거리를 사 왔다며 노란 손수건 위에 과자를 올리는 누군가의 손을 보았을 때도 사람들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걸 종종 보았다.
그렇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잡귀 잡신을 위해 아무 잇속도 없이 음식을 나누는 왁자한 굿판 사이에 있으면, 어쩐지 그 현실이 모두 꿈같이 느껴지곤 한다.
▲ 그림책 『바람의 우아니』(비올렌 르루아 글.그림, 이경혜 옮김, 곰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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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우아니』의 주인공도 나처럼 꿈같다 느꼈을까. 소리와 침묵의 향연에 벅찬 마음이 된 여자는 어서 이 산을 내려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신비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다.
“여기에 비밀을 내려놓아도 된단다. 그러면 넌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지. 이곳에 대해 떠도는 숱한 이야기들 위로 너는 바람처럼 날 수 있게 될 거야.”
그때 여자는 또 한 번 특별한 소리를 듣는다. 이제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말하는 자가 될까, 침묵하는 자가 될까? 아마도 마을의 환대를 받은 여자가 세상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은 바람처럼 흘러 다시 마을로 전해질 것이다. ‘우아니’는 저 멀리라는 뜻의 이누이트(알래스카주, 그린란드, 시베리아 극동, 캐나다 북부에 사는 원주민) 말이라고 한다. 바람 저 멀리에서부터 흘러오는 평화와 환대를 느끼며 새해를 맞이한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을 쓴 작가입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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