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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미드나잇 드라이버』와 『터널』의 세계에 접속하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은밀하게 감춰지는 데이트 강간과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미국 전역 32개 대학 6천100여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더 흔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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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흠뻑 빠져든 그림책이 있다. 별똥별이 쏟아지는 밤의 호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건너는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배에 앉아서 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의 설렘이 엿보이고, 밤공기의 청량한 온도와 냄새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해 질 녘 바닷가에서 둘이 같이 춤추듯 움직이는 장면을 볼 때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살랑거린다. 가슴 벅찬 사랑의 순간으로 자꾸만 나를 끌어들이는 이 그림책의 제목은 『미드나잇 드라이버』(프롬, 요이한 짓고 그림, 쎄프로젝트)다.


특이한 점은 책 속에 나오는 두 사람이 친구인지 연인인지, 여성들인지 아닌지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것 같다는 점이다. 내 경우는 이들을 여성들의 이미지로 보겠다고 선택했고, “우리는 사랑을 할 때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아야 해.”라는 글을 실마리 삼아 이들의 관계를 연인으로 이해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 프롬(Fromm) 글, 요이한 그림 『미드나잇 드라이버』(쎄프로젝트, 2020)   ©Fromm 페이스북 페이지

 

나는 이 책을 조용히 펼쳐보는 게 익숙하지만, 싱어송라이터 프롬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책을 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프롬이 만들고 부른 동명의 노래 <미드나잇 드라이브>가 씨앗이 되어 이 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멜로디를 들으며 책을 보다 보면 한층 확장된 감각으로 장면에 빠져들게 된다.

 

실은 최근 만난 한 출판사 사람에게 이 책을 보여주었다. 새로 쓰고 싶거나 기획하고 싶은 책이 있는지 질문을 받은 터여서,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며 『미드나잇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는 책장을 넘길수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그림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난민, 장애, 인권, 환경보호를 다룬 책들은 다 되지만 퀴어는 안 돼요. 나도 그분들을 응원하고, 우리가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책으로는 안 돼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내가 배제당한 기분이 들었고, 갑자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해졌다.

 

▲ 『미드나잇 드라이버』(프롬, 요이한 짓고 그림, 쎄프로젝트, 2020)  ©SSE Project


그날 저녁, M을 만났다. M은 대학에 다닐 때 알게 된 후배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가깝게 지낼 기회는 없었는데, 졸업 후에도 자꾸만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부산 영도로 가는 희망버스를 탔을 때, 콜트콜텍 부당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농성 천막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촛불집회에서도. 그가 조현병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이다. 그와 나는 어느 조직에도 쉽게 속하지 못하고, 또 우연히 어느 거리 농성장에서 혼자 서성이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이날 저녁 M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최근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조현병 당사자로서 나서서 발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게 그의 이미지는 늘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모습이었던 터라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M은 이렇게 말했다.

 

“살고 싶어서요. 혼자서는 살아갈 방도가 없더라고요.”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오랜 세월 연대의 공간을 찾아다니면서도 M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 힘들고 외로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두드리고 두드리면서 마침내 자신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를 드러내고 권리를 요구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픈 몸이 잘못이 아니라) 아픈 몸을 감추어야 하는 사회가 잘못이라고 말해주는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자각은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졌고, 목소리를 내는 동력이 된 것 같았다. M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낮에 들었던 배제의 말에 잠시 휘청였던 내 마음이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 『터널』(헤게 시리 글, 마리 칸스타 욘센 그림, 이유진 옮김, 책빛) 중에서


그의 모습을 보니 그림책 『터널』(헤게 시리 글, 마리 칸스타 욘센 그림, 이유진 옮김, 책빛)의 토끼들이 떠올랐다. 『터널』의 주인공은 깜깜한 지하에서 땅을 파는 흰 토끼와 회갈색 토끼다. 지하에 머문 이들은 지상에서 자동차만 한 대 지나가도 천둥 같은 굉음에 놀라 뒤로 넘어진다. 돌덩이가 굴러떨어지는 건 아닌지, 터널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여우나 개가 나타나 달려드는 건 아닌지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러다 진짜 위기가 닥치면, 재빨리 바깥으로 도망쳐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토끼들은 다시 지하로 돌아와, 계속해서 돌을 헤집으며 길을 낸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 흰 토끼가 있고 뒤에 회갈색 토끼가 있다는 온기를.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이들에겐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지상에서 함께 뛰놀던 고양이, 멈추었을 때 서로의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또 함께 달리곤 했던 풍성한 털을 가진 고양이를 기억한다. 나무 위에서 잣을 떨어뜨려 주던 다람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쁜 고양이가 차에 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다정한 다람쥐와 영리했던 여우마저 지상에서 죽었다는 걸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니 토끼들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땅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토끼들은 과연 저쪽의 지상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그때까지 고통스러운 지하 행군을 계속해 갈 수 있을까? 마침내 당도한 그 지상은 안전하고 아름다울까?

 

내게 『터널』은 동물권과 로드킬을 떠올리게 하는 우화이기도 하지만, 어둡고 두려운 현실에서도 서로의 예쁨을 계속 발견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러브스토리이다. 절제된 문장과 토끼들의 실룩이는 모습이 툭 튀어나올 것처럼 강약 있는 표현은 보는 이의 가슴을 더 절절하게 만든다. 이 책의 표지에는 ‘노르웨이 2016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책’에 선정됐다는 마크가 붙어있다.

 

▲ 헤게 시리 글, 마리 칸스타 욘센 그림 『터널』(이유진 옮김, 책빛)


M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고 변희수 하사의 복직소송을 유가족이 이어가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비록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앞으로 어떤 트랜스젠더도 고인이 받았던 배제의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으로 법정 다툼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고 변희수 하사의 복직 투쟁도, M의 발언과 활동들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아마 계속 슬프고 어렵고 흔들리겠지. 그러나 그 과정에 두려움과 슬픔만이 있는 건 아닐 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미드나잇 드라이버』의 이 구절처럼.

 

“걱정 마! 나는 미드나잇 드라이버. 깜깜한 암흑 속을 자유롭게 달리는 별밤의 운전사. 우리를 지배했던 어둠 속엔 두려움만 있던 게 아니라는 걸 이제 곧 너도 알게 될 거야.”

 

이 책의 장면들은 주로 달빛에 반사된 무지개가 화면 너머 어딘가 떠 있을 것 같은 밤의 풍경이다. 달빛과 물결, 그림자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 두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인다.

 

『미드나잇 드라이버』의 세계와 『터널』의 세계가 연결지어 떠오르는 건, 이 이야기들이 모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사랑의 순간과 실천을 담고 있어서인 것 같다. 자꾸만 누군가의 집을 빼앗고 누군가를 세상 밖으로 내모는 사회에서도, 절망에 무너지지 않은 채 나아가는 이들의 사랑, 사회 밖으로 내몰린 이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고, 비통하게 죽은 이들을 잊을 수 없고, 혼자서는 도무지 살 수 없으니 어둠 속에서도 계속 나아가는 그런 사랑 말이다.

 

‘함께 살기 위해’ 기꺼이 어둠 속의 운전자가 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이들 곁으로 나도 더 다가가고 싶다. 사랑의 순간을 더 많이 말하면서 나도 나의 터널을 계속 파나가고 싶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 2018)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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