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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외눈 고양이’를 대하는 소녀의 태도
『외눈 고양이 탄게』 이야기…어떤 사랑에 대하여
내 바람 중 하나는, 누군가 제 상처에 놀라 우둘투둘하게 굴더라도, 그가 내 친구라면 도망가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다. 함부로 이해하려 들거나 연민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 무조건 용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상처를 다 치료해주려고 오지랖을 떨지도 않으면서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성미가 급한 데다, 옳고 그름을 획일적으로 따지곤 하는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외눈 고양이 탄게』를 보면서 이 꿈을 기억한다.
가타야마 켄 지음, 엄혜숙 옮김 『외눈 고양이 탄게』 (길벗스쿨, 2019)
탄게는 한쪽 눈에 깊은 상처를 가진 시각장애 고양이다. 어느 날 낯선 집에 제 발로 들어와서는 소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소녀와 가족들은 우다다 뛰면서도 가릉거리는, 이 제멋대로 고양이를 식구로 맞아들였다. 탄게라고 이름 붙였다. 한쪽 눈과 한쪽 팔만 있는 검객이라는 비유를 담고 있다.
사랑을 하면 더 알고 싶고 더 연결되고 싶어지니까, 탄게를 사랑한 소녀는 탄게에게 “넌 내 고양이야.” 말하고 싶었다. 탄게의 상처에 약을 발라 치료도 해주고 싶었고, 종잡을 수 없는 탄게의 시간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탄게는 제 상처를 건드리는 걸 싫어했다. 소녀가 안으면 뛰쳐나갔고, 집밖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척했다.
그때 소녀의 귀에 어디선가 고양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탄게일까? 탄게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데, 괜찮을까? 싸움에서 지고 말까? 걱정이 된 소녀는 어딘가로 뛰기 시작했다. 소녀는 무엇을 하려고 할까? 소녀와 탄게는 사랑하며 공존할 수 있을까?
『외눈 고양이 탄게』 (가타야마 켄 지음, 엄혜숙 옮김, 길벗스쿨, 2019) 중에서
나는 책에서나 현실에서나 고양이에게 빚진 게 많다. 내 고양이 이름은 순이다. 순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느 새벽 이상한 기운에 잠이 깼을 때, 순이가 작은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온몸이 흙과 똥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털이 뭉개진 얼굴 한쪽에 깊게 팬 상처가 보였고 피가 엉겨 있었다. 두려웠다.
병원에 데려갔더니, 집 밖에 나갔다가 다른 고양이에게 습격받은 것 같다고, 조금만 아래에 물렸으면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특별한 약이 없으니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의사는 덧붙였다. 곪지 않도록 항생제와 소독약을 처방받았다.
앓는 순이를 보며 내 온 삶을 후회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방치했을까? 왜 무엇과도 제대로 싸우지 않았을까!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순이도 지킬 수 없겠다는 자각이 그제야 또렷이 들었다. 순이가 다친 건 내 탓이었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심해진 친구의 부탁으로 잠시일 줄 알고 맡았던 순이는, 창이 작은 집에서 나하고 칠 년을 살았다. 그러다 내가 친구들이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생에 처음으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거실을 경험했다.
하필 당시 나는 어떤 상실과 실패를 연달아 만나고 있었다. 후유증처럼 잘 먹거나 잠들지 못 했고,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무표정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혼자 두지 않기로 했다. 친구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한 마을로 불러서 그야말로 집을 내주었고, 시간을 함께 보내줬다. 덕분에 나는 종종 웃었지만, 통증을 핑계로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무기력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순이의 날리는 털을 청소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순이와 사냥놀이를 하지도 않았다. 순이는 아마 불안하고 심심했던 것 같다. 바뀐 환경에서 자주 흥분했고 마당에 찾아오는 새와 길고양이들을 보며 공격적으로 뛰었다. 저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듯 하루종일 문 앞에서 목청껏 울었다.
어떤 친구는 그런 순이를 안고 마당에 종종 나갔다. 거슬렸지만, 나는 정확하게 말리지도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나 역시 뭔가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순이에게 가슴줄을 메고 하루에 한 번씩 마당을 산책시켰다.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영역동물인 고양이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그런 걸 경험한 적 없는 순이는 어느 밤 내가 단속하지 못한 틈으로 집 밖에 나갔고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다.
사고 이후 한동안은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을 째려보고 다녔다. 네놈이냐, 혹시 네 놈이야!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알고 있었다. 문제의 본질은 ‘나’였고, 순이가 공격받고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고양이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을. 순이를 물고 때린 고양이는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던 거겠지. 아기고양이라든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간신히 마련한 비가 들지 않는 집이라든가, 기질적으로 타고난 습성 같은 것.
돌이켜 보니 그건 아프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내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내가 어떤 실패나 상처의 통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내가 옳거나 피해자이고 세상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마도 순이의 사고가 계기가 돼서, 이제 나는 친구들의 마을을 나와서 살고 있다. 사고 이후 며칠을 이불속에서 잠만 자던 순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제 속도대로 우다다 놀면서 아홉 살이 되었다. 상처가 흔적을 남기긴 하는 것 같다. 순이는 눈곱이 자주 끼는 노안 고양이가 되었고, 병원을 극도로 싫어하게 됐으며, 예전에는 반응이 없었던 눈이 큰 인형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친다. 다행히 나와는 더 돈독한 사이가 됐다.
『외눈 고양이 탄게』 (가타야마 켄 지음, 엄혜숙 옮김, 길벗스쿨, 2019) 중에서
『외눈 고양이 탄게』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탄게에게 이입했다. 상처에 놀라 몸부림치고 사나워진 검객처럼, 혹시 내가 어떤 고통을 핑계로 주변을 마구 할퀴고 있는 건 아닌가? 힘이 센 상대에게는 비겁하거나 삐딱하게 굴고, 한없이 약자인 순이는 방치하면서 지낸 건가! 그런데 요즘은 소녀의 성숙한 마음을 배우고 싶다.
탄게가 소녀를 뿌리치고 사라졌을 때, 소녀는 혼잣말했다.
“탄게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모르는 다른 집 여자아이에게 사랑받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어느 먼 산속에서 아내랑 아이들이랑 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소녀는 제 귀여운 사랑을 채우려고 탄게를 어떻게 하지 않는다. 탄게가 아직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를 함부로 헤집지 않고, 탄게가 치러야 하는 자기만의 싸움을 대신하지 않고, 그저 그의 우둘투둘함을 바라보고 곁에 있는다. 순이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처럼, 친구들이 있어줬던 것처럼.
내가 고통에 함몰되어 있었을 때, A는 자신의 집을 내주면서 거기서 쉬라고 했다. B는 밭과 씨앗을 주면서 흙을 밟으라고 했다. C는 내가 뿌려놓고 방치해서 제멋대로 자란 무를 다듬어줬다. 시래기를 만들고 채식 깍두기를 담가 나와 친구들을 먹였다. 덕분에 나는 기운을 차려갔다. 좋아하는 것들이 다시 생겨났다. 친구가 끓인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청국장을 좋아하게 됐고 알큰하고 시큰한 마라탕도 달뜨게 먹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뒷산에 오르고 강가를 산책했다. 철새와 별똥별, 무지개를 바라봤다.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앞에서는 흔들리는 줄기를 따라, 그보다는 친구들을 따라 춤을 추었다. 친구들은 내 통증의 타당성을 묻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같이 하자고 말해주었고 곁에서 내 우둘투둘함을 바라봐주었다.
삶이 불안과 경쟁으로 가득해서인지, 가족과 친구처럼 주변의 친밀한 관계도 모난 모양으로 자꾸 깨지는 것을 본다. 누구나 상처를 받고 때로 공격적이 된다. 상처받은 나와 당신들의 다정한 공존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무엇일까. ‘외눈 고양이 탄게’ 곁의 소녀와 내 친구들을 기억하고 노력하고 싶다. 단단해지고 유연해져서, 내 친구 당신이 지금 상처에 놀라 우둘투둘한 때라면, 내가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놓지 않고 바라보고 싶다. 운이 좋게 동화 같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나도 누군가를 성숙하게 사랑하고 싶다.
친구들의 마을에 살았을 때, 한 친구는 내게 나무와 조각도를 쥐어주었다. 삶을 직조하지 못할 것 같을 때는 손으로 직조할 수 있는 것부터 만들어 보라면서. 설계도를 먼저 그리고 몸과 손에 힘을 빼면서 칼질을 하면 다치지 않고 만들 수 있다면서. 친구의 길잡이를 따라서 숟가락과 접시를 만들었다. 울퉁불퉁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또 한 친구는 운전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산만하게 앞뒤옆을 자주 두리번거리는 걸 알고 있느냐고 일러주면서, 정면을 똑바로 보고 나아가라고 했다. 정면을 보고 나아가야 약속과 신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요즘 이 말들을 자주 상기한다. 그래야 나도 소녀처럼,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의 타당성을 묻지 않고, 그놈의 상처 타령은 언제 끝나냐고 묻지 않고, 곁에서 있을 수 있으니까.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 2018)을 쓴 작가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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