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공동체의 구성원리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일다
풋살 경기, 몸과 마음이 녹는 ‘회복의 시간’
요즘 많은 여성들 사이에 스포츠 붐이 일었듯이, 나도 올해 초 풋살을 시작했다.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김혼비 지음 2018),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열풍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할 운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퇴근길에 동료를 따라 잠시 구경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몸싸움을 마다 않고 달리고 구르며 공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간 수영이나 요가처럼 명상 효과를 주고 자기 속도에 차분히 집중하는 운동이 나와 맞다고 생각해왔는데, 잊고 있던 감각, 그러니까 내 안의 호전적인 면모가 눈 뜬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 나 우리반 닭싸움 챔피언이었는데. 반 대표로 다른 반 대표들과 붙으며 나보다 키 큰 친구들에게도 거침없이 돌진했었는데, 잊고 있었다.
얼마 후 다른 친구를 따라 두 번째 풋살 경기를 하러 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통성명만 하고 한 팀이 되어 뛰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서로를 믿고 패스할 때, 운 좋게 골이 만들어지고 함께 환호할 때의 짜릿함에 몸이 녹는 것 같았다. 오래 알았던 친구나 동료도 경기장 안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 같다. 함께 공부하고 말을 나누고 활동하며 고민을 나눴더라도, 몸쓰는 모습을 보면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으니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러워진다.
▲ 올해 3월 6일, 녹색당 여성축구팀 FC녹색당은 퀴어프렌들리 풋살팀 FC.대포꾼과 3.8세계여성의날 기념 친선 경기를 진행했다. 경기를 앞두고, 풋살장에서 슛팅 연습을 하는 녹색당 당원의 모습. ©김혜현
|
이토록 의심 없이 즐거운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녹색당의 정치인으로서, 또 기본소득 연구자로서 과제를 하나씩 매듭 짓고 난 후, 조금은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이 길어지던 참이었다. 코로나 핑계를 대기도 민망했다. 기후위기를 감각하고 팬데믹을 겪으며, 더욱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는 활동가 동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초심자의 흥분이 가시기 전에 이 경험을 널리 나누고 싶어졌다. 특히 녹색당의 동료 당원들이 많이 생각났다. 한국 사회 정치판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십 년째 분투하고 있는 작은 팀. 우리에게는 운동장을 마구 내달리고 공을 차볼 기회가 필요했다. 그동안은 공고한 양당 체제 아래서, ‘혐오’를 동력으로 삼아 소수자와 약자들을 구석으로 밀어넣는 정치에 떠밀려, 경기장에 제대로 서보기도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당원들은 안팎으로 마모됐고, 동시에 단련되었다.
나 또한 그렇다. 녹색당과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성장했고, 흔들렸으며, 회복하고 있다. 무엇으로부터의 회복인가? 소수정당으로 존재하는 것부터 투쟁이 필요한 한국의 정치판에서 겪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외부의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다. 20대 대선을 겪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음을 느낀다. 벌써 피곤하다. 그렇다면 뭘까? 상처를 묵묵히 견디고 새살이 돋기를 기다리며 내적 역량을 채우는 시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내게는 이 과정이 곧 페미니스트 임파워먼트이기도 하다. 녹색당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겪으며 내가 배운 것
처음에 나는 후쿠시마 핵사고를 겪고도 변함없는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 분노해 녹색당 당원이 된, 선거권을 막 획득한 시민이었다. 얼마 후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며 총선에 출마한 후보가 되었다. 전국을 돌며 당원들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고난 후에는 여성-청년의 정체성을 끌어안고 당대표가 되어 임기를 시작했다. 내가 나 자신으로서 있는 그대로 환대를 받으리란 걸 믿을 수 있는 공동체에서, 각자의 소수자성이 다양성이라는 조각보를 이루는 소중한 조각임을 일깨우는 조직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2년 임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조직을 파악하고 새로운 역할에 적응도 하기 전에, 당내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었다. 처음엔 내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너무나 막막하고 두려웠다. 애초에 내가 정치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게 뭐였는지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무지했고, 무지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페미니스트라면서, 정작 내가 속한 조직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도 대응할 역량이 충분치 않다는 게 부끄러웠다.
자책하던 나에게 한 친구가 말했다. 네가 최선을 다해 이 일을 해내면 그것만으로도 네 소임을 다한 거라고.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페미니즘의 관점, 언어, 태도를 상기했다. 페미니즘에 기대지 않고는 내가 원하는 공동체를 만들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처음 페미니즘을 만났던 순간 느꼈던 해방감을 떠올렸다.
▲ 올해 세계여성의날 기념으로 FC녹색당과 FC.대포꾼 친선 축구경기가 열리던 경기장 벽에 걸린 피켓들. ©김주온
|
페미니즘은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하는 권력에 맞서는 태도이다. 새로운 정치란, 그 우선순위를 뒤흔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페미니즘은 어떤 목소리가 경청할만한 것이고, 어떤 목소리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나누는 권력에 질문하며 도전하는 목소리이다. 내게 여성주의 사유가 주는 희열은 바로 그 질문할 자유에서 온다. 이것이 그동안 ‘더 중요한 의제' 뒤로 밀려나곤 했던,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일 또한 녹색당이 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배경이다.
그러니 일단은 애초에 계획한 바를 접어두고, 상처받은 사람과 실망한 사람을 돌보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었던 환경과 문화를 바꿔야 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바꿔내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급한 문제이자 중요한 문제였다. 당원들과 함께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했다.
페미니즘은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관계 안에서 권력은 상대적이기에, 위치성과 교차성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다. 개개인의 자발적 헌신으로 돌아가는 녹색당과 같은 조직에서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기꺼이 나누며 머나먼 성취까지의 지난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미래의 가치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 곧 긍지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 자체가 '가해자'로 비난을 받게 되면, 특히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해온 사람일수록 견디기 힘든 거부감 혹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고정된 피해자와 가해자란 없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직 차원의 노력과 성찰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리의 과오와 취약성이 드러난 자리에 새로 심어야 하는 씨앗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문제의 원인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크게 흔들릴 때, 오히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것. 그러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 또한 페미니즘이 가르쳐주었다. 실수하고 잘못할 것이 두려워, 선언하고 노력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선언한 내용과 현실의 괴리가 커서 견디기 어려울 때에도, 선언한 내용이 있기에 북극성을 따라가듯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당대표로서 나의 역할은 당원들이 이 간극을 인지하게 하는 것부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매일 시도하고 실패하는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태도”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2018년 여성의 날 기념 녹색당 논평에서 인용). 거듭 파도가 밀려드는 모래사장에 글씨 적는 느낌이 들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저 파도가 될 거라는 믿음을 잃지 말자고.
공동체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동력, 페미니즘
당시에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에 대해 쓰지 않고서는 나의 활동 경험을 진실되게 돌아보기 어렵다고 느꼈다. 그래서 써본다. 뭘 잘했고 못한 걸 떠나서, 고됨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배움이 무엇이었는지 그저 그 시간을 살았던 한 개인으로서 기록하고 싶었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조언과 지적, 지지를 보내며 돌봐준 여러 동료들, 먼저 고민한 페미니스트들이 남긴 치열한 기록들, 무엇보다 괴로움을 견디며 자신을 거듭 교육시킨 당원들을 향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연해주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본 적이 있다. 어떤 길도 없는 들판을 뛰는데 두근거렸다. 페미니즘이 내게 보여준 세계를 생각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김주온
|
어릴 때 나는 단순히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부터 태어난 사유인 페미니즘은 그 ‘문제’를 누가 어떤 시선으로 정의해왔는지, 그럴 수 있는 권력은 무엇이었는지 묻게 했다. 나아가 그 문제를 풀고자 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성찰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었다.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에 새로운 바람이 드나들 통로를 만드는 것,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모두 페미니스트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연루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는 ‘현장’이 존재할 것이다. 내 경우는 녹색당이 그랬다. 내게 정당은 페미니즘을 조직 문화를 변화시키는 도구이자 조직의 구성원리로 인식하게 한 현장이었다. 정당이란 뭘까. 정치에 대한 관점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집권’에 대한 의지와 역량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집단인 것일까? 존재 의미를 판단하는 다른 기준은 없을까? 우리가 정치를 배우는 방식을 새롭게 하고, 정치의 의미를 다시 쓰면 어떨까? 그런 꿈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어디까지일까?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이 내게 선사해준 관점이란 생각이 들어 고맙다. 나는 현실정치, 의회정치, 제도화된 권력의 중요성을 결코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시도, 행위, 활동들에도 정확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유와 언어가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인식, 제도, 문화, 관계, 감정 그 모든 것에서 권력의 근원을 따져묻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답이 아닌 무수한 질문들 속에서 피어날 것이라 믿는다.
페미니즘이라는 지도
내 삶에서 페미니즘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먼 길을 가기 위한 지도다. 다만 아직 모든 길이 다 나와있지는 않고, 걸으면서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표시하며 가야한다. 가다가 동료를 만나면 서로의 지도를 비교해보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나의 지도를 빼앗거나 망치려하기도, 분명히 그 길을 지나왔는데도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지도의 끝이 어딘지는 모른다. 단선적으로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가는 지도라기보다는, 각자의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낸 풍경들, 그 속의 반짝이는 순간들로 빼곡한 이정표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멀리 가고 싶다. 긴 여정을 마치고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 스스로 우리가 원하는 변화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것이 됨으로써 동시성을 관통한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성,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사회, 대담한 야망과 맹목적인 희망, 보답 받지 못한 사랑과 부분적으로나마 보답 받은 사랑이다.”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 p.15
[필자 소개] 김주온(@kim.juon) 녹색당원,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두 조직 모두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일다
▶집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12가지: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저널리즘 새지평 > 나의 페미니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여사’를 만든 사회에서, 내 삶의 운전대 잡기 (0) | 2022.05.25 |
---|---|
지방 퀴어 페미니스트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0) | 2022.05.07 |
기독교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마녀’가 되어야 했다 (0) | 2022.05.03 |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0) | 2013.12.25 |
누가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말을 했던가 (3) | 2013.12.15 |
좁고, 눈에 띄지 않는 ‘장애여성의 자리’ (0) | 2013.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