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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준(準)-아저씨’ 상태를 벗어난 사람, 미정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반적이다, 보통이다, 정상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으로 기억한다. 왜 가위질만 하면 손이 아플까. 주황색 손잡이 모서리가 잘 닳은 오래된 가위를 쓸 때마다 손이 아파, 자르다 쉬고 또 자르다 쉬곤 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나면 손에는 눌린 자국이 보라색 멍처럼 진하게 남았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왼손잡이가 손에 맞지 않는 오른손잡이 가위를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는 내가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도록 교정했다고 한다. 그 과정이 강압적이었는지 어땠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 말을 좀 더듬는 남자아이를 봤는데, 왼손잡이이던 그 아이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도록 부모님이 유도하는 과정에서 말더듬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글씨 쓰는 손을 바꾸는 것이 사실은 꽤나 스트레스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나에게 말더듬증이 생기지 않은 것을 내심 감사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른손잡이 세상에서 여러 해를 살아도, 내 왼손은 오른손에 비할 수 없이 민첩하고 힘이 세다. 왼손이 ‘디폴트값’인 사람이 살면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덜그럭거림은 미처 인지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을 정도로 잦다.

예를 들면, 손잡이가 달린 문 대부분은 오른손으로 열게 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왼손으로 열고, 손잡이를 중심으로 반 바퀴 이상 돌아 들어간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면, 양 옆 사람들과의 간격이 애매해진다. 누군가를 만나 악수를 할 때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왼손이 좋다고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 ‘아이쿠’ 한 번 하고, “제가 왼손잡이라서요.” 한 마디 건네고, 다시 오른손으로 악수한다, 등등.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일반적이다’, ‘보통이다’, 혹은 ‘정상이다’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하고 많은 경우 가운데 선택한 한 가지겠구나, 그게 왜 선택되었는지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은 아주 전부터 어렴풋이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구별하고 가르는 행동이 폭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이 끔찍한 결혼생활을 왜 유지해야 하나

부모님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았다. 피가 타는 듯한, 누가 내 척추에 돌얼음을 쏟아 붓는 듯한 저릿저릿함을 느끼며 불안에 휩싸였다. 저러다가 또 무슨 일 나는 것 아닐까. 손찌검을 한다,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진다….

지금은 벽에 비치는 그림자처럼 희미하게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장면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딱 하나, 부모님의 다툼이 무서워 동생 손을 잡고 집 앞 놀이터로 달려나갔던 초등학생 때의 어느 오후만큼은 기억난다. 빨리 여기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뿐, 엄마를 집에 혼자 남겨놓았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아주 흐릿하게나마 기억나는 다른 장면. 할머니가 집에 왔다. 또 엄마를 괴롭힌다. 참을 만큼 참았고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기에 할머니에게 항의했다. 왜 우리 엄마에게 이러냐고. 엄마 괴롭히지 말라고. 열 살 전후의 대드는 손녀에게 할머니는 눈을 세우고 욕을 퍼부었다. 그 모든 말을 몸으로 받아내고 분노로 속이 이글거리던 것, 왜 이런 생활을 계속하느냐고 엄마를 다그쳤던 것이 떠오른다.

이 가정은 머지않아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내 부모는 이혼할 것이다, 대체 이런 끔찍스러운 결혼이란 걸 왜 하고 살아야 하나, 무슨 벌을 못 받아서 이런 생활을 하나. 생각이 피를 타고 소용돌이쳤다. ‘행복한 결혼생활’ 같은 것이 실재하리라고는, 한참 나중까지도 머릿속으로조차 그릴 수 없었다. 결혼은 나에게 ‘억압’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성주의, 내 괴로움의 원인에 이름 붙이다

‘자신이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사춘기에 동성애적 경험도 거칠 수 있다. 성숙의 과정이다.’ 대학의 여성주의 문학 수업에서 들은 한 마디. 갑자기 몇 해 전 기억이 떠오르며 과거의 나를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였구나.

그 친구는 매력이 많았다. 그림도 잘 그리고 옷도 잘 입어서 꽤나 인기 있었다. 그런 아이와 단짝이 되었다.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들려줄 음악을 고르느라 밤잠을 미뤘다. 그때 주고받은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말 그대로 ‘오그라들어’ 큰 점이 될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닮고 싶어 은밀히 애썼고, 한편으로 그 친구가 다른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것을 볼 때마다 힘들었다. 사랑과 질투와 열등감이 바글바글 끓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생이 된 후 길에서 다시 만났을 때, 헤어진 애인과 재회하는 듯한 반가움과 어색함과 헛헛함이 공존했던 건.

사실 지금 나는 ‘동성애자’, ‘이성애자’ 등의 이름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름표를 붙인다는 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대상을 쉽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긍정적 기능도 있지만, 온전한 이해를 방해할 가능성 또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이성만을 연애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사회화하려 들지만,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이성애자든 ‘하필 그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이성이라서 혹은 동성이라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나이가 들어 가며 스스로를 볼 때 동성애적 측면과 이성애적 측면은 언제나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관계를 쌓아 가는가의 문제일 뿐. ‘사춘기에 동성애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중학생 때 겪은, 당시로서는 조금은 의아했던 내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지점에서 내게 의미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여성주의 문학 수업이 다른 것보다 더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도전하게 하고, 새로운 생각을 던져 주는 수업 위주로 선택했기에 거의 모든 수업이 흥미로웠고 여성주의 문학도 그 중 하나였다. 앞서 든 ‘사춘기의 동성애적 경험’에 관한 말, ‘의학계에 여성이 남성만큼 많았더라면, 생리와 출산이 여전히 괴로울까?’라는 의문 정도가 그 수업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달까.

세상을 인식하는 큰 틀을 형성하는 데 여성주의가 주된 바탕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나에게 여성주의 문학 수업은 감정을 표출할 수 있고 내 의문이 정당함을 확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고, 그게 더 중요했다. 가정에, 세상에, 이렇게밖에 생겨먹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던 내가, 분노와 좌절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내 괴로움의 원인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나아가 괴로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여성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지적하는 손가락들에, 연애와 결혼을 거쳐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듯 속삭이는 세상의 목소리에 화가 나 있었고, 그에 대항하고자 두른 냉소는 한여름에도 벗지 않는 나의 외투였다.

뒤죽박죽이고 불순한, 우리 삶을 위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해 동안, 놀랍게도 나는 ‘준(準)-아저씨’처럼 살았다. 일에서 나의 역할 모델은 20~30년 경력의 남자 어른들이었고, 누구보다 유능하게, 누구보다 철저하게 일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각하거나 아이 ‘핑계’를 대며 수시로 빠지는 여성들을 직업의식이 부족하다며 내심 경멸했고,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다>에서 진행하는 한 강의를 들으며, 오랫동안 잊었던 여성주의와 조우했다. 반갑고도 부끄러웠다. 내가 준-남자인 것처럼, 크고 탄탄한 다수에 속한 것처럼 착각하면서 서슴지 않고 겨누었던 비난의 손가락을 이제나마 거둬야 한다는 것을, 그간 잊고 방치해 온 나의 ‘타자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수업을 듣는 분들과 딱히 친교를 쌓지는 않았지만, 수업시간마다 충만하던 여성들끼리의 너무나 편안한 연대도 잊을 수 없다. 누가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말을 했던가. 현실에서 ‘여자 대 여자’인 국면이 종종 나타난다면, 그것은 여성들이 서로 대립적이어서 라기보다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근본적 원인이 아닌, ‘주변의 만만한 것’에 자신의 불안과 불만과 분노를 해소하려 하기 때문이다. 출산 휴가를 떠나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대체 인력을 충원하지 않는 경영주를 비난하는 것보다 간편하듯.

▲ 내가 왼손잡이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이듯, 생긴대로 표현한 대로 바라봐주는 세상을 꿈꾼다.  
 
한편으로는 괴롭기도 했다. 눈을 질끈 감으면 편안히 살 수 있는데. 세상의 크고 작은 일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면, 주위 사람들과 불화도 일으키지 않고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왼손이 먼저 나오는 게 불편하든 말든, 그건 내 문제일 뿐이고 내가 조심해서 컨트롤하면 될 뿐인데.

정말 그럴까. 엄마는 언제나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평범함’이 과연 가능한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딱히 세상과 대치하겠다는 뜻이 없더라도, 내가 왼손잡이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인 것처럼, 누구에게나 평범함 혹은 평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삐죽삐죽한 부분이 있을 텐데, 무색무취의 평범함이 한 개인에게서 구현될 수 있을까. 그보다는 각자 다수자이면서 소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생긴 대로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왼손잡이로서 느끼는 불편함을 그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물건이든 건물이든 만들 때부터 고려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평균적 OOO(예: 평균적 한국인)’라는 말이 내포하는 허구성을 인식하고 소수자가 느끼는 불편함까지 경청하고 개선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남들은 다 괜찮다는데 왜 너만 그러느냐’며 애써 흘러나온 목소리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장애인도 노숙인도 걸인도 문신한 사람도 없이 말끔한 거리가 실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당신은 여성주의자입니까?

이 사회에서 여성은 분명히, 그리고 여전히 ‘2등 시민’이고 남성에 비해 소수자다.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는 이성애자에 비해, 가난한 이는 부자에 비해, 덜 배운 사람은 더 배운 사람에 비해,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에 비해 소수자다. 수적으로 많은가 적은가 와는 별 관계가 없다.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행사할 수 있는가가 다수자와 소수자를 가른다.

누군가가 ‘당신은 여성주의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소수자를 지지하고 그 관점을 내 것으로 견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전보다 낫다고 자평은 하지만, 여전히 뿌리가 얕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지하철에서 이따금 발달장애인과 마주치면 두렵고 피하고 싶다. ‘왜 저 사람은 보호자 없이 저렇게 혼자 다니나’라고 중얼거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부터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세상에서 붙인 이름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대로 보고 싶다.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그게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한다. ▣미정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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