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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중년이 된 비혼 장애여성, 이희연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연구가 아닌 생활로 다시 만난 여성주의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입력해 놓은 것은 대학시절인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이 여성주의란 말은, 남학생만 가득한 사회과학대학의 분위기에서 생활한 나한테는 무척 새로운 말이었다. 학생회 선거가 있던 어느 가을, 전단지에 새겨진 ‘성 정치’나 ‘여학생 회의’ 등을 유심히 보고 있던 내게, 지나가는 선배가 눈을 찌푸리며 ‘여학생 기구를 왜 따로 만들려고 하냐, 쓸데없는 짓하고는…’라고 혀 차는 소리를 한 것이 ‘페미니즘’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공부를 계속하면서 접한 페미니즘은 ‘학문 속의 페미니즘’이었다. 지금 생각하려 애써도 기억이 희미한 이론들로 접한 페미니즘은 나에겐 ‘학점’을 위한 연구대상이었고, 생소함으로 가득한 분야였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공부는 했지만 여성주의란 나에겐 생활과 관계없는, 정치적으로나 공적인 부분에서만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도, 익숙하지 않은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중하는 척하다가도 여성주의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뒤에서 비웃음을 날리는 남자선배들과, 여전히 강한 남성중심 문화에 익숙해진 나는 ‘여성주의를 너무 내세우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페미니즘을 쓸데없는 여자들의 주장이라고 치부하던, 내가 알고 있던 많은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는지도.
 
또다시 페미니즘을 만난 것은 순전히 내 의지였다. 소논문 제출 연구를 위해 찾아간 장애여성단체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가부장적인 집안과 학교 문화에 지친 내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에게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그녀들은 스스로 생활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비웃음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작은 흠집이라도 잡힐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것이 어려운 이론과 연구로 만나는 페미니즘이 아닌 나를 위한 페미니즘, 내가 직접 나를 말할 수 있는 여성주의와의 조우였다.
 
나는 장애여성이다.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 보장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걷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전보다 몇 배는 힘들어진 장애여성이다. 결코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외모를 지녔고, 비장애인 기준의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성’이나 ‘여성의 역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성격도 미디어가 보여주는 ‘여성’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나의 정체성은 ‘여성’이며 ‘장애여성’이다. 나의 페미니즘은 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자연스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좁고, 눈에 띄지 않는 ‘장애여성의 자리’
 
어린 날의 사진을 보면 내 머리는 바짝 올려 자른 숏컷 스타일이었고, 옷은 동네 남자애들이나 입을 멜빵바지, 티셔츠 차림이었다. 여자친구들이 인형 같은 옷을 입고 치렁치렁 긴 머리에 리본장식을 할 때쯤 나에겐 ‘넌 몸이 불편해서 치마 입으면 안 돼’라는 말이 주문처럼 반복되어 들려왔다. 이 주문은 내가 청소년기를 벗어나 내 맘대로 쇼핑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됐던 듯하다. 지금 생각하면 늘 딸의 불편함을 채워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딸의 여성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어머니의 혼란이 그런 주문으로 나타난 게 아니었나 싶다.
 
이런 엄마의 바람이나 주문이, 비단 엄마가 일을 하셔서 딸을 돌봐줄 시간이 없었던 나만 겪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많은 장애여성들과 만나 서로 여러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부터였다. 초등학교만 특수학교에 다니고 학창 시절을 비장애인의 틈에서 보낸 나는, 생활 속에서 경험한 ‘여성성’에 대한 억압이 나한테만 일어난 일이 아님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관련한 글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페미니즘은 비단 여성에만 국한되는 이론 속 개념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생활 깊숙이 같이할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학교를 떠나 장애여성단체에서 활동하면서부터 다른 장애여성들과 만나고 삶을 나눌 때, 내 생활을 뒤돌아볼 때 필요한 거울 같은 것으로 점점 자리 잡았다. 

▲ "장애여성의 성은 금기시된다"  [사진] 남자, 여자, 장애인 화장실    ©일다 
 
내가 만난 장애여성들은 ‘장애’를 이유로 가족과 사회에서 차별 받은 경험을 크던 작던 갖고 있다. 가족 안에서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고 그래서 어쩌면 차별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게 장애여성의 자리를 정해주는 것이다.
 
그 자리매김은 장애여성이 사춘기에 들면서 신체적으로 ‘여성성’이 발현되면 더욱 견고해지는 예가 너무도 많았다. 어머니의 한숨으로부터 시작하는 가족들의 반응은 축하 받아야 할 월경이 짐이 되는 월경으로만 생각되게 하고, 쓸 데도 없을 것인데 다른 사람 귀찮게 말고 ‘수술’하자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난 생활하는 대부분 보조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내 주위의 장애여성들이 많이 경험한 ‘월경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겪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몸 관리’에 대한 걱정이 좀더 늘어났을 뿐.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엔 소녀들의 월경을 축하해주며 여러 행사도 하는 것을 자주 보는데, 장애여성이 진심으로 포함될 수 있을까?
 
이 사회에서는 사춘기가 되면서 어린아이가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장애여성들에게는 그 구분조차 별개로 만들어 그저 ‘장애인’으로 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여지도 없이 억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조차 모르고 지냈던 혹은 모른 척하려 했던 나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내 입으로 말하게 되었다.
 
‘쟤를 어찌 처리하나’ 고민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이제 곧 중년이라 불려도 아무렇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언니’보다 ‘아줌마’라 불려도 전처럼 기분 상하지 않고, 병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이 ‘이제 중년인데 몸 관리에도 특별히 신경 써야 합니다.’라는 말을 해도 당연히 들을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이와 함께 하나씩 따라붙고 있는 말도 있다. ‘나이 들어 혼자 살면 고생이다.’ 라든지 ‘갖고 있는 돈이라도 많아야 부모님 돌아가시면 좋은 시설에 들어가지’라는 말이라든지. 심지어 ‘이도 저도 아님 더 쓸모 없어지기 전에 나한테 시집이나 오라’는 말도 들었고, ‘더 나이 들면 장애도 심해질 테니 지금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 안정감 있게 살라’는 말도 2~3년 동안 많이 들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시한폭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가 차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라면 가혹하게 느껴질 사회의 시선이, 장애를 가진 비혼여성들에겐 또 하나의 화살이 덧붙어 날아온다. ‘쟤를 어찌 처리하나’라는 것,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짐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처리를 고민한다. 정작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살고 있는 장애여성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다.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내가 공부를 계속한다고 하자 정색을 하면서 ‘너 거기서 더 공부하면 난 널 책임 못 진다. 남자가 공부 많이 한 여자들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러냐’고 말했다. 그 사람한텐 내가 한 사람의 연인이기 전에 책임을 고민할 존재였던 것일까? 게다가 난 그 당시 결혼이란 걸 생각해보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그런 태도가 오만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남자친구란 이름으로 내 삶을 컨트롤하려 하고 내가 그의 생활방식에 따르길 바라는 것이니까. 일반화의 오류일수는 있지만, 그의 태도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밤늦게 친구들과 놀다 택시를 타면 ‘몸도 불편한데 이 시간까지……’라는 못마땅한 시선을 받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도 은근히 가해지는 집요한 시선의 폭력을 참아야 한다. 상점에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안다는 듯 잘라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원하는 것을 수없이 말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또 대뜸 반말부터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대응 반응을 찾아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와 같은 장애여성의 삶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비장애인 기준에 맞추려 했던 지난 시절 나에게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이런 짐짝 취급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때는 나 역시 ‘정상성’의 기준에 나를 꿰어 맞추려 무지하게 노력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특별대우’ 받는다는 말이 듣기 싫어 체육시간에도 안 되는 몸을 움직였고, 음악시간 그 괴로운 가창시험엔 한 소절이라도 부르려 했다. (나의 언어장애는 긴장하면 더욱 더 심해진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비웃었을지도 모르지만, 난 할 만큼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느린 글씨쓰기 때문에 시험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대학원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수업시간에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난 그저 튀기 싫어서, 모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리고 또 다른 불이익을 받기 싫어서 그저 참아야 했다. 나 자신을 학대할 정도로 이를 갈며 다른 길로 우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 차별을 받고 속으로 삭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거기서 참지 말라고, 거기서 웃으며 당당히 이야기하라고, 너를 조금 더 아끼라고. 그때 나는 안 되는 몸을 이끌고 다른 아이들과 평등한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선생님들과 이야기하여 공정하게 시험을 볼 수 있는 평등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글씨 때문에 점수를 깎아먹는 것 대신 대필을 요구하거나, 자판을 이용했어야 했다. (요즘에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말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학생에게 불평등한 발언을 한 교수님에겐 나 혼자 참지 말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었음을, 이 글을 쓰면서 새삼 깨닫고 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나에게, 조금 더 내 삶에 대해 당당해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차별에 대해 맞설 용기가 있었다면, 나의 마음뿐 아니라 다른 장애여성에게, 혹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질 유형 무형의 폭력을 조금이나마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년의 비혼 장애여성, 어떻게 삶을 꾸려갈까
 
지금 나는 재택근무 식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봉급은 적어도 일은 즐겁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이제 슬슬 내 미래에 대해 걱정이 된다.
 
올해 들어 힘들어진 몸 때문에 월급의 절반 정도를 병원비에 쏟아 부었다.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사람 관계도 좁아지고 있다. 부모님도 늙어 가고, 내년엔 막내마저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지금 나는 내 미래에 대한 감도 못 잡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의 벽이 역시 높긴 높다. 주변의 또래 장애여성들도 나이 들면서 찾아올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인다.
 
기회가 된다면 중년을 맞이하는 비혼의 장애여성들을 만나, 우리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족이나 파트너에 의존하거나 시설에 고립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의 주체가 바로 나임을 잊지 않는 삶. 그것이 내가 꿈꾸는 삶이자, 분명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는 삶일 것이다.  ▣이희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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