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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나의 섹스와 나의 임신을 공유하라  


<일다>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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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섹스 이야기
 
나의 첫 섹스는 18살 때였다. 당시 사귀던 사람과 했는데 처녀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얼어있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즐기진 못했다. 그때 섹스는 마치 브로콜리 같은 거였다. 옆에서 먹으라고 하니까 먹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는.
 
근데 얼마 가지 않아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 패닉에 빠졌던 엄마는 몇 주 후 감정이 좀 추슬러지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임신이 안 되어서 천만다행이다.”
 
나 역시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임신이 안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끔찍하게 여기는 일을 ‘운’에 맡기는 꼴이니 말이다.
 
그 다음 나의 섹스 상대는 대학에 들어가 사귄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의 첫 섹스는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끝나고 난 후에 옷에 피가 묻어있는 걸 발견했다. 깜짝 놀라 당황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괜찮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뭘.”
 
우연히 타이밍에 맞추어 생리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는 내가 ‘처음’인 게 당연하고 그것을 기대했었다는 웃음을 멋쩍게 지었다. 그 웃음이 날 할퀴었지만, 첫 경험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척’했다.
 
한번은 내가 가지 않은 자리에서 이상한 설문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질문 중 하나가 ‘우리 과에서 처녀가 아닐 것 같은 사람?’이었고 내가 3순위 안에 들었다며 누가 전해주었다. 이게 무슨 시츄레이숑이지? 하는 뻥짐이 날 곤두세웠지만 뭔가 딱히 반응하진 못했다. 거기에 대해 따지면 나는 성.적.으.로.덜.매.력.적.이게 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했었나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자’의 이미지는 ‘언제든 자기 몸 아래 깔아 눕힐 수 있는 나약함과 항상 페르몬을 줄줄 흘리는 섹시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험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때론 관능적이고 때론 도발적이지만 위협적인 도발은 절대 하지 않는 수동적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랄까. 전형적인 포르노 여성상이랄까?
 
나의 임신 이야기
 
연애 관계에서도 나는 섹스를 거절하지 못했다. 상대방에게 애무를 요구하지도, 상대방의 애무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했다. 콘돔을 쓰자고 말하지도 못했다. 결과는 뻔했다. 나는 임신했다.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빨리.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뭘 해야 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는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엔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낙태는 불법이라는데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지, 돈은 얼마나 필요한지, 돈 말고는 뭐가 또 필요한지. 누구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어디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 더 ‘뭘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에 도움이 되련만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정보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스스로에게도, 파트너에게도 나는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임신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었다. 내겐 돈도, 지지자도, 어떠한 사회보장도 없었다. 수술비만 백 만원이 들었고 검사비와 주사비, 약값도 50만원 정도 들었다. 학교에 가려고 택시를 타고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너무 추웠다. 봄이었지만 추워서 서있을 수조차 없어서 다시 그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보름 정도 수업을 다 빼먹었다. 집에는 학교에 간다고 말하고 나와서 어딘가를 계속 떠돌아야 했고, 돈을 평소보다 더 많이 썼다.
 
약을 한꺼번에 사기엔 액수가 너무 커서 이틀 치, 삼일 치씩 나누어 샀는데, 그때마다 약사는 나를 아래 위로 훑어봤다. 무슨 약인지 알 테니 그랬겠지. 학점은 당연히 엉망이 되었고, 내가 포함된 조들은 조별 과제에 타격을 받아 멘붕에 빠져 있었다.
 
이 사회에서 혼전 임신자가 약자인건 분명한데, 약자를 지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술비를 빌려서 댄 파트너는 그 돈을 갚기 위해 힘들어했고, 나는 그 앞에서 또 죄인이었다. 섹스도, 낙태도 그 모든 과정에서 난 철저히 수동적이었고 코너에 몰려있었다.
 
‘성적 자기결정권’ 어떻게 가질 수 있지?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은 그 이후에 듣게 되었다. 3일 동안 참가했던 <성폭력사건 해결주체 교양학교>에서 평생 처음 여성주의 교양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해방구 같았다.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는 당시에도,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그전보다 더 깊게,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었다.
 
그 때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을 들었다.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아니었다. 원래 알고는 있었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한계를 탐색하고 나의 몸을 알아갈 시간이 내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 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단어로 선명해졌다.
 
‘임신 중단권’에 대한 이야기도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 역시 나의 고민들을 선명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명해진다고 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그리고 임신중단권이 내게 생기진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섹스라이프는 15년을 이어왔다. 난 그 동안 두 번의 낙태를 겪었고, 14년간의 임신불안을 겪었다. 생리주기가 70~80일에 가까울 정도로 길고 불규칙적인 내게는 낙태보다 임신불안이 간혹 몇 배로 더 끔찍했다. 며칠간 달력만 보고 덜덜 떨다가 내 몸이 흘리는 피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내 모습. 그게 반복될 때마다 쌓이는 자괴감. 자궁을 들어내고 싶었다. 그러면 임신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비병역거부자 모임에 참여하려 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는 아직 20대 초반이고 대부분 병역거부자는 28살 정도에 병역거부 선언을 하기 때문에 ‘너무 이른 거 아냐?’라고 묻는 내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멀리 산이 보인다.
근데 그 산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어. 그걸 내가 알고 있어.
그래서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려야 해.
근데 그 산이 내 바로 앞까지 와서 내가 다른 걸 볼 여유도 없이 눈 앞에 산만 가득히 보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고 싶진 않아.
지금부터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 산을 잘 보고 싶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섹스를 계속한다면 임신은 저 멀리 있는 산과 같은 존재였다. 근데 나는 늘 산이 코 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거였다. 산이 바로 앞에 있으니 나의 파트너 역시 다른 걸 볼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 라는 내 말에 ‘낳자’라고 상대방이 대답하면 내 미래는 끔찍해졌고, ‘수술하자’ 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이 날 버리는 것 같았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건 두 사람이 똑같은 무게로 나누어가지기 어려웠다. 결국 상황에 떠밀려 내리진 결정과 처리 과정들은 거친 단면으로 서로를 상처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산이 눈 앞에 닥쳐오기 전에 이야기하고 결정한다면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이야기하고 그 과정을 통해 공동으로 내려진 결정은, 내가 소외된 느낌도 내가 버려진 느낌도 들지 않게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산이 눈 앞에 닥쳤을 때 서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섹스라이프 1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트너와 ‘임신’에 관한 계약을 작성하다
 
‘혼전 임신’이라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을 것인지 중절수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사실 하나의 단추일 뿐이다. 그 이후에도 수십 수백 개의 단추들이 있다. 그래서 다른 단추들에 대해 파트너와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의 요구 사항들을 이야기했다.
 
고민이 더 많았던 만큼 나의 요구 사항이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자꾸만 파트너는 ‘결혼도 안하고 여자를 임신시킨 놈’의 틀로 가두어졌다. 그러니 이야기가 불편할 수밖에. 싸우고 대화를 중단하는 것도 여러 차례. 하지만 요구 사항들을 정리해 하나의 문서로 만들 수는 있었다.
 
1. 매달 약정한 금액을 모은다. -이 돈은 임신중절수술과 그와 관련된 의료비에 쓴다. 혹은 서로간 성생활로 필요해진 의료비(섹스 중 생긴 부상이나 두 사람 간의 섹스로 인한 질병)로 쓸 수도 있다.
2. 임신테스트기는 콘돔처럼 미리 몇 개씩 사서 집에 늘 비치해둔다. 불안할 때마다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테스트기는 남성이 사 놓는다.
3. 임신을 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든 과정에서 매번 병원에 두 사람이 함께 간다. 둘 중 누군가 이 사실을 모르거나 정보로부터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
4. 임신중절수술을 하게 되면 두 사람 다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최소한 일주일은 휴가를 내서 몸조리에 집중한다.
5. 몸조리 과정 중에 남성은 첫 삼 일은 매일 직접 죽을 끓여주어야 한다.
 
결정도 미리 정해져 있고, 돈도 함께 부담하고, 수술을 하게 되더라도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날 많이 든든하게 했다.
 
5번은 좀 찌질한 느낌도 들었는데, 그래도 넣었다. 예전에 10대들이 돈을 서로 모아 낙태계를 한다며 충격적이라는 보도들이 이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상황에서도 어쩌면 참 지혜롭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옆의 다른 사람들과 망을 짜고 함께 대처하는 것이니 말이다.
 
성생활을 공유하는 파트너와 일종의 안전망을 짜서 문서화하고 나니 불안은 훨씬 덜해졌다. 그리고 섹스와 피임에 대해 훨씬 더 당당해졌다. 성적 자기결정권도 경제적, 사회적 뒷받침이 있어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에게도 좋은 것 같았다.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어차피 수술할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or 내가 알아서 낳아서 키울게) 남자주인공들은 ‘왜 내게 알리지 않았냐’고, ‘왜 내게는 선택권을 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공허한 장면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임신과 낙태 과정에 자신을 연관 지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남성인 파트너에게도 긍정적이었다.
 
섹스라이프에서 지뢰를 하나씩 걷어내기
 
하지만 생리가 생각보다 늦어지면 온 신경 줄이 곤두서는 건 여전했다. 고민하다 파트너에게 ‘생리를 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그래? 언제 했는데?’ 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문득 화가 났다. ‘넌 왜 내가 생리 언제 했는지 몰라? 생리하면 늘 이야기하잖아’ 라고 신경질을 냈다. ‘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네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모르지’ 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더 반박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화가 났다.
 
그 다음날 생각해보니 지난 번에 작성한 문서는 임신과 낙태의 과정을 두 사람이 나누어 지는 것에 대한 것이었고, 임신불안은 여전히 나의 몫이었다. 임신의 증상도, 임신의 의혹도, 임신이 아니라는 증거도, 내 몸에서 나타나는 것이었고 나만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나 역시 휴대폰 어플을 사용해서 내가 한 섹스와 생리 날짜들을 기록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수한 남성들이 피스톤 운동을 하며 던지는 “안에다 해도 돼?”라는 질문은 정말 無노력의 결정체이지 않은가. 돌발적인 원나잇 섹스가 아니라면, 안정적인 섹스파트너라면 상대방의 생리 주기를 알 수 있을 테고, 생리 주기 계산을 스스로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항상 피임을 하던가, 콘돔을 쓰지 않고 질내 사정을 하는 소위 ‘생리 주기 피임법’을 사용하고 싶다면 너도 나도 정신 줄을 놓고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섹스 중에 상대방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계산해서 다이어리에 표시해두던 외워두던 할 수 있는 것인데. 나의 섹스 파트너 역시 내 생리 주기에 따라 불안해지고 안심하고를 반복한다면, 임신 불안은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닐 텐데. 문서에 이 내용도 추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나의 섹스라이프에서 지뢰를 걷어내는 것. 스스로를 해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나를 더 이상 놓이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나를 조금씩 더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나의 페미니즘이다.

▲  인공임신중절에 대해 공론화한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 (2013, 조세영 감독) 
 
덧붙임) 여기에 쓴 글은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밝히기에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나 역시 말로는 ‘낙태는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난 절대 그런 것과 연관이 없다는 코스프레를 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과거의 나를, 나의 역사를 인정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존재들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출연하기도 한, 낙태를 공론화하는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2013)의 제작진이다.
 
두 번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내가 흠모하는 블로거(자신의 블로그에 혼자 낙태수술을 받고 집에 와서 미역국을 끓여먹는 일기를 공개 글로 쓴 비혼여성)이다. 그 분의 글을 보고 난 너무 놀랐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다니. 하지만 난 그 글로 크게 위로 받고 긍정 받았다. 그 사람도, 나도 죽을 죄를 진 죄인이 아니니까. 그게 만일 죄라면, 그 역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나의 섹스와 나의 임신과 나의 낙태를 공유하라!   ▣ 진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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