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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판을 까는 여자들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일다 

 

 열두 가지 재밌는 집 이야기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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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고위공직자 성범죄, 반페미니즘 앞세운 야당 후보…

 

새벽 3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국회에서 퇴직한지도 6개월 넘게 지난 상태였기에 2022년에는 선거 때문에 밤을 새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밤 9시쯤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진짜 ‘여성가족부 폐지’를 위해 발로 뛰는 대통령이 탄생할까봐서였다.

 

개표 시작 처음엔 이재명 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표차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밤 12시를 좀 넘겼을 때 윤석열 후보가 역전을 했다. 끊임없이 트위터와 유튜브 개표 방송을 왔다 갔다 하며 행복회로를 돌렸다. 아직 이재명 후보에게 유리한 몇 군데가 남았으니까. 아직 개표해야할 표수가 많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재명 후보가 역전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방송사들은 윤석열 후보 이름 옆에 ‘당선 유력’ 뱃지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때쯤 몇몇 여초 커뮤니티 서버가 폭발했다. 윤석열 후보 당선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트위터 유저들은 “이제 계폭(계정 폭파)하러 갑니다” 혹은 “비계(비공계 계정)로 전환하러 갑니다”라는 말을 써댔다. 그 모습을 보니 두 배로 아득해져서 나도 페이스북에 들어가 짧게 글을 썼다. 앞으로 5년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 2020년 7월 28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 이후, ‘박원순 아카이브’ 사업 진행 계획을 발표한 서울시를 규탄하며 피켓 시위를 하는 필자(신민주) 모습. (출처: 기본소득당)

 

내가 투표권을 가진 이래 진행되었던 선거 중 가장 절망적인 선거였다. 야당 후보가 반페미니즘을 중요 전략으로 채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위공직자 성범죄가 연이어 터졌고, 차별금지법 제정에서조차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던 여당 후보가 ‘더 나쁜 놈’ 앞에 유일한 해답처럼 여겨진 선거였던 탓이 더 컸다. 너무 끔찍해요. 무서워요. 그런 말들이 섞여있는 메시지를 개표 방송을 보며 친구들에게 여러 개 받고 여러 개 보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으로 판을 까는 여자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이 되기 몇 주 전, 나는 <판을 까는 여자들>이라는 책을 친구들과 함께 펴냈다. 우리는 동년배 남자애들만 번번이 청년 담론의 주인공이 되고, 동년배 여자애들은 들러리가 되던 오만가지 토론회들에 지쳐 그 책을 쓰게 되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마이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에는 페미니즘으로 손바닥만한 판을 깔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부터, 대한민국의 판을 뒤집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까지 고루 담겼다. 총여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에서 페미니즘 정치를 위해 출마했던 순간, 알페스(Real Person Slash; 팬덤 서브 컬처)와 디지털 성범죄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와 탈코르셋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나는 판을 까는 여자들이 더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고 썼다. “사회는 끊임없이 젊은 여성을 후려치겠지만, 욕을 먹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욕먹을 것이 두려워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멈추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길은 아직 한 번도 누가 만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고단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썼다.

 

▲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신민주·노서영·로라 공저. 한겨레출판, 2022)을 펴냈다.  

 

투표가 끝나고 많은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판을 까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죠?” “이번 선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무척이나 고민했다. 20대 이하 여성은 이번 선거에서 거의 유일한 의미를 만들어냈다. 모든 연령과 성별 중 가장 적게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했고, 가장 많은 수가 1번과 2번이 아닌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자신의 소신에 투표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략적이고 조직적으로 윤석열 후보의 낙선을 위해 이재명 후보를 밀었다.

 

그러나 나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것 같은 후보의 등장 앞에, 그나마 조금 더 나은 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다. 젊은 여성들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개진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으나, 그 효율적인 방식은 한편으로 강제된 것이기도 했다. 젊은 여자들은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판을 깔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 정도의 의미를 남겼지만, 개표 즉시 나는 ‘표’로 분석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과제를 고심하게 되었다.

 

인간을 유권자로만 보는 정치, 반페미니즘 정치

 

나는 페미니즘을 모든 사람이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든, 어떤 삶을 선택했든 존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폭력과 착취 없이, 불평등과 모욕 없이 모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론이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을 유권자로만 인지하는 정치는 가장 납작한 방식으로 인간을 설명해왔기에,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 청년과 중장년, 국민과 비국민,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 정치판을 보다보면 세상이 마치 흑과 백의 색깔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삶은 복잡하고 우리가 놓인 상황과 관계의 모양은 모두 다른데, 딱 하나만 바꾸면 내 삶 자체가 변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정권만 바꿔버리면, 지금의 정권을 수호하기만 하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뻔한 말들.

 

여성과 청년을 위한다는 말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을 때도 많았다. 나는 여성이고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있다. 나는 청년이고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 나는 1인가구이면서 ‘비혼’ 뒤에도 해 뜨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내 옆에 살고 있는 누군가는 여성이면서 청년이고, 장애인이면서 노동자일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우연한 기회로 나처럼 페미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여성이라는 묶음으로 파악될 수 있긴 하겠지만, 그것은 순전히 편의에 따른 것일 뿐 언제나 정확할 수는 없다.

 

▲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후, 3월 11일 서울 합정역 지하철 앞에 붙은 글.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조이 레너드가 1992년 아일린 마일스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지지하기 위해 쓴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 원문이다. “나는 두 명의 악인 중 덜한 쪽이 아닌, 다른 후보를 원한다”, “왜 우리는 어느 시점부턴가 대통령은 항상 광대여야 한다고 배우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라는 문장이 어느 때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신민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매우 유명한 구호를 만들어냈던 사람들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구호를 때론 ‘모든 인간을 유권자로만 납작하게 해석하는 틀을 만든 다음 인간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삶 속에서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읽는다.

 

정치의 영역에서 더 많은 이들의 경험이 발화되어야 하는 까닭도 비슷하다. 젊은 여성들은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여당 후보의 입에서 청년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측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고, 차별적 언어로 획득할 수 있는 지지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폭로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던 사람들의 삶을 정치의 영역으로 끄집어 올리는 일과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희망을 품고 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던진 바로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 이름이 적힌 조화가 성범죄자 안희정씨의 부친상에 도착한 그 지독한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처럼.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라는 질문을 넘어

 

어쨌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나는 우리가 다음 시기, 지금의 결과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함께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요구는 단순히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라는 질문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우리의 세상이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이루어진 것 같이, 더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정치의 영역에서 논의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게 페미니즘이 꿈꾸는 세상,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앞당길 수 있음을 믿는다. 새로운 정치는 언제나 누군가를 대변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니까.

 

그런 측면에서 평등을 향한 발판이 될 차별금지법 제정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에게 보장하는 기본소득제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으면 좋겠다. 기존의 여당과 거대 야당의 패권을 공고화하는 제도 대신, 대안적인 이야기를 하는 소수정당이 국회와 행정부에 더 많이 진입할 수 있게 만드는 선거제도 개혁 방안에도 관심을 부탁하고 싶다.

 

반페미니즘 전략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꾸리는 나라에서 부디, 모두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마 해야할 것이 매우 많겠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서로 도우며 레벨업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을 대변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도 내 삶을 도무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득권층에게 미래를 맡기기보다, 나의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 그것이 다음 스테이지를 깨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필자 소개] 신민주. 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의 공동 저자. 기본소득당과 국회의원실에서 일했다. 지금은 정치에 관심 많은 평범한 20대로 돌아가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일다 

 

 열두 가지 재밌는 집 이야기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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