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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젊고 아픈 여자들>이 담아낸 의료계 차별의 현장

 

미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방영되고 있는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엔 베일리라는 40대 흑인 여성 외과의사가 나온다. 14시즌에서 베일리는 출근길에 몸의 이상을 느끼고 (자신의 직장이 아닌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 응급실에 들어가 심장발작을 일으킨 것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진료를 담당한 남성 의사는 심전도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베일리는 다른 의사를 요청하지만, 백인 남성인 그 또한 베일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최근에 스트레스 받은 일이 많은 거 아니냐, 심적으로 힘든 거 아니냐고 할 뿐이다. 베일리는 자신이 신체적 증상을 호소하고 있음에도 감정조절을 못하고 있는 걸로 판단하는 것에 화를 내며, 지금 이 증상은 불안장애가 아니라 심장발작이라 재차 강조한다. 그러면서 의대 다닐 때 여성들의 심장발작은 남성들과 다른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걸 안 배웠냐고 말하지만, 남성 의사는 정신과 의사를 호출한다. 결국 베일리는 응급실에서 쓰러지고, 그가 심장발작 중이었음이 밝혀진다.

 

또 다른 의학드라마 <굿 닥터>(The good doctor) 4시즌엔 흑인 여성 외과의사인 닥터 클레어가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 흑인 여성 환자를 마주한다. 혈압이 높은 상태로 실려온 환자와 문진을 하던 클레어는 이 여성이 마리화나 유통업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매일 고혈압 약을 챙겨 먹고 있다는 환자의 말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환자의 말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진료를 진행하고 이후 이 진료는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게 된다. 환자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동료 의사가 클레어에게 왜 환자를 믿지 못했냐고 물었을 때 클레어는 의대에서 배웠던 방식대로, 환자의 인종과 교육 수준, 직업과 체질량지수(BMI)를 고려했다고 답한다. 그러자 동료 의사는 그것이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 같지 않냐고 짚는다. 클레어 또한 ‘같은 흑인 여성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어 기쁘다, 내 의견을 무시하지 않을 의사를 만나서 좋다’고 했던 환자를 자신이 차별적으로 다뤘음을 깨닫는다.

 

▲ 책 <젊고 아픈 여자들> 표지 사진. 미셸 렌트 허슈 저, 정은주 역, 마티. 2022 (제공: 마티)

 

여성 환자로서 병원을 방문한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설명하는 증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리적인 문제라는 식으로 보거나, 어떤 부분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 받는 경험. 여성 의사인지 찾아보고 간 산부인과에서조차 불쾌한 일을 겪고 실망한 적도 있다. 운이 나빴던 걸까?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명백히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구조 안에서 젊은, 퀴어, 장애나 질병을 가진, 이주민/비백인, 가난한 등의 ‘타이틀’이 덧붙여진 여성이라면 중첩적인 차별을 마주하게 된다. 여성 퀴어 작가이자 20대에 고관절수술, 비만세포 활성화 증후군, 라임병, 삼상샘상, 노인성 속쓰림 등의 질병을 겪은 미셸 렌트 허슈는 자신이 겪은 차별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성별정체성, 섹슈얼리티, 인종의 젊은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연구 결과들을 분석하여 정리한 책 <젊고 아픈 여자들>(마티, 정은주 옮김)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차별과 편견의 현장을 조명한다.

 

젊은 여성 환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의사들

 

의료 영역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차별과 편견은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이 여성 환자의 말을 잘 믿지 않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중 한 명인 미리엄은 30대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었다. 그는 유방암이 3기까지 진행되고 나서야 진단을 받았는데 그 진단 또한 자신의 노력으로 받아낸 거다. 처음 가슴에서 멍울을 발견했을 때 주치의에게 말했지만 의사는 초음파 검사만 하곤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이후 증상이 악화되었지만 의사는 여전히 괜찮다고 했다. 미리엄은 자신보다 ‘나이도 더 많고, 경험도 더 많고, 더 똑똑한’ 의사에게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통증도 심해지자 미리엄은 유방 MRI를 요구했다. 이 때도 “유방 MRI 검사는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거나 월경이 끝나고 며칠 안에 받아야 한다”는 안내를 받지 못했다. 관련 정보를 스스로 습득해야 했고, MRI 예약에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다 보험회사는 “40대가 안 되었다는 이유로 유방 촬영 비용도 지불을 거절”했다. 이 모든 장벽들을 넘은 후 미리엄은 암이라는 진단을 ‘받아냈다’.

 

 
미셸 렌트 허슈 작가가 쓴 <젊고 아픈 여자들> 중에서 미리엄 이야기 (이미지 제공: 마티)

 

저자는 “여성의 통증을 무시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수 세기의 역사가 있는 일”이라며 “이 문제는 너무나 방대해서 도무지 정리가 안 될 정도”라 설명한다. 여성의 아픔, 통증, 질병이 무시되는 건 의료계 전반의 오래된 성차별주의 때문이다. 저자는 “의사가 윤리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친절한 경우에도 여성 환자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노력도 하지 않는 의사들과 건강 연구자들의 역사를 눈앞에서 맞닥뜨린다”고 말한다.

 

유방암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1950~1960년대, 그러니까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전 유방암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가슴을 잃는 것’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당시 의사들이 온통 유방에만 초점을 두고, 정작 여성들에게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남성이었을) 의사들이 유방암으로 유방절제술을 하면, 여성들 그리고 여성들의 남성 파트너들이 유방 재건을 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심지어 어떤 의사들은 보형물을 삽입해 유방 재건을 하지 않겠다는 여성 환자의 결정에 대해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다니려고요? 기형처럼 보일텐데요”라는 말까지 던진다.

 

의료계의 ‘디폴트’(기준)은 항상 남성

 

의료계의 성차별은 여성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여성을 배제하고,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의 경우 환장의 4분의 3 이상이 여성”인데 “일부 질환은 주목을 받고 연구비를 지원 받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조사되지 않은 채 ‘미스터리’ 질환”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난 질환들은 ‘히스테리’라는 이름의 오래된 여성혐오와 연결된다.

 

2016년 작성된 <연구 영향 평가에 젠더를 포함시키기 위한 전 세계적 행동 요청>에 따르면 “젠더 편향이 생체의학과 건강 연구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설명하며, “건강 연구의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 양쪽 모두 여성이 현저히 과소 대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거기다 “여성 연구자는 남성에 비해 연구비를 적게 받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의학 저널에 수록되는 “논문 저자로서도 과소 대표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다 보니 남성 연구자들이 남성과 남성의 질병 위주로 연구를 해 왔다는 것. 실제로 심장발작의 경우 그동안 남성의 심장발작 증상을 주로 연구했기에 여성에게서 심장발작 증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인지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성과 다른 증상을 보이는 여성을 진료하는 경우, 의사들이 증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여성이 사망”하는 일들이 생겼다.

 

▲ 책 <젊고 아픈 여자들>(미셸 렌트 허슈 저, 정은주 역, 마티. 2022) 카드뉴스 중. (제공: 마티)

 

HIV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HIV 보균자의 절반은 여성이다. 하지만 “HIV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에 대한 임상 연구에서 여성의 비율은 약 19%에 불과”하다. HIV 약을 예방적으로 복용해 감염 확률을 낮추는 요법인 프렙(PrEP) 또한 “마케팅이 시스젠더 백인 동성애자 남성이 약을 복용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현실이다. 감염 위험이 더 높은 건 비백인 시스젠더 여성들과 트랜스젠더 여성들인데도 말이다.

 

은폐되는 의료계 성범죄

 

또한 저자는 젊은 백인 여성으로서 병원에서 다양한 폭력을 경험했음을 털어놓는데, 물리적인 폭력을 겪은 일부터 약사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겪었고, 의사에게서도 성희롱을 겪었다. 약사든 의사든 고발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권력 역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환자는 의학적 처치를 필요로 하며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 할지라도 의사의 처분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에 젠더나 섹슈얼리티, 인종 등의 소수자 정체성이 더해지면 환자의 위치는 더 취약해 진다.

 

저자의 경우 희귀 질환을 가진 탓에, 그걸 진단하고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사가 많지 않았다. 겨우 정보를 찾아 기차 타고 두 시간, 버스 타고 한 시간을 가서 만난 의사는 질환에 대해선 제대로 대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음흉하고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바뀐 눈빛으로 “갑자기 성적인 늬앙스를 풍기며” 저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여기에 다시는 못 오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자신의 병을 진료할 수 있는 다른 의사를 찾을 수 있을까도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산부인과 진료, 검진 중 혹은 마취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여성들이 대처하긴 쉽지 않다.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수치심을 느끼거나, 혹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고를 한다고 해도 의사가 처벌 받는 일은 많지 않다. 2016년 미국 애틀랜타 저널-컨스티튜션의 ‘의사와 성범죄’라는 연재 시리즈에서 드러난 사실은 의사들의 성범죄가 은폐된다는 거였다. 동료 의사들이 대부분인 의료위원회에서 그리고 검찰에서. 처벌이 확정되는 경우에도 다른 주로 이동해 의료 행위를 하면 그만인 경우도 많다. 징계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는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픈 여성들을 떠나는 남성 파트너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젊고 아픈 여성들이 차별과 편견을 마주하는 건 병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생활에서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흉터를 빤히 쳐다본다거나,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에 괜한 말을 얹는 건 그나마 약과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직장이나 사회생활, 친구나 애인, 파트너에게서도 거부를 당하는 일을 접하게 된다.

 

▲ “젊은 여성이 의학적인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미셸 렌트 허슈, <젊고 아픈 여자들> 중에서 젠 이야기 (이미지 제공: 마티)

 

젊고 아픈 여성들은 또래의 “‘건강한’ 친구들에게 낯선 존재”가 되고, 직장에서 해고 당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겪게 될까 봐 질병을 숨기게 된다. “싱글이든 사귀는 사람이 있든 버림받을 위험에 이미 처해 있다는 소리를 계속 듣게” 된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2001년 이성애자 부부를 대상으로 한 견구 결과 “뇌종양에 걸린 여성을 남성이 떠날 확률이 같은 병에 걸린 남성을 여성이 떠날 확률보다 약 10배가 높았다.” 2009년의 연구에서도 “중병 진단을 받은 여성은 유사한 병으로 진단받은 남성보다 별거나 이혼을 맞게 될 확률이 약 7배 높았다.”

 

젊고 아픈 여성으로서 여러 데이트를 시도했던 저자의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자신의 질병을 데이트 상대에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고, 왜 어떤 음식을 먹으면 안 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안되는지 설명하는 일에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상대가 남성인 경우 “깊고 강고한 문화적 요인, 미의 기준, 성역할 따위가 연애 관계에 작용”했다. 관계에서 ‘여자’가 될 것을 기대받기 때문이다.

 

양성애자 젠은 그런 점에서 연애 상대로 여성과 남성의 반응이 달랐다고 했다. 젠에게 “그래도 섹스는 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으면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 건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상대방의 질병이나 장애를 모두 포용했다는 건 아니지만, 젠은 여성들이 “훨씬 너그럽고 열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퀴어는 퀴어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이해가 있는 집단의 구성원인 만큼, ‘경계성에 대한, 일종의 사이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이 폭이 훨씬 넓다’”고 덧붙인다.

 

젊고 아픈 여자들이 있다!

 

젊고 아픈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무시, 배제와 혐오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젊은 여성이 의학적인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여전히 세상은 “젊은 여성들에게 반짝이는 청춘의 화사한 불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청춘의 화사한 불빛이 되기 위해 많은 젊은 여성들이 질병을 숨기고 침묵하고 참아야 한다면 그 불빛은 결코 빛날 수 없을 것이다. 화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빛을 충분히 낼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 세상이 들어야 할 목소리가 하나 더 생겼다. (박주연 기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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