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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에 대한 도전, 헌법불합치 논란 속 차기 시정부의 과제
베를린 시민들이 대형 민간 임대기업 소유의 주택들을 ‘국유화’하는 시민청원을 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다. 베를린의 치솟는 주택 임대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시작한 주택 국유화 운동이 기존 정치권의 회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2년 6개월여 만에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로써 베를린 시 정부는 대형 부동산기업이 소유한 약 24만 가구의 주택을 국유화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 베를린 시민들이 대형 부동산기업 소유의 주택을 국유화하는 시민청원을 과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출처: “도이체보넨 등 몰수” dwenteignen.de) |
베를린시의 시민청원은 찬성표가 투표수의 과반을 넘고, 동시에 베를린 전체 유권자 표의 25% 이상이면 통과된다. 시민청원 투표는 지난 9월 26일 독일연방 총선, 그리고 베를린 시의회 선거와 함께 실시되었다. 시민들이 찬성표를 던진 투표의 내용은 ‘거대 민간 임대기업의 주택 국유화를 위해 베를린 정부가 법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찬반이다. 구체적인 법안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법안은 아래 5가지 항목을 포함해야 한다.
-베를린에 3,000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한 민간 임대기업의 주택을 국유화한다. 공기업, 지역 또는 세입자 주택조합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국유화된 주택은 공공기관(Anstalt des öffentlichen Rechts)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공동경제 방식으로 관리한다.
-국유화된 주택의 관리는 주민, 세입자, 베를린 시민의 민주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택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은 해당 주택의 사유화를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국유화 해당 기업에는 시장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보상한다.
이번 청원을 끌어낸 것은 “도이체보넨 국유화/몰수”(Deutsche Wohnen und Co. enteignen)라는 시민운동이다. 도이체보넨은 베를린에서 가장 많은 주택을 보유한 부동산 임대기업이다. 상징적으로 도이체보넨의 이름을 청원 운동에 사용한 것이다.
베를린 시민청원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서명운동 시작 후 6개월 이내에 2만 명 이상의 서명이 모여야 한다. 또한 청원 신청 후 4개월 이내에 베를린 유권자의 7%인 약 17만 명 이상의 서명이 모이면 법적 효력을 갖는 시민투표가 실시된다. 도이체보넨 국유화 운동 측은 2019년 4월 6일, 베를린에서 치솟는 주택 임대료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최하면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당일 시위에는 베를린에서만 주최 측 추산 4만여 명이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5만여 명이 참가했다.
▲ 치솟는 주택 임대료에 항의하는 베를린 시민들. 2019년 4월 6일, 수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기점으로, 대형 부동산기업 소유의 주택을 국유화하는 시민청원을 신청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출처: mietenwahnsinn.info |
국유화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로우츠베 타헤리(Rouzbeh Taheri)는 이번 시민청원 결과에 대해 “베를린 시민들이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말하며,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거대 부동산 기업의 국유화를 위한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했다.
이제 공은 새롭게 구성될 베를린 시 정부에 넘어갔다
그런데 시민청원의 내용은 구체적 법령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기업의 주택을 국유화할 수 없다. 베를린 시 정부가 시민청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이 법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어야만 주택 국유화를 위한 과정을 밟아나갈 수 있다. 이미 베를린 시의회는 2018년, 시민청원에 의해 정부가 마련한 ‘베를린 테겔 공항의 운행 지속에 관한 법안’을 부결시킨 전례가 있다.
국유화 운동 측은 이번 투표 결과가 정치권에 커다란 압박이기 때문에 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렇지 않다면 시민들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국유화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국유화 실현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 베를린 시의회 선거 결과 사민당(SPD)이 36석으로 다수당이 되었다. 녹색당(Grüne) 32석, 기독민주당(CDU) 30석 순. (출처: hwahlen-berlin.de) |
이제 공은 새롭게 구성될 베를린 시 정부에 넘어갔다. 국유화 투표와 같은 날 실시된 베를린 시의회 투표 결과에 따라,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고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개의 정당이 연정을 해야 한다.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은 사민당이다. 사민당은 21.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전체 147석 중 36석을 차지했다. 계산상으로는 18.9%로 32석을 차지한 녹색당도 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시장을 배출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민당이 새로운 정부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언론은 현재 사민당 주도로 현 정부처럼 적적녹(사민당-좌파당-녹색당) 연정이 이어지거나, 사민당-자민당-녹색당의 신호등(적-노랑-녹색) 연정이 탄생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중 좌파당 만이 주택 국유화에 명확히 찬성한다. 녹색당은 시민들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국유화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자민당은 주택 국유화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사민당의 시장 후보인 프란치스카 기파이(Franziska Giffey)는 국유화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한 정치인이다. 그는 주택 국유화를 통해서는 임대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은 사유재산의 몰수가 일어날 수 있는 도시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며 주택 국유화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그는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해 “시민들의 의지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투표의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투표 전과 비교해 완화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법적인 조건, 헌법과의 불합치 가능성, 재정 조달 가능성, 베를린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정확히 검토해야” 한다며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회주의 경제 내포한 ‘기본법 15조’ 적용 여부가 관건
주택 국유화를 실현하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커다란 산은 헌법 합치 가능성과 재정 문제이다. 국유화 운동 측은 이미 법률 자문을 마쳤다며,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주택 국유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핵심은 독일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 15조이다. 기본법 15조는 “부동산, 천연자원, 생산수단을 보상 규정을 통해 국유화 또는 또 다른 형태의 공동 경제로 전환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기본법 15조가 명시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도로나 발전소 등을 건설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국가가 수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국가사업을 위한 이런 종류의 사유재산 수용은 기본법 14조에 사유재산의 권리 보장 관련한 내용과 함께 명시되어 있으며, 시장가격에 따른 보상이 필수이다.
하지만 기본법 15조는 ‘사회주의 경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항이다. 1948-1949년 기본법이 만들어질 당시, 독일은 아직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경제 중 무엇을 택할 것인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인 중에는 산업계가 지나친 권력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이 많았다. 산업계가 나치의 권력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법 15조는 시장경제에서 자본가나 기업인이 지나친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국유화 운동 측은 기본법 14조가 아닌, 기본법 15조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보상에 있어서도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기본법 15조는 사회주의 경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시장가격에 따른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유화 운동 측은 이상적인 사회적 주택 임대료를 기준으로 40여 년에 걸쳐, 몰수한 주택에서 나오는 임대료를 통해 보상금 지불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보상 비용으로 약 100억 유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헌법 15조가 적용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 2019년 4월 6일 베를린, ‘미친 임대료’(Mietenwahnsinn)와 추방에 반대하며 주거 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모습. (출처: Gemeinsam gegen Verdrängung und Mietenwahnsinn 페이스북) |
실현 가능성 우려에도, 베를린 시민들의 의사표시는 무시할 수 없다
독일 공영방송의 대표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Tagesschau) 온라인 기사에 따르면, 주택 몰수는 헌법 14조에 명시되어 있는 사유재산 보호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 헌법 14조가 인정하고 있는 사유재산에 대한 몰수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해당하며, 시장가격에 합당한 보상이 요구된다. 하지만 주택 임대료 안정을 위한 가능한 다른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의 주택 국유화 조치가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장가격에 따라 주택 국유화를 실시할 경우, 최대 400억 유로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베를린시의 재정 한도 내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울리히 바티스(Ulrich Battis)는 베를린시의 주택 국유화 시도는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헌법 15조의 내용은 특정 부동산을 몰수하기 위한 법안이 아니며, 국가 단위의 정치적 결정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베를린시 정부가 아닌 연방 정부에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훔볼트대학의 공법 교수이자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고등행정법원의 판사이기도 한 크리스티안 발트호프(Christian Waldhoff) 또한 베를린시의 법에는 헌법 15조에 상응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베를린 시 정부에게는 주택 국유화를 위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자유시장경제를 보장하고 있는 유럽연합법에 위배된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3,000가구 이상을 소유한 부동산 회사의 주택만을 몰수하는 것은 법이 정하는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법률가들의 의견도 있다.
이처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시민들은 주택 국유화에 투표했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권이 베를린시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결과이다. 따라서 새로운 베를린 시 정부는 주택 국유화를 위한 법안을 고민하면서도, 임대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동시에 제시하고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투표의 결과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라는 시민들의 강력한 의사표현이고, 주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택 국유화 법안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ildaro.com
[필자 소개] 김인건. 대안학교에서 철학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적 평등을 주제로 석사를 마치고 여행가이드를 하며 통번역, 독일 소식을 한국 언론에 소개하는 일을 해왔다. 환경과 지속가능한 삶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움벨트(Umwelt)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어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역사 속 사회의 변화 과정과 이를 해석하는 이론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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