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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경계 위에서] 다양성, 포용성 그 너머의 세계로
※ [젠더의 경계 위에서] 시리즈에선 확고한 듯 보이는 성별 이분법의 ‘여성’과 ‘남성‘, 각각의 한계를 재단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경험과 도전, 생각을 나누는 글을 소개합니다.
가느다란 팔다리, 길게 뻗은 생머리, 크고 또렷한 눈, 오똑한 코, 핑크빛 입술까지 가진 바비 인형. 바비 인형은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지만, 내 삶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 적은 없다. 아니, 아예 지분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말일 테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이 바비, 미미 등의 이름을 가진 인형을 가지고 놀 때에도 난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해 본 적도, 소유한 적도 없다. 어릴 적 주변 어른들에게서 “바비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미스코리아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여자아이에게 미인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얘기는 큰 칭찬이었을까?
▲ 바비 커플. 미국의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 이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했던 바비 인형 ©Mattel |
바비 인형을 선물로 주겠다는 데도 시큰둥했던 나의 남다른 ‘취향’은 분명했다. 여자아이라면 당연히 예쁜 인형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한 주변 어른들은 ‘쟤는 뭐가 되려고 그러나’ 우려했다고 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난 ‘쫌 별나고 이상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라면서 무리 없이 ‘정상사회’에 편입했고,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성별 확인란에 아무런 위화감 없이 여성에 표시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디 엔드’(the end) 끝이 나는 이야기였으면 좋았겠지만, 최근 난 어린 시절의 나와 바비 인형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며 인생 최대의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남자아이는 아니지만 ‘보통의’ 여자아이와는 다른?
바비 인형에 관심 없던 그 시절, 나에겐 어떤 감각이 있었다. 시시한 인형놀이나 하는 여자아이들과 나는 다르다는 감각. 그렇다고 ‘여자아이들과 다름 = 그러니까 난 남자아이’라는 뜻은 아니다. 여자아이지만, ‘다른’ 여자아이라는 거다. 바비 인형을 좋아하고 핑크색을 좋아하며 귀여움을 어필하고 싶어하는 ‘여성성’을 가지지 않은 ‘특별한’ 여자아이. 나는 그러한 ‘여성성’을 하찮게 여겼다. 귀여움이나 예쁨을 갈구하는 욕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감각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다니며 여러 ‘여자아이’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지만 어떤 순간순간마다, 난 그 친구들의 어떤 점들을 평가하고 무시했다. 그건 여성에게 끌리는 나의 성적 지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정말 모순적이게도, 여성을 사랑하는 만큼 어떤 여성성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당시 인기 있던 여성 아이돌들을 (웬만하면 다) 좋아했던 나였지만, 같은 그룹 내에서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멤버들이 있었다. 주로 귀여움과 청순한 이미지를 담당하던 멤버였다. 특히 그런 멤버들은 영어로도 ‘Aegyo’(애교)라 표현된다는 한국 특유의 애교를 드러내길 강요 받는 일이 많았다. 그 때의 난 그걸 강요하는 이들과 사회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애교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괜한 미움을 쏟아냈다. (아마도) 이성애자였을 수많은 친구들이 ‘OO부인’을 자처하며 걸그룹 멤버들에게 경계심을 드러내고 시기와 질투를 보일 때 전혀 동감할 수 없었던 나조차도, 여성이 자신의 어떤 여성스러움을 드러낼 땐 함께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
그렇게 남들과 조금 다르지만 또 다르지 않았던 내가 갈망했던 건 ‘멋있음’이었다. 단, ‘남성성’을 선망했던 건 아니다. 내가 목격해 온 남성성은 제멋대로고 폭력적이며 지저분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건 멋있음과는 거리가 있는 거였고, 내가 닮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가 좋아한 멋있음이란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따라올 것이다. 그러게, 그 멋있음은 무엇이었을까?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것. 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매력 혹은 성향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달라진’ 바비 인형
다시 바비 인형으로 돌아가 보자. 바비 인형으로 유명한 완구사 마텔은 2019년 기존의 여성 인형 바비와 남성 인형 켄이 아닌 새로운 인형들을 출시했다. 크리에이터블 월드(Creatable World), ‘모두를 위한 인형’이라는 이 컬렉션엔 성별이 없다.
▲ 마텔에서 제작한 ‘크리에이터블 월드’ 홍보 영상엔 다양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출처: Creatable World 유튜브 채널) |
인형은 기본 짧은 머리지만 긴 머리를 붙일 수도 있고, 바지도 치마도 입을 수 있다. 구두를 신을 수도, 운동화를 신을 수도, 장화를 신을 수도 있다. 안경을 쓸 수도 있고 베레모를 쓸 수도, 야구모자를 쓸 수도 있다. 인형을 소유한 아이/사람이 선택하는 것에 따라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인형은 바비 인형의 기본 사양이었던 하얀 얼굴에 금발을 하고 있지도 않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한 인형 중 자신이 원하는 인형을 선택하면 된다.
이 컬렉션을 출시하며 마텔의 임원진은 “전 세계가 포용성의 긍정적인 영향을 반기고 있다”고 얘기하며 자신들도 “그것을 반영한 것”이라 설명했다. 마텔의 포용성 언급은 의미가 있긴 하지만, 사실 마텔의 바비는 지난 몇 년간 판매율이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바비가 재현하는 전형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오기보다, 현실의 여성들이 가진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나만 ‘전형적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바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던 거다.
마텔은 비판과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다양한 바비를 등장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날씬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짧거나 곱슬한, 키가 작은, 다양한 피부색의, 휠체어를 탄 인형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이 ‘크리에이터블 월드’까지 이어진 거다. 그리고 2020년, 마텔은 바비 인형 브랜드로 약 15억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가느다란 팔다리, 길게 뻗은 생머리, 크고 또렷한 눈, 오똑한 코, 핑크빛 입술의 바비 인형을 가지고 인형놀이를 하는 ‘여자애’들을 시시하게 여겼던, 그렇다고 ‘남자애’들의 놀이를 탐냈던 것도 아닌 그 때의 어린 나에게 다양성과 포용성을 탑재한 지금의 바비 인형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미스코리아에 나가려면”이라는 말과 함께 건네지는 바비 인형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바비 인형이 주어졌다면 난 그 인형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바비 인형과 나의 관계가 ‘잘못된 시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 아니다. 또한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그 ‘여성성’이 날 약하거나 시시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 또한 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인다. 그땐 엉뚱하게도 ‘여성성’을 탓했지만 사실 내가 맞서야 하는 건 한정적인 여성의 몸, 여성성, 여성의 역할, 여성의 꿈 등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사회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 바비 인형으로 유명한 완구사 마텔이 최근 새롭게 출시한 다양한 모습의 인형들 ©Mattel |
두 칸으로 나뉜 박스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찾는 여정
이렇게 바비와 나의 악연(?)은 마무리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비 인형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다. 지금처럼 다양한 바비 인형이 등장한 건 무척 즐거운 일이지만, 여전히 난 바비 인형보단 레고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게 취향인 걸.
다만 바비 인형과 나의 과거를 되짚으며 바비 인형의 변천사를 지켜본 나에겐 이전에 없던 질문이 생겼다. 내 안의 다양한 모습과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고작 두 칸으로 나눠진 박스 중 하나에 나를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걸까? 그 박스를 넘어설 순 없을까? 그런 질문과 의문, 연이어 피어나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한데 모이자 정체성을 찾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여정의 끝에 다다를 때면 난 새로운 정체성(논-바이너리나 젠더퀴어 등)을 찾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분명한 건, ‘여자아이’니까 바비 인형을 건네는 사회가 지겹다는 것. 또한 바비 인형을 사랑하는 ‘여자아이’들을 ‘여성성’ 강화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방식은 끝내고 싶다는 거다.
무엇보다, 내가 추구했던-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의심했던 그 ‘멋있음’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고 싶다. 젠더 이분법의 경계를 뛰어넘고 흩트릴 수 있는 말을. (박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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