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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트랜스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여정

[Let's Talk about Sexuality] 섹슈얼리티의 영토 넓히기  (by 수엉)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망설이는 나의 몸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미 여성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남성으로 분류하고 대하고 여기는 모든 관계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그러한 관계를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럼에도 절대 떠나보낼 수 없는 관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내 몸과의 관계였다.


나는 무엇보다 나의 몸이었고, 바로 그 몸의 어떤 특징들이 나를 남성 범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나의 몸을 보고 나를 남성으로 인지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나의 몸에 환멸감을 느꼈다. 몸의 크기와 형태에 대한 수많은 불가능한 꿈을 꿨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에게 성적인 관계란, 무엇보다 나의 몸을 상대방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두려운 관계일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 나는 나를 향한 조그만 호감도 의심하는 습관, 누군가를 향한 나의 호감이 반드시 거절당할 것이라 확신하는 습관을 착실하게 들여가고 있었다.


이 사회에서 ‘성적인 것’의 의미가 이미 상호배타적인 두 젠더에 기반하고 있을 때, 트랜스여성으로서 나의 몸은 이미 적절하지 않고 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몸으로 배치된다. 이성 간 연애와 동성 간 연애가 고정불변의 두 젠더에 기반한 각본과 규범이 작동하는 장소일 때, 그러한 연애 관계 혹은 성적 친밀성의 장에서 나는 이미 어딘가 조금은 어긋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여겼다. 그런 나는 오랜 기간 어떠한 성적인, 혹은 로맨틱한 관계도 맺지 않고 지내왔다.


▶ Transgender Pride flag. 2017년 11월 18일 경의선 숲길공원에서 열린 “기억하다- 2017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촛불추모회”에서. (출처: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http://transgender.or.kr/xe/board_OsWi59/5555)


몇 해 전 대구 퀴어문화축제로 향하는 퀴어버스를 타기 위해 470번 버스를 탔을 때, 누가 보아도 나와 목적지가 같아 보이는 한 사람을 보았다. 대구 퍼레이드는 예상만큼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이 잠잠해질 때쯤 그 사람과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만남은 호감으로 이어졌고, 그 사람과 나는 여러 번 만나 함께 밥과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조금 더 진지한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머뭇거렸다. 그 제안 앞에서 나와 그 사람을 의심했다.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당신은 남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떠한 의료적 조치도, 어떠한 커밍아웃도, 어떤 눈에 띄는 여성스러운 젠더 표현도 하지 않던 당시의 나로선 너무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후에 나는 좋지 않은 방법으로 그 사람을 떼어냈다.


이렇듯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모든 관계 앞에서 나는 뒷걸음질 치며 속으로 묻는다. 당신이 보는 나의 몸은 여성의 몸인가? 내 몸은 여성으로서 매력적인 몸인가? 몸의 곳곳에 이미 사회적으로 남성적인 몸의 특징으로 분류된 흔적들이 남아있을 때, 당신은 눈을 감을 것인가 혹은 그럼에도 내 몸을 응시해줄 것인가? 나는 그 외면 혹은 응시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여성 규범 앞에 선 나의 몸


과제를 핑계로, 트랜스젠더들이 맺어나가는 성적 친밀성에 대한 국내외 연구를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지점은 영어권 지역의 연구에서 트랜스젠더 본인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특히 그 파트너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한 연구는 트랜스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에 대한 경험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 결과는 젠더 이행 과정에 있는 트랜스남성과의 연애 경험은 트랜스남성의 젠더 이행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와 끊임없이 관계 맺고 협상하는 대상인 파트너 여성의 젠더 이행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적한다(Brown, 2009).


파트너에 대한 연구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지점은, 그 대부분의 연구가 트랜스남성의 여성파트너에 대한 연구였다는 점이다. 트랜스여성의 남성파트너에 대한 연구, 특히 파트너 당사자의 입장에서 시도한 연구는 더더욱 없었다.


트랜스여성의 남성파트너에 대한 연구는 미국 지역에서 트랜스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그 폭력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지적을 경유하여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이 함축하는 하나의 의미는 트랜스여성의 성적 실천은 위험을 동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성 파트너를 원하고 그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트랜스여성이 경험하는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성적 학대(IPV: Intimate Partner Abuse)의 경우 비(非)트랜스 여성과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트랜스여성의 젠더 실천을 가짜, 기만, 속임수로 의미화하며 그를 징계하는 것이다(Goodmark, 2013).


나는 몇 해 동안 트랜스 커뮤니티 언저리를 떠돌며 트랜스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언어적이고 감정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이 들어왔다. 그들이 자신의 파트너인 트랜스여성에게 ‘만나주는 것을 감사히 생각해라’, ‘진짜 여자도 아닌 게’ 라는 말을 하며, 동의를 구하지 않은 신체 접촉을 당연시하고, 트랜스여성을 성적 도구로 대하고, 그것이 강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건너 들을 때면 나는 확신한다. 그들은 트랜스여성을 업신여긴다. 왜냐하면 트랜스여성을 진짜 여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 젠더를 기반으로 한 성폭력, 가정폭력을 끝내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 ‘No more’에서 트렌스젠더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요구하며 진행한 캠페인. (출처: nomore.org)


이러한 폭력이 단지 트랜스여성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하는 어떤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랜스여성을 침입자로 간주하는 여성전용 공간, 트랜스젠더로 의심되는 사람이 신고와 퇴출의 표적이 되는 장소는 그 폭력의 전제를 공유한다. 정신과 진단서, 수술확인서, 부모동의서 등의 일괄적이고 불합리한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성별 정정을 허용하는 법체계 역시 진짜 트랜스여성과 가짜 트랜스여성을 가르며 그 폭력의 전제를 공유한다. 트랜스여성에게 취업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트랜스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결격 사유가 되어 주변화되는 노동시장 역시 그렇다.


다양한 사회의 장에서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과 그에 관여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은 다양하고, 각기 다른 설명과 개입을 요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 문단으로 잡아채 적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사회 전반에 거친 사회적 인식, 관계, 제도가 끝없이 트랜스여성을 (비트랜스여성에 비해) 진짜 여성이 아닌 어떤 존재, (영원히) 아직 여성이 되지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회가 트랜스여성이 살아가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해나가는 장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것이 이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트랜스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제라면,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는 한 번도 내 몸과 역사를 온전히 긍정해보지 못했고, 매년 퀴어퍼레이드를 프라이드가 아닌 부끄러움으로 참여한다.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여성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나만의 방에 칩거했고, 누구도 나를 보지 않기를, 투명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스스로 나는 ‘진짜 여성’이 아니며, 영원히 될 수 없다고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여성이 여성으로 인정받는 단 한 가지 경로는 트랜스여성 자신이 그 역사와 몸을 비(非)트랜스여성에 가깝게 만들고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일상적 관계에서 트랜스여성이 여성으로 인지되려면,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숨기고 자신을 비(非)트랜스여성으로 연출해야 한다. 남성으로 분류된 사람의 특징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감추거나 없애고, 여성으로 통하기에(passing) 적절한 몸을 연출해야 한다. 짧은 머리, 낮은 목소리, 큰 손과 발, 수염, 키, 몸과 얼굴의 골격, 화장기 없는 얼굴을 숨기거나 없애고 긴 머리, 높은 목소리, 매끈한 얼굴, 여성복으로 분류된 복장을 부각시켜야 한다.


여성으로서 법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정신과에 방문하여 태어날 때부터, 혹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해왔고,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항상 남성에게만 성적 호감을 느껴왔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어서 “성전환수술을 받아 현재 생물학적인 성과 반대되는 성에 관한 신체의 성기와 흡사한 외관을 구비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일상적 관계와 제도는 이미 여성의 범주와 의미에서 트랜스여성을 밀어낸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나의 몸을 긍정하고, 나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데에는 큰 힘이 든다. 이미 나의 골격, 체형, 키, 목소리는 여성 범주의 규범적 이상에 한참 동떨어져 있고 그것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길거리에서 수많은 눈총과 질문을 받고, 어떤 상황이든 ‘남자에요 여자에요?’와 같은 말을 듣는다. 존재만으로 논란이 되는 상황에 종종 처하는 나는, 나를 여성으로 설득하기 위한 간단한 노력들조차 할 용기와 힘이 없다.


나의 몸은 이미 ‘진짜 여성’의 범주에서, 혹은 여성 모두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어떤 규범적 이상에서 한참을 떨어져 나와 있으며,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그 간극을 좁힐 수 없을 거라 느낀다. 그렇기에 나는 적절한 여성 섹슈얼리티 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느낀다. 단지 위계화된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인다는 점을 넘어서, 여성으로서 섹슈얼리티를 논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섹슈얼리티의 영토가 이분법적 젠더에 따라 이미 구분되어 있는 상황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헤테로여성 혹은 남성에게도, 레즈비언과 게이에게도 섹슈얼리티를 함께 탐구하고 실천할 적절한 상대가 아니었다. 헤테로여성과 게이는 내가 남성이길 기대했고, 나는 헤테로남성과 레즈비언이 생각하고 바라는 여성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랫동안 트랜스여성으로서 섹슈얼리티를 탐색하고 실험할 계기를 가지지 못했다.


퀴어한 친밀성을 나누며 유동하는 나의 몸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좋으련만, 우연한 계기로 나는 한 사람과 장기적인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나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매달 열었던 트랜스젠더 지지모임 TGG를 계기로 한 사람을 만났다. ‘사랑’이라는 말을 서로의 입에 담은지도 꽤 오래 되었다. 나는 일대일 연애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에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한편으로 지금 연애는 배타성과 함께 서로만이 중요한 어떤 확고한 삶의 영역을 만들어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사회의 지배적인 젠더-섹슈얼리티 각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해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나누고 있다.


▶2016년 12월 진행된 트랜스젠더 지지모임 TGG 사진 (출처: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http://transgender.or.kr/xe/index.php?mid=board_OsWi59&page=2&document_srl=5195)


‘위화감’, ‘불일치’, 불쾌감’, 이 단어들은 트랜스여성과 몸의 관계를 얘기할 때 가장 손쉽게 떠올리는 말들이다.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몸에 대한 나의 감각이 그 단어들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와 관계 맺고 있는 동안 나의 몸은 즐거움과 친밀성을 수행하는 몸이었고, 사랑을 나누는 몸이었다. 점점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내 몸을 채우던 불편함은 비워졌고, 그 빈자리는 곧 나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다르게 설명할 힘으로 채워졌다.


나는 훨씬 더 편하게 나의 몸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의 관계는 여전히 시달리곤 하는 열등감의 늪에서 벗어날 힘을 주고, 규범적인 가치판단 체계를 통해서밖에 볼 수 없었던 몸의 많은 부분을 다르게 볼 힘을 준다. 스스로 가장 싫어하던 내 몸의 어떤 부분을 아껴주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몸은 전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몸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어떠한 해석 체계로 인식되느냐에 따라 그 감각과 의미가 끝없이 변한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며 나의 몸이 이전과 달라지는 걸 느끼고 있고, 그 모든 과정이 아주 생경하고 즐겁다.


퀴어한 친밀성을 나누는 관계는 이 사회의 섹슈얼리티-젠더 규범에 대항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애초부터 규범적인 섹슈얼리티-젠더 규범에 맞지 않으며, 그 규범을 쫓는 것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非)트랜스여성/남성의 몸과 경험과 서사에 가까워져야만 여성/남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반하여, 여성/남성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촘촘한 규범에 반하여, 어떠한 몸이 적절하고 매력적인 몸인지에 대한 기준에 반하여, 우리는 우리만의 참조체계를 만들며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이어나간다.


우리가 관계를 잘 만들어나간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냉혹한 시선과 사회적 제약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파트너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지점은, 우리가 바로 사회적 제약과 규범에 대해 함께 대응하고 싸우면서 생존을 도모하는 동지적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에게 무례하게 말을 얹는 사람들에게 대응한다. ‘여잔 줄 알았는데 남자네’라고 나에게 말하는 사람 앞에서, 그는 나와 함께 화를 내고 사과를 받아낸다. 그와 함께 나는 치마를 입고 바이크를 타고, 그는 나와 함께 바지정장을 입고 바이크를 탄다. 아직 우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을 만나러 가는 서로에게 힘을 주고,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고, 돌아오는 서로를 마중한다. 우리는 함께 트랜스로서 막막한 삶을 나누고, 그럼에도 오래 함께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더 이상 나의 몸은 촘촘한 섹슈얼리티와 젠더 위계 내부의 한 위치에 고정되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몸이 아니다. 내 몸은 그 체계와 거리 두거나 싸우면서 내 몸에 씌워진 의미를 거부하고 다른 의미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유동적인 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퀴어한 관계는 나와 타인의 몸과 젠더, 섹슈얼리티를 다르게 인식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는 어떤 관계다. 나는 앞으로 내 삶에서 그런 관계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고, 이 사회가 함께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참고 자료] Brown, N. R. (2009). “’I'm in Transition Too’: Sexual Identity Renegotiation in Sexual-Minority Women's Relationships with Transsexual Men”. International Journal of Sexual Health, 21(1), 61-77.

Goodmark, L. (2013). “Transgender people, intimate partner abuse, and the legal system”. Harv. CR-CLL Rev, 48,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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