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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 이후의 삶> 나는 친족 아동 성폭력 ‘생존자’다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본 기획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편집자 주]
얼마 전,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동생은 이렇게 내게 말한다.
“언니, 내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언니에게 ‘언니가 반항하지 않아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한 말이, 가해자와 같다고 한 것, 내가 죽기 전에 말해주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해. 이 집안에서 나 한 사람이라도 언니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언니! 우리도 남들처럼 사이좋은 자매로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도 또 화해하며 즐겁게 지내자.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게.”
꿈속에서의 여동생은 생전 보지 못했던 환한 얼굴로 내게 재잘재잘 수다스럽게 말한다. 나는 그런 여동생이 이미 병으로 죽은 줄도 알고, 꿈인 것도 알고 있었다. 수다쟁이같이 말을 쏟아내는 여동생의 얼굴이 너무 아깝고 소중해 통곡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아침이 다가온 것을 보고도 다시 또 엎드려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꿈에서라도 이렇게 만났다는 것이 더 꿈같았다.
▲ 나는 친족 아동 성폭력 생존자다. 아빠라는 가해자에게 8살 이후 10년간 성폭력을 겪었다. (일러스트 제작: 두두사띠) |
아빠로부터 성폭력을 겪는다는 것
나는 친족 아동 성폭력 생존자다. 아빠라는 가해자에게 8살 이후부터 10년간 성폭력을 겪었다. 엄마라는 가해자는 처음부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내게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했고, 종교적 이유를 대며 용서를 강요했다. 엄마는 나에게 네가 불행한 것은 부모를 용서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 가해자는 동생들을 다 두고 자기가 떠나버릴 수 있다고 나를 협박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엄마가 떠나버린 후 감당해야 할 어두운 밤이 생각나 너무 무서웠다.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도록 여러모로 내 힘껏 애쓰고 어떻게든 말을 잘 들어야 했다. 같은 여자이고 내겐 엄마가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녀의 맘을 상하게 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된 나는 그런 엄마를 떠났다. 혹시라도 내 딸까지 희생당할까 싶어 아예 왕래를 끊었다. 그래도 여동생에게는 연락을 계속했다. 나와 같이 어려운 집안에서 함께 커왔기에 나를 알아주리라 믿었다. 동생은 나보고 너무 순하고 착한 언니라고 했었다. 책도 많이 보고 4형제 중에 공부도 제일 잘하는데, 왜 늘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동생이다. 그런 여동생이 병들어 죽기 전, 내가 겪은 일들을 전했다. 아빠 가해자의 악행을 견딘 이유는 혹시라도 너까지 그 일을 겪을까 싶어 계속 참았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내 말을 듣고 “언니가 반항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긴 거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평생 겪은 셀 수 없는 폭력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집안에서 나 하나만 침묵하면 된다면 다 감내할 수 있겠노라 생각했던 가족의 비밀. 그걸 털어놓게 된 것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내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아주 오랜 친구도, 내 불행을 듣고 ‘자신의 딸을 단속해야 하고 남편을 의심해야 해서 괴롭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나는 ‘내가 너무 불행해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거리를 두던 때였다. 그런데 동생까지‧…
그동안 딸아이의 엄마로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감당하려 애를 썼는데, 다시 죽고 싶어졌다. 스스로 처음 상담사를 찾아갔다.
전문가라면, 나에게 뭐라 말해줄까? 하늘을 향해 나만의 부모가 아니라 동생들의 부모이니 도리어 내가 먼저 용서를 하려고 했다고 하면 믿어줄까? 상담사도 여동생처럼 내게 바보 같은 선택을 해왔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제는 똑똑해지는 법을 알게 해달라 부탁해야겠다.
엄마를 닮지 않는 것이 내 인생 목표였다고도 할 것이다. 부모의 학대를 받아 사랑을 모르니, 내가 제대로 딸을 키울 수 없을까 싶어 두려웠다 할 것이다. 딸을 두고 달리는 찻길로 뛰어들고 싶었다고 고백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어린애가 아니라 엄마라는 것을 따끔하게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자라오는 동안 내 주변에 믿을 만한 어른이 한 명도 없어서,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고 누굴 믿고 살아온 적도 없으나, 전문가의 조언만큼은 따라보겠다고.
‘어른’이 해준 말, 분노하라
상담사는 내게 분노하라 했다. 하늘에게도 따지라 했다. 그리고 눈물도 없이 마른 감정으로 말하는 나 대신 많이 우셨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 나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하는 말을 다 믿고 우시냐 되물었다. 그러자 학대를 학대인 줄 모르는 나 때문에 운다고 말씀하셨다.
내 주변 사람들이 하던 말과는 다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심 놀라기도 하면서, ‘어른’의 말이라 믿고 그대로 따라 살아보고자 했다. 덕분에 그분의 눈물로, 나 대신 분노해 준 언어로, 나는 잠잠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후, 나와 같은 피해를 겪은 생존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알고 싶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작은 말하기’라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을 찾았다. 그곳에서 모임을 하는 동안 나 외에 다른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리고 맘 고운 이들이 너무나 많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를 보고 울어준 어른이 먼저 있었던 덕에, 나는 그 힘으로 이들과 함께 울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날 밤에는 잠들면 끝을 알 수 없는 악몽을 꾸었다.
우리들은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마음결을 알기에, 무슨 뜻인지 고통으로 알았다. 그러면서도 ‘생존자답게 죽지 말고 자연사하자’고 다짐의 말을 했다. 언젠가 우리 말이 울려 퍼지길 상상하며 웃기도 했다. 좁은 공간에서 천장 벽까지 차오르는 눈물의 말과 알리고 싶은 우리의 말들. 나만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액션 공폐단단’에서 거리와 지하철, 쇼핑몰 등에서 피켓을 들고 플래시몹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 촬영: 혜영,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
가해자 처벌은커녕 피해자 탓하는 사회
여동생은 병들어 죽기 직전까지도 나를 보고 싶어했다. 동생은 먼 이국땅에 있었기에, 어릴 때처럼 언니의 간병을 받고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어했다. 하지만 동생을 만나려다가는 가해자 부모들과 연결될 수도 있었고, 또 나는 혼자 키우는 딸이 있기에 가장으로 하루하루를 벅차게 살고 있었다.
아픈 여동생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을 때, 대화 중 여동생은 자신이 내게 어떤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자기가 던진 말 때문에 마음이 아파 상담을 받는 것도 알지 못했고, 가해자들로 인해 엄청난 악몽에 시달리며 어떻게 하루를 견디는지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부모의 폭력이 너무 무서워 그들이 사는 동네조차 스쳐 지나가지 못하는 나의 두려움도 모른 척했다.
나는 동생이 내게 말한 “반항하지 않아서”라는 말이 가해자와 같은 말인데,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을 기억조차 못하니 우선 사과하라 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해서, 동생이 말한 증거를 보여주니 그제야 “미안헤”라는 오타로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예전의 언니를 찾는 아픈 아이에게, 그것도 죽음을 앞에 둔 그 아이에게 사과의 글을 받고 또 울기만 했다. 어떤 영화나 소설, 내가 들었던 인생 이야기 등에 곧잘 등장하는 용서는 그리 쉬워보이는데, 나만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에 울고 또 울었다. 얼마 뒤 여동생은 죽었다. 나는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용서를 하지 못하는, 세상 못난 언니이자 나쁜 사람이 되었다.
도대체 왜 부모의 가해를 가족에게 말하면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나뿐 아니라 나를 닮은 우리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은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는커녕,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 대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벌 받은 듯했다. 단지 가족이라서?
성폭력 범죄는 가해자 잘못이 백 퍼센트라 하는데, 가족 안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용서’의 재료와 ‘기억상실’의 구실이 된다. 나 또한 가해자의 극심한 학대와 폭력을 ‘해리 장애’로 인해 상당한 부분을 잊고 살아왔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잘못했다. 가해자들의 죄를 잊은 듯 살아왔던 것이 잘못이고, 애초에 이 나라와 이 시대에 태어나 매우 불행한 것이 잘못이었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국민청원을 하다
이런 현실을 뒤집으려면, 성범죄가 온전히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그 때를 기다렸다. 2018년 어느 날, 광화문 광장에서 미투(#MeToo)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홀로 거기에 나갔고, 발언을 했다. 그동안 친족 성폭력 피해를 견디고 나 혼자 너무 오래 기도하며 용서하려 노력해왔으나 이제는 그 이상 그럴 수 없는 범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하면 결코, 다치지 않는다 말하며 연대하자 외쳤다. 그러나 그해 언론에서는 친족 성폭력이 ‘미투의 사각지대’라 했다.
▲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액션 공폐단단’ 기획단이 피켓을 제작하는 모습. 행진과 플래시몹 등에 참여하며 나는 직접 쓴 시를 인용해 발언하기도 했다. (푸른나비 제공사진) |
이듬해인 2019년 6월, 나는 국민청원이란 이름으로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폐지하라’고 국가에 호소하기로 했다.(현재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는 10년이다.) 우리 자조 모임 외에도 다른 생존자들과 뜻을 합하고, 단체 활동가들의 숨은 조력으로 4,512명의 동의를 얻었다. 이제 내게 이 청원에 동의해준 모든 이가 내 편이자, 우리들의 ‘어른’이었다. 국민청원을 계기로, 언론사 인터뷰를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해서 진행했고, 앞으로도 계속 연대하는 생존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알렸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액션 공폐단단’ 활동을 하면서, 2019년에는 강간죄 개정을 위한 페미시국 광장에서도 발언을 했다. 나는 동생의 말을 예로 들어 호소했다.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죄를 인정하고, 나와 같이 반항하지 않으면 강간죄가 되지 않는 현 사법체계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강간죄 법 개정을 촉구했다.
2020년에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끼리 마음을 모아, 크라우딩 펀딩을 통해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로 하고, 나도 저자로 함께 참여했다. 우리가 겪은 일을 이제는 세상이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세상에 말을 걸었다. 나에겐 주어진 일은 단 하나. 말하기. 누군가 단 한 사람의 마음에 닿기만 하면 되는 그런, 말하기이다. 공포와 폭력의 기억이 스며든 내 몸 세포와 세포 사이를 갈라 꺼내어 말할 수 있는 용기만이 필요하다.
나는 울면서 싸우는 존엄한 ‘생존자’다
지난겨울, 어린 나이의 내가 떠올랐다. 어느 더 추웠던 겨울날, 시리도록 벗겨진 어린 나의 하체가 눈에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불붙는 마음의 분노를 끌어안고. 그 분노를 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함부로 터트리지 않도록 숨죽이며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그러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어 불현듯 국회 앞으로 나갔다. 거기서 5일 동안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1인시위를 했다. 그때도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닮은 생존자들과 우리를 지지해주는 분들이 연대해주었다. 악몽은 반복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이제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고마웠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 모두 다들 어떻게 이런 기억들을 안고 살아왔는지, 살아있음이 너무 고마웠다.
한때 나는 ‘생존자’란 이름이 너무 무겁고, 죽다 살아온 것처럼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이 떠오를 때면, 햇살 아래에서도 홀로 얼어붙어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을 보았다. 한여름 무더위보다 더 미칠 것 같은 마음속 전쟁을 치렀다. 그럴 때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이라, 내가 숨이라도 쉬게 해달라고 신이 아닌 내 주위 공기에게 부탁했다. 떠오르는 고통보다 질긴 내 생명력을 확인할 때마다, 꼭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냐 통곡하며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국회 앞 1인시위 이후, 잠잠해진 나를 깨우듯 내 동생은 그렇게 웃으며 꿈속에서 찾아왔다. 내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꿈이었다. 사과하라고 말해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동생의 얼굴이 나를 향한 햇살 같았다. 내가 살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죽은 내 동생은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 국회 앞으로 가서 친족 성폭력 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며 1인시위를 했을 때. (푸른나비 제공사진) |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 꿈을 꾼다. 앞산의 나무 이파리가 춤추듯 날아오르고,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바다가 펼쳐지고, 우리 함께 살아서 만나 너무 반갑다 인사를 전한다. 물이 넘쳐 물고기같이 자유롭게, 바람처럼 호흡하며 푸른 하늘이 나인지, 푸른 나비가 하늘인지 모르도록. 그렇게 기다리며 나는 또 나와 닮은 이들을 만나길 꿈꾼다.
요즘엔 매월 마지막 토요일, 광화문 광장 사거리에서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위한 1인시위를 생존자들과 함께 진행한다. 나는 “울면서 싸우는 존엄한 생존자 그렇게 꿈을 꾸는 푸른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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