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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간 오해 전문가들”이 무용극을 통해 전달하는 것

여성 다국적 안무 트리오 ‘타초틴타’ 인터뷰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어느 날, 매일 지나는 소극장 앞에 새로운 포스터가 붙은 것을 발견했다. 한 검은 머리 여자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쌀을 맞고 있는 사진에 “Cultural Drag”라는 타이틀이 써 있었다. ‘이 공연장에서 드랙쇼도 하나?’ 의아하고 궁금한 마음에, 당장 티켓을 예매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마스크를 쓰고 객석에 앉았고, 여성 다국적 안무 트리오 타초틴타(Tacho Tinta)를 만났다.


퀼른에 있는 아뜰리에 단지 ‘Quartier am Hafen’에서 인터뷰한 댄스컴퍼니 타초틴타. 왼쪽부터 미진, 슬기, 실비아. 사진촬영을 예고했음에도 세 사람은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름다운 여성 무용수’라는 코르셋을 입지 않는 자유로운 아티스트들. (사진 촬영: 하리타)


그날 본 공연 <컬쳐럴 드랙>(Cultural Drag)(트레일러: https://vimeo.com/461570379)은 예상과 달리 현대무용극이었다. 알듯 말듯 시종일관 난해하지만 또 그 모호하고 비범함 때문에 좋아했던 다른 현대무용과 다르다는 점에서, 또 예상을 빗나갔다. 여기서는 4명의 ‘드랙퀸’(Drag queen)이 등장해 익숙한 옷과 소품을 입고 익숙한 동작들을 보여줬다. 어디서나 들려오던 인기 라틴 팝이 흘러나오고, 영화에서 흔히 본 살사와 삼바춤이 펼쳐진다. 어느새 동양 전통음악으로 바뀌고 댄서들이 쿵푸팬더처럼 싸우는 시늉을 한다. 케이팝 칼군무도 등장했다. 무용수들은 진지한 얼굴로 어지러운 변신을 계속 태연하게 해냈다.


댄서들의 대사는 전혀 없었지만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이 음악을 들으면 이런 춤이 자동으로 떠오르지? 우리가 그대로 보여줄게”, “내가 중국이나 일본 여자라고 생각했지? 그럼 이 춤을 보여주지. 여행 다큐에서 봤을 거야.” 맞다, 이들은 일부러 과장해서 재현하고 있었다. 특정 인종이나 국가, 대중문화, 유행과 결부된 흔한 이미지들을. 온갖 클리셰가 서로 뒤섞여 눈앞에 쏟아지면 익숙하니까 지루할 것 같은데,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요 트렌드였던 ‘미러링’(mirroring)도 생각났다.


현대무용과 드랙쇼를 섞어버리고, 다양한 피부색과 성별의 무용수들이 무지개 퀴어 코드를 흔들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안내서에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인종차별 경험이 자신들을 문화와 정체성, 트랜스컬쳐럴리즘(transculturalism)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런 시공간을 창조한 이들과 ‘월경(越境) 만남’을 하고 싶어졌다.


댄스컴퍼니 타초틴타(Tacho Tinta)는 2015년 퀼른 음악무용학교에서 실비아 두아르테(Silvia Ehnis Perez Duarte), 황슬기, 김미진 세 사람이 뭉쳐 만들었다. 타초틴타는 스페인어로, 맥락에 따라 ‘빨간 택시’ ‘쓰레기통’ ‘인형’ 등 다양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춤을 통해 변화무쌍한 삶을 표현하며 유연하게 살고 싶은 멤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하리타: 드랙쇼는 보통 하위문화(sub-culture)로 간주되는 퀴어씬의 문화콘텐츠인데요, 이걸 퀴어 클럽이 아닌 극장에서 보게 되어 신선했어요. 드랙쇼를 현대무용에 차용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실비아: 2년 전, 한 레지던시에 타초틴타가 입주 아티스트로 선발된 적 있어요. 독일 북부 플라우젠(Flausen)에서 한달 간 리서치에 전념하는 프로그램이었죠. 그 때 지원서에 쓴 주제가 “멕시코 사람 하나와 아시아인 두 명은 왜 바닥에 함께 앉아있나?”라는 질문이었어요. 그게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흔한 프레임이라, 여기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고 지원서에 쓴 거죠. 사실 사람들이 저를 ‘멕시코 사람’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보면, 이를 역이용해서 조금 더, 혹은 덜 멕시코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 있어요. 이런 얘기를 동료 무용수한테 했더니, 그가 퀴어 이론에 비슷한 논의가 있다고 했어요. 남, 녀 성별만 존재하는 건 이분법적 흑백사고이고, 성 정체성을 양 끝에 남-녀가 있는 ‘스펙트럼’으로 봐야 된다고. 그 대화에서 드랙쇼처럼 공연을 꾸며보자는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실제로 몇몇 장면에선 제가 멕시코인의 정체성을 최대로 과장하며 춤을 춰요.


지난 해 9월 말 프라이부르크에서 초연한 현대무용극 <컬쳐럴 드랙>의 한 장면. 탈의실처럼 꾸며진 무대 뒤편에 무지개 빛깔로 옷들이 걸려있고 4명의 무용수는 수십 가지 다른 캐릭터가 되어 다채로운 움직임을 소화한다. 6군데 공연이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4곳으로 줄고 객석도 줄었다. (사진 촬영: Robin Junicke)


하리타: <컬쳐럴 드랙>에 담고자 한 메시지를 간단히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미진: ‘당신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가 되고자 하는가’에 대한 작품이에요.


슬기: 큰 주제는 문화와 다양성이었지만, 리서치와 안무 과정에서 자아 정체성에 대해 배운 게 많아요. 우리는 사실 어떤 문화를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더라고요. 가령, 제가 멕시코 출신인 실비아와 어울리면서 멕시코 문화를 내면화할 수도 있는 거죠.


미진: 맞아요. 정체성에 대한 얘기. 제가 독일에 산 지 8년이 되었는데, 한국에 가면 주변에서 ‘독일사람 다 됐다’고 해요. 하지만 독일에서는 전 지금도 철저히 아시아 사람이거든요. (그런 괴리를 겪으며) 출신 문화나 인종, 국적을 떠나 내가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정체성은 없는지 고민했어요.


슬기: 그렇게 모든 사람이 ‘내 정체성은 내가 능동적으로 만들어간다’고 사고하면 어떨까 상상해봤어요. 그렇다면 ‘니하오 캣콜링’으로 외국인을 찍어누르지도 않을 테고, 친숙하다고 해서 백인들끼리만 얘기하지도 않겠죠.


니하오 캣콜링(Catcalling)이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동아시아인 외모(중국사람으로 짐작되는)를 지닌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추근덕대며 성희롱하거나 조롱조로 ‘니하오’라고 말 거는 행위. 백인 다수의 독일에서 비백인을 무분별하게 이방인/타자/외국인으로 구별하고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차별 행위다.


하리타: 어디서 나고 자랐느냐가 우리의 모습과 사고의 바탕인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게 속박이기도 하죠. 우리 모두 문화적 편견의 실행자이자 피해자랄까요. 그런데 지금 모습이 고정된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정체성을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좀 숨통이 트입니다. 공연 말미에 나오는 내레이션 “We're all born naked and the rest is drag”(우리는 모두 알몸으로 태어난다. 나머지는 드랙이다)라는 말이 굉장히 와 닿아서 나중에 찾아봤어요. 미국의 드랙퀸 아티스트인 루폴(RuPaul Andre Charles)이 한 유명한 말이더라고요. 중간에 케이팝도 등장했는데, 무슨 곡인가요?


슬기: 마마무의 ‘힙(HIP)’이에요. 동시대 대표적인 한국 문화를 꼽자니 케이팝이고, 멕시코에선 살사가 일상적이고… 그런 식으로 안무에 쓸 문화적 요소에 대한 리스트가 있었어요. 리서치 차원에서 제가 좋아하는 안무가 리아킴이 안무한 ‘힙’을 골라서 커버 댄스를 춰보자고 했는데, 다들 마음에 들어했어요. 그 모습이 담긴 영상을 재미로 소셜미디어에 올리니까 반응이 좋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사와 안무가 예쁘다기보단 멋있었고, ‘난 힙해’라고 외치는 힙스터의 얘기니까 드랙쇼 컨셉트와도 묘하게 잘 맞는 거죠.


하리타: ‘안무 트리오 타초틴타’는 2015년 실비아의 제안으로 퀼른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음악무용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고 팀을 꾸리기까지 일종의 ‘발견’ 과정이 있었을 텐데, 어땠나요?


실비아: 학교에서 슬기, 미진과 ‘젊은 안무가’(Junger Choreograf)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처음부터 셋이었던 것은 아니고 여러 명이 들어왔다 나가고, 뭉치고 흩어진 끝에 지금 모습이 된 거예요. 저한테 첫 번째 댄스컴퍼니 활동인데, 사실 전에도 컴퍼니를 만들려고 했지만 멤버들이 주인의식이 없어서 결성하고도 추진이 잘 안된 적도 있고, 멕시코에서는 그룹을 결성해 작업했지만 결과물이 영 별로였던 적도 있어요. 이른바 ‘케미’가 잘 맞아야 하고, 춤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재밌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슬기, 미진을 잘 만났어요. 슬기의 에너지는 먼 어둠 속에 있는 빛 같아요. 거세게 폭발하는 힘은 아니지만 그 흰 빛줄기 같은 게 사람을 끌어당겨요. 미진은 그 반대. 밖으로 찢고 나오는 에너지를 가졌어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표현력이 뛰어났어요.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았고, 단순히 춤이 아니라 몸으로 작업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였어요. 기교가 뛰어난데 알맹이가 없는 사람들도 사실 많거든요.


타초틴타가 <컬쳐럴 드랙> 작품을 구상하던 레시던시 생활 중에 찍은 사진. 드랙 요소 중 하나인 메이크업을 실험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를 각자 얼굴에 반반씩 표현해보았다. (사진 촬영: Tacho Tinta)


미진: 실비아는 학교생활을 똑 부러지게 하는 모범생이었고, 저는 당시에 되게 게을렀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유학을 왔는데, 나아갈 방향과 자리를 정해주는 한국 시스템과 달리 여기서는 다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했어요. 무용에 대하는 관점, 학교 시스템, 의사소통방식까지 너무나 새로워서 한 3-4년 되게 힘들었어요. 혼란이 컸고, 내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에 반해 실비아는 주관이 뚜렷했고, 또 언니들과 같이 하면서 배우는 게 많았어요.


슬기: 실비아는 입학 당시부터 목표가 뚜렷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댄스 컴퍼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졸업 후 안정된 곳에 취직하려고 했어요. 한국 출신 무용수들이 흔히 갖고 있는 억압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억압에서 놓여나는 과정이 독일 학교생활이었고, 실비아와의 공동작업도 그런 면에서 저를 이끌어준 셈이에요. 실비아는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할 뿐 아니라, 눈빛이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라 생각해요. 미진이는 실비아 말처럼 에너지가 많은 댄서죠. 그 에너지를 가지고, 보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다가가고 오래 기억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하리타: 세 사람은 각각 독일에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미진: 대구에서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설득해 독일로 왔어요. 온전히 제 선택이었지만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어요. 그때까지 예쁘게 보여야 하고 테크닉이 화려한 게 잘하는 것인, 일반화된 미의 관점으로만 춤을 배웠으니까. 더구나 저희가 다녔던 ZZT(Zentrum für Zeitgenössischen Tanz; 퀼른 음악무용대학교 현대무용센터)는 현대무용학교라서 개인이 가진 색과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게 수업 목표였어요. 왜? 라는 물음이 항상 굉장히 중요해서 ‘왜 이런 움직임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고자 하는가?’ ‘이 표현은 어떤 생각을 통해 나왔나?’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는데 처음에 너무 힘들었어요. 움직임에 사고를 더하는 법, 예술적 표현에 나만의 의미를 만드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죠.


슬기: 저는 원래 한국무용으로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재수를 했어요. 결과가 안 좋았고, 좌절감에 한국무용을 관두기로 하고 독일행을 택했죠. 초심으로 돌아갔지만, 독일 대학들에도 암묵적으로 나이제한이 있어서 입시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요. 그 와중에 ZZT는 제한 없이 열려있다는 것을 알고 무작정 시험부터 봤어요. 바닥에서 구르기 같은 플로어 테크닉부터 발레 과목까지, 준비를 제대로 못했지만 시험에 임했고, 운 좋게 붙었어요.


실비아: 멕시코에서 발레를 전공했고요, 독일행을 결정했을 때 28살이었어요. 무용 유학을 가기에 늦은 나이라서 석사과정에도 몇 군데 지원했어요. 드레스덴 대학교 무용교육 석사과정과 이곳 무용 학사에 동시 합격했는데, 전혀 망설임 없이 학사를 택했어요. 몇 년 더 늦어져도 아무 상관없었어요. 결국엔 춤추는 게 좋았으니까.


하리타: ‘문화간 오해 전문가들’(Expertinnen in interkulturelle Missverständnisse)이라고 웹사이트에 소개해두었는데, 무슨 뜻인가요? 일상에서 어떤 오해를 경험하는지도 궁금해요.


실비아: 독일에 온 뒤로 포옹 문화에서 차이를 느껴요. 멕시코에서는 가족이나 친구들 간에 매일 포옹을 나누며 인사하거든요. 매일 보는 사이라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포옹.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를 마주쳐서도 서로 안아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진 안 하니까, 사람들이 어느 날 포옹을 안 하고 지나치면 지금도 나한테 화 난 거 있나? 무슨 오해가 있나? 걱정부터 돼요.


하리타: 인사에 관한 예로, 독일에서 사람들이 저한테는 고개를 숙이거나 악수만 청할 때도 있어요. ‘아시아 사람들은 포옹에 익숙하지 않다’라는 가정에서 그러는 거예요. 제 외모만 보고 ‘아시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사실 어림짐작이죠. 지금 독일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문화적 선입견이 앞서는 건데, 이런 선입견이 다른 편견이나 인종주의와 결합되면 차별이 되지요.


슬기: <컬쳐럴 드랙>에서 ‘니하오’,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와요. 평소에 무수히 겪는 ‘니하오 캣콜링’을 생각하며 썼는데, 그것도 문화간 오해 상황이죠. 얼마 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남녀일행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 저를 보고 “다가오지마, 코로나!”라고 하는 거예요. 순간 화가 치솟아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난 한국사람이고 한국에 갔다 온 지도 오래됐다”고 항의했어요. 알고 보니까 영어도 독일어도 잘 못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울분을 토하는 절 보고 그냥 웃더라고요. 종일 기분이 안 좋았어요. 독일에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처음에는 그냥 넘겼지만 이제는 바로 대응하게 돼요.


미진: 타초틴타 활동 중에도 (문화적 오해로 인한) 불편한 상황이 있어요. 우리 셋이 같이 활동을 하지만, 공연 관계자와 소통할 때는 실비아가 앞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요. 실비아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이 친구랑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실비아도 멕시코 출신이니까 사실 외국인이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거든요. 유럽인인줄 알죠. 이런 상황을 불편하게 느꼈는지, 실비아가 먼저 이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슬기: 우리(한국인 멤버)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이라고 느낀 것 같아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비아가 이메일 업무 같이 대외적인 소통을 많이 맡았던 게 사실이고, 외모나 이름부터가 이곳 사람들에게 친숙하니까. 저랑 미진이 이름은 소개해도 사람들이 기억하고 부르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게 신경이 쓰이긴 하죠. 이름을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거나, 한번도 안 부르는 사람에 대해선 서운함을 느껴요.


보훔(Bochum)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열린 ‘Re:Moment in Bochum’ 페스티벌에 참가 중인 타초틴타. 보훔은 산업화 시대 독일 경제를 이끌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한 루어게비트(Ruhrgebiet)에 속한 도시이다. 이 지역은 지금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인구밀집지대로, 문화예술 도시로 새롭게 번성하고자 다양한 공간재생 프로젝트 및 예술가 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세 사람의 근거지인 퀼른(Koeln)도 인근에 위치해있다.


하리타: 다국적으로 구성된 그룹들이 자주 겪는 문제죠. 그룹에서 주류가 아닌 사람은 소위 ‘이국적인’ 외모나 언어 장벽을 비롯해서 여러 선입견들을 먼저 깨야 동등한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는데, 그 기회가 아예 없을 때도 많아요. 세 분이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게 참 좋아 보여요.


슬기: 평소에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나누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 편이에요. 미진과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하긴 하죠. 평소 한 명이라도 불편하게 느낀 것,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임을 소집해서 다 털어놔요. 안에 담고 있지 못하는 성향인 제가 특히 그런 자리를 많이 만들어요. 그게 우리 트리오의 강점인 것 같아요. 진솔한 대화.


실비아: 사람들과 대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저한테 더 많은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소통 역할을 자처해서 맡게 되고요. 그렇다 해도, 비유럽인도 스포트라이트를 똑같이 받는 게 맞죠. 우리는 출신지와 상관없이 ‘우리’인데, 그걸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게 하는 게 어려워요.

 

미진: 최근 옆 도시에 있는 극장과 협업을 했는데, 거기 극장은 디렉터가 헝가리 출신이고 직원들도 다국적이었어요. 극장 슬로건도 다문화를 표방하고. 거기서 우리 그룹을 많이 지원해줬거든요. 그 분들은 대화할 때 우리 세 사람 모두와 골고루 눈을 맞추고 관심을 기울였어요. 이름도 다 기억하더고요.


하리타: 맞아요.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인 곳은 소통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특히 리더가 외국인/소수자의 감각을 지녔을 때. 결국 일상문화는 앎이라기보다 느낌, 감수성의 문제니까요. 활동 초기에 비해 지금은 타초틴타가 어느 정도 입지가 생겼을 것 같아요. 그동안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슬기: 처음엔 우리 모두 학생이었고, 졸업 후 활동에 전념한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초반엔 페스티벌이나 대회에 초대받지 않은 상황에서도 무작정 작품을 만들어 여기저기 지원했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좌절하고요.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그 돈을 페스티벌이나 대회 나가는데 투자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해진 건 분명해요.


실비아: 가족 같은 친숙함이 때로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해요.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고, 아는 만큼 기대하니까. (그런 기대치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는 게 가끔은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 저는 소외감을 느껴요. 한계에 부딪친 느낌도 들고. 하지만 당연한 일이고,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죠. 공동 작업 후에 항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다음 프로젝트 때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만나려고 노력하고요.


하리타: 세 분은 강사로서 최근에 워크숍도 진행한 걸로 알고 있어요. 어떤 워크숍이었나요? 무대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실비아: 이주난민 연대 플랫폼인 ‘Silent University Ruhr’에서 주최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왔어요. 원래 12명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고, 정체성 탐구를 주제로 ‘타인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되고자 하는 나’를 혼합한 상을 간단한 몸동작으로 표현해보는 수업을 준비했어요. 막상 워크숍은 망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각과 전혀 다르게 되어버렸어요. 늦게 온 사람, 아이를 데려와서 정신 없는 사람들이 많았죠. 결국 제대로 참여한 건 너댓 명뿐이었는데, 대부분 독일어에 아직 서툰 이주민 여성들이라 소통이 잘 안됐어요.


참가자들에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본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외국어 문제가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전형적인 서구식 사고였던 거예요. 정체성을 그렇게 나와 타인의 시선으로 나눠서 본다는 것 자체가. 결국 이렇게 진행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춤으로 바로 넘어갔어요. 그 때는 ‘안무’는 모두가 따라 추는 춤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는 설명이 필요했어요.


조금씩 고정관념을 깨면서 참가자들이 드디어 조금씩 움직이더니 ‘스포츠보다 낫다’, ‘10대들이 왜 춤을 좋아하는지 알겠다’고 했어요. 어떤 분이 영상을 찍으려고 하니까 몇몇 무슬림 참가자들이 막 다급하게 반대했어요. 자기들 나라에서는 춤추는 동영상을 찍으면 매춘부 취급을 받는다면서, ‘개인정보보호’(Datenschutz)라는 단어를 급히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내밀더라고요. 여기선 일상화된 춤이 다른 데선 전혀 다른 개념일 수 있다는 걸 그때 또 깨달았죠. 팝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춤들, 이른바 ‘섹시댄스’같은 것도 춰보면서 그분들은 새롭다고 좋아했어요. 아랍권 포크댄스만 많이 춘대요.


하리타: 저도 무슬림 여성들이 다수인 이주여성모임에서 나갈 때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연말파티 격으로 모였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으니까 커튼을 탁 치고 휴대폰으로 아랍 팝을 트는 거예요. 그제야 다들 히잡을 벗어던지고 편하게 춤 췄어요. 그녀들에겐 춤이 친밀한 사람들끼리만 즐기는 놀이이고, 그래서 해방적인 경험인가 봐요. 물론 공공장소에서 일종의 시위로써 춤추고 영상을 올리는 여성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실비아: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 여성들이 억압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서구사회의 개념일 뿐. 그 때 워크숍 참가자들이 색다른 체험을 했다는 게 뿌듯했지만, 사실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발상도 서구식 세계관, 하나의 관점일 뿐이에요.


독일 북부의 한 해변에서 ‘리서치’를 하는 모습. 무용수에게 리서치란 어떤 주제나 개념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몸동작과 움직임을 실험해보는 것도 포함된다.


하리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근래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이 있었죠. 페미니즘의 여러 이슈들 중,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이 있나요?


실비아: 무용 씬은 사실 이상한 곳이에요. 무용수 뽑는 자리 가보면 성역할이 대체로 정해져 있어요. 남자 몇 명 여자 몇 명이 할당되어 있는 식. 성별을 기준으로 작품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일도 흔하고요. 여성 무용수가 성애화되는 것은 요즘에도 여전합니다. 또 한 가지, 무용수의 절대 다수가 여성인데, 실제 일자리는 적어서 실업 문제가 심각한 편이에요. 반면, 남성 무용수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죠. 저희가 학사과정을 같이 밟을 때도 기수에 여자 9명 남자 2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단장, 디렉터 같은 리더 자리에는 남자가 대다수 앉아있거든요. 단 2명뿐인 남자들이 거기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미진: 저는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틀에 얽매이고 싶진 않아서 어떤 사안이 ‘페미니즘 이슈’라고 나와도 사회문제, 인권문제로 보려고 노력해요. 내심 쿨하고 싶은가 봐요. 그런데 애인이나 가족 관계에서는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제가 조금이라도 여성의 성역할에 갇히는 것 같으면 과민 반응이 나와요. 남자친구가 농담으로 던진 ‘숙녀가 방귀를 그렇게 뀌냐?’같은 말에도 발끈해서 그 앞에서 더 뿡뿡 뀌어버려요.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정치 논쟁이 된 것 같기도 해요. 한국 친구들과 얘기할 때마다 분위기가 너무 민감해져서 말하기 조심스러워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에 대해서도 저는 그 사람의 무책임함, 성폭력 피해자 대한 측은지심이 먼저였는데 지인들의 입장이 다 갈리는 거예요.


슬기: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때도 친구들 의견이 다 분열 됐어요. 한국 뉴스를 많이 보는 편인데, 성폭행 피해자를 매도하는 분위기에 좌절감을 느꼈어요. 피해자는 성별을 떠나서도 일단 약자 아닌가요. 저는 평소 가사노동 분담 같은 평등 문제에 예민해요. 사실 독일에서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쿨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예요.


하리타: 여성 무용수에게 와 닿는 젠더 이슈는 무엇보다 몸이겠죠.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그로 인한 몸의 변화가 더욱 민감한 문제라고 들었어요. 세 분은 출산과 커리어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나요?


실비아: 지금 일에서 느끼는 충만함, 성취감, 사랑이 좋아요. 앞으로의 제 인생을 상상하면 그 그림에 아이는 없어요. 개, 고양이라면 몰라도. 아이를 만약에 낳는다면 육아를 전담할 다른 사람이 필요하겠죠. 다만, 50대에 일을 쉬고 싶어진다면 열세살쯤 된 손주 뻘의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어요.


미진: 지금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어요. 다만 혹시 슬기가 임신하면 그 때 같이 임신부가 무대에 서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임신과 출신이 아니더라도 이 댄서들의 몸은 항상 가능과 불가능, 안전과 위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미진은 강도 높은 연습을 하고 나면 밤새 고열과 근육통에 시달리며 악몽까지 꾼다. 부상을 조심하느라 쉴 때도 마음이 편치 않다. 슬기의 몸은 십자인대파열을 겪은 뒤 잦은 통증에 시달린다. 가장 연상인 실비아는 나이듦을 절감하며 무대에 선다. 더 이상 불가능한 움직임도 있지만 아직은 진통제를 먹으며 연습한다.


그럼에도 무용은 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주된 도구’, ‘지겹지만 막상 날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 ‘상상이 몸이라는 재료와 뒤섞이는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개인의 다름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보다 친숙한 공연을 만들고 싶어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가능성을 넓히고자 계속 몸을 움직인다.


타초틴타는 내년에는 마술사와 함께하는 공연 ‘Misdirection’을 만들 예정이다. 관객이 전혀 다른 곳을 보게 속이는 마술 트릭(Misdirection)은 비단 마술쇼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서, ‘문화간 오해’에 대한 전문성을 발휘해 우리 일상 속 트릭을 보여줄 것이다. ‘함께 춤을 추면, 불완전하고 부적합하지만 궁극적으로 익숙한 그 무언가’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으니까.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독일과 한국, 그 밖에 매일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경계인 페미니스트 작가. 이렇게 다른 경계인 여성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감이 크다. 세계 곳곳에 멋진 여자들을 오래,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독자들의 감상과 인터뷰이 추천도 늘 기다린다. haritamoonrider@gmail.com]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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