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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장’을 요청하는 재일조선인 여성의 ‘자기서사’

새로운 연결과 장소를 기다리는 재일조선인 여성의 말·글(1)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신지영(한국근현대문학과 동아시아근현대문학·사상·역사 전공.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조교수)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그저, 공백으로만 드러나는 말·글


만약 ‘우리’에게 ‘어떤 새로움’을 듣고 표현할 도구가 없다면, 그 공백을 그저 드러내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 될 수 있을까?


오래전 일이지만, 재일조선인 여성의 글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2008년 무렵 오사카 작은 단체에서 재일조선인 서클지 <진달래> 집회 뒷풀이가 열렸다. 김시종 시인도 함께했던 이 자리에서, 재일조선인 여성인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듣고 싶은 것은 여자들 이야기인데, 묻기가 겁난다.”


#김시종(1929~): 1948년 4.3 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밀항한다. 오사카 조선인 마을에 살면서 재일조선인 교육 및 정치 문화적 활동을 해 왔다. 1950년 <신오사카신문>에 첫 시가 게재되었으며, 일본문학이나 한국문학으로 회수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서정과 사상을 독자적인 시 세계에 담아낸 대표적 재일조선인 시인이다. 한국에 번역된 시집으로는 <잃어버린 계절>(창비, 2019), <아카아노시집 계기음상 화석의 여름>(b, 2019) 등이 있다. 또 평론집 <재일의 틈새에서>(돌베개, 2017), <조선과 일본에 살다>(돌베개, 2016) 등이 번역되어 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음을 배워야 하고, 글자를 배우기 전에 글쓰기에 대한 욕망부터 배워야 하는 존재들에게, ‘말·글’은 그것을 배운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수가 없다. 그 말·글은 외마디일지라도 그/녀들의 삶 전체를 통해 맺어온 관계들을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다. 그러니 그 말·글을 묻자니 (더럭) 겁부터 난다. 상상할 수 없는 무엇과 만날까 봐, ‘나’도 그/녀들의 삶과 무관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음을 깨닫게 될까 봐, 그/녀들의 말과 글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까 봐.


이처럼, 글을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녀들이 (감히) 배운 말·글을 접할 때 ‘우리’는 세 번 이상의 ‘불화(不和)’를 겪는다. 공동체의 경험과, 일인칭 ‘나’와, 익숙한 어법과 불화하는 그/녀들의 말·글. 익숙해 보이는 레퍼토리 한 토막이라고 다를 리 없다.


“나는 해방 후 오늘까지 녀맹 구와노 분회에서 일을 거들어 왔었지요. 그러나 글을 모르기 때문에 일 같은 일은 못 거들었습니다. 다만 회비나 거두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중략- / 어느 날 우리 집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모르는 글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 때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깝던지요. 나는 굳게 결심을 하였답니다. 「글을 꼭 배워야지....」 이런 굳은 결심이 어쩐지 나의 가슴을 부풀게 했습니다./ 나는 분회 성인 학교에 나갔습니다. 여덟 달 동안 하루도 쉰 날 없이 꾸준히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보』도 읽게 되고 세상사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제는 누구가 어떤 질문을 해 와도 까닥 없습니다. 그야말로 눈앞이 환히 밝아 오는 것 같습니다./ 심 봉사가 물에 빠져 죽은 딸을 만난 기쁨으로 눈이 뜨인 것과 같이 40여년 만에 나의 눈도 뜨이였습니다. 이것 역시 훌륭한 자기 조국을 갖고 현명하신 수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나는 과거의 나와 같이 글을 모르는 녀성들에게 오늘의 나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이야기하렵니다./ 정말 글을 배운 후의 나의 형편은 달라졌습니다. 생활이 한 없이 흥겹습니다.” 

(시모노세키시 녀맹 구와노 분회 김삼순(42세),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기쁨」, 『조선신보』, 1962년 11월 30일, 4면)


시모노세키시 녀맹 구와노 분회 김삼순(42세),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기쁨」, 조선신보 1962년 11월 30일. (송혜원 편저, 『재일조선여성작품집: 1945~84. 1』 10쪽)


2014년에 발간된 『재일조선여성작품집: 1945~84. 1』(송혜원 편저, 녹음서점)에 인용된 문맹에서 벗어난 기쁨을 표현하는 이 말·글은 총련계 여성조직인 녀맹 지방 분회 성인학교 소속 김삼순이 쓴 것이다. 재일조선인 여성의 경험이지만, 최근 활발하게 번역된 재일조선인 문학에도, 잘 알려진 재일조선인 여성작가의 ‘문학’에도 포함시킬 수가 없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인데, 이 글을 정착시킬 장르도, 공동체도, 언어도 불분명하다.


장르도, 공동체도, 어법도 불분명한 김삼순의 글


‘김삼순’이란 이름 석자 옆에는 그녀가 속한 조직의 자세한 명칭뿐 아니라 ‘42’라고 나이가 노출되어 있어서 『조선신보』의 기사나 독자투고 같기도 하다. 김삼순의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보면, 글을 몰라 “일 같은 일”은 하지 못했던 울분과 소외감, 아이에게 글을 알려 줄 수 없는 부끄러움과 안타까움, 글을 배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가슴을 부풀게”했다는 기대, 여덟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 문해능력을 획득하자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오는 것 같”다는 변화, 문해가 가능한 생활의 기쁨 등이 느껴져 글쓰기를 배우고 쓴 첫 글처럼 보인다.


한편 김삼순이 속한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면, 이 글은 재일조선인 여성 1세의 구술로도 읽힌다. 이 구술에는 아시아의 뜨거운 냉전을 배경으로 재일조선인 사회를 양분한 총련과 민단의 갈등, 김삼순이 총련계 여성조직에서 처음 글을 배웠기 때문에 그곳의 사상과 글자를 함께 습득하게 된 흔적이 거대 역사와는 다른 말로 적혀 있다.


다시 여성에 방점을 찍고 읽으면, 대표적인 ‘딸 파는 아버지’ 스토리인 「심청전」을 전유하고 변형시킨 대항서사로도 읽힌다. 문해능력을 획득하자, 김삼순은 팔려가는 ‘딸’의 위치가 아니라 눈을 뜬 심봉사의 위치에 자신을 놓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글은 기사이며 문학이며 구술이며 대항서사인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니다.


재일조선인 여성의 노동이란 측면에서 읽어보면, 눈길을 끄는 것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일 같은 일은 못 거들었”다는 토로다. 일 같은 일은 못했다는 말은 가사와 육아, 온갖 잡다한 부업(막걸리 제조, 가축 키우기, 텃밭채소 장사, 막노동), 이에 더해 총련계 재일조선인 단체 부인회의 ‘공동체 일’(Community-work)을 평생 해온 경험을 드러낸다.(권숙인,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재일한인 1세 여성의 노동 경험과 그 의미」, 『재일 한인 1세들의 공간, 노동, 젠더: 일과 생활세계』, 김백영, 정진성, 권숙인 지음, 한울, 2020년, 190-191쪽)


임금은커녕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 노동은 재일조선인 여성의 것이면서, 식민지기 강제동원당한 남편을 찾아간 아내의 것이면서, 정신대(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원된 태평양전쟁 지원 조직으로, 일제점령기 주로 군수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을 칭함)의 것이면서, ‘위안부’의 것이며, 독립운동가 여성의 것이며, 엘리트 여성의 것이며, 그 모든 상태의 ‘여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넘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현재의 모든 존재들에게 연결된다. 본성화된 ‘여성’을 거부하되, ‘여성’이 놓여있는 상태를 통해 다른 보이지 않는 존재와 연결되는 공통장을, 그/녀들의 일 같지 않은 일에서 본다.


이처럼 김삼순의 말·글은 짧지만 여러 경계를 가로지르며 존재한다. 기사와 문학과 구술과 대항서사 그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자기서사이면서 공동체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서사만도 공동체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위안부’의 정신대의 전업주부의 전문직 엘리트 여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어느 것만도 아니다. 둘 다이면서 동시에 둘 다 아닐 수 있는 자리, 이중긍정이면서 이중부정인 자리, 그 모든 여성의 것이며 그 어떤 여성의 것도 아닌 자리, 그곳에 김삼순의 말·글 혹은 공백으로 여겨지지만 현존하는 재일조선인 여성의 말·글이 있다. (계속됩니다[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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