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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국가인데 18년 동안 올 수 없었던 한국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다문화 사회에서 ‘가려진’ 존재들


*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간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이채희 님은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센터장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호소를 듣고


한국은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 과정이 시민들로부터 인식이 확산되거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에 갑작스럽게 진행된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이니 한국남성과 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 귀환 이주여성들과 동반아동은 완전히 가려진 존재였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있었는데도 결국 ‘귀환’을 선택하게 된 여성들과 그 자녀들의 사연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재정착을 해야 하는 귀환 이주여성과 동반아동을 위한 양국의 제도적인 지원책은 무엇일지 방향을 찾고 싶어서 현지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보니 그들은 경제적 빈곤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해결 방법을 원했다. 


자녀를 동반한 대부분의 귀환 이주여성들은 한국에 합법적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했고, 무책임한 아이 아빠에게 양육비를 받고 싶어 했으며,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고 싶어했다. 우리의 인터뷰 목적은 그들에게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한 상황에 놓인 귀환 이주여성들의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결국, 조사팀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들의 호소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해결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성장한 소년의 이야기


필자가 간 곳은 필리핀이었다.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를 둔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중에 아들과 함께 우리를 만나러 온 여성이 있었다. 어머니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밖에서 기다리는 청소년이 마음에 쓰였다. 인터뷰가 끝난 뒤, 우리는 그를 만나보았다.


한국에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경제활동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필리핀으로 보냈다고 했다. 소년은 이후 외할머니 집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이후 한국에서 미등록 신분이 되었고, 출입국 단속에 걸려 필리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커가면서 소년은 자신이 태어난 코리아라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7년에 한국에 있는 어머니의 지인 도움으로 16년 만에 전화선을 통해 처음 아버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이후 서너 번의 통화를 했지만 이내 연락이 끊어졌다. 소년은 한국으로 들어와 아버지를 직접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필리핀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한국여권을 발급받으려면 큰 액수의 벌금을 부담해야 했다. 소년과 어머니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16년의 시간보다, 짧은 연락이 있은 이후에 아버지와 코리아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졌다. 왜 아버지가 계속 연락을 해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버지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18년만에 한국에 와서 주민증을 발급받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 청소년이 잊혀지지 않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의 희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우리가 받은 정보는 18년 전 당시 가지고 있던 집 전화번호가 유일한 단서였다. 아버지의 핸드폰 번호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대를 달리하면서 약 한 달간 전화 연락을 돌리다가 드디어, 그의 할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손자 이야기를 하자 할머니의 쿵 하는 마음이 전화선 너머까지 전해졌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는 우리 기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는 혹시나 전화번호가 잘못되었을까 두 번 세 번 확인을 하신 후에 전화를 끊었다. 바로 당일, 소년의 고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돌이 채 되기 전에 필리핀으로 보내진 손자를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하신다며 간절한 마음을 전했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는 소년과 어머니를 한국에 초청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걸림돌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힘겹게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작년 8월, 드디어 모자는 한국에 입국했다. 우리가 필리핀에서 소년을 만나고 지원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만의 일이었다.


필리핀에서 성장하며 한국과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소년은 1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미소를 지으며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고모와 통화할 당시, 아이의 주민등록증 발급 통지서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한국에서 태어났고 출생신고가 한국에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민증 발급 통지서가 나왔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주민증 발급 통지서의 주인공을 드디어 찾게 된 것이다.


사실 그를 돕는 것이 크게 어렵거나,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 일은 아니었다. 조금의 관심만으로도 18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일을 한국에서는 지원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단기 비자를 받아서 한국에 함께 방문한 그의 어머니는 현재 필리핀으로 돌아간 상황이고, 현재 소년은 모자가 원하던 대로 아버지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지금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청서를 내고 기다리고 있다.


(이 기사는 일부 요약문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태어난 국가인데 18년 동안 올 수 없었던 한국)

 

 

한국계 미국 이민자 '성'의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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