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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소녀’들과 다시 만난 세계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20. 9. 1. 09:00

‘소녀’들과 다시 만난 세계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과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요즘 ‘레트로’(retro, 복고풍)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1990년대 레트로 감성이 유행이라며 레트로 음악이니 패션이니, 너도나도 레트로 재현에 나서는 모양새다. ‘나의 90년대는 어땠더라?’ 싶은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소녀’들이 떠올랐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달라”고 말했던 <천사소녀 네티>나 <꼬마마법사 레미> 등 마법을 부리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소녀들. 케이팝 아이돌 1세대라 불리는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 처럼 무대 위를 장악한 걸그룹. 그리고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감정을 공유했던 소녀들. 나는 그 소녀들을 동경했고 또 사랑했다. 그들은 날 들뜨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도 ‘소녀’라는 말을 들으면 애틋해진다. 떠오르는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때 그 소녀들이 보여 준 강인한 모습, 뜨거운 열정도 함께 소환된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Get Even, 2020년)과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한정현 지음, 민음사)를 접하게 되었다. 두 작품은 TV 드라마와 소설이라는 다른 장르이며 이야기의 배경과 전반적인 분위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사랑한 소녀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고, 그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거다.


“우린 화내지 않아, 되갚아 줄뿐”


영국의 엘리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겟 이븐>은 청소년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YA(Young Adult)소설 「Don’t Get Mad」 시리즈를 원작으로 두고 있다. 그레첸 맥닐 작가의 원작 시리즈는 <Get Even>과 <Get Dirty> 두 편까지 나와있는 상황이다. 1편에 해당하는 <Get Even>은 2014년에 출판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 중 ©Netflix


올해 공개된 TV 시리즈 <겟 이븐>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서로 인종도 배경도 성격도 다른,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여학생 4명의 비밀 클럽 DGM(Don’t Get Mad, 화내지 않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지 우연한 기회에 한 자리에 있었던 4명의 소녀가 모여 만든 DGM은 사교 모임을 하는 클럽이라기보다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 결사대에 가깝다. 그 임무라는 것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거다.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엘리트 고등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과 따돌림, 선생님의 위계폭력 등의 부정의를 고발하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행동하는 것. 이런 설정 만으로도 관심을 가지기 충분했지만, 고백하건대 이 작품에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키티, 브리, 마고, 올리비아가 서로를 마주 보고 DGM의 구호이기도 한 “우린 화내지 않아, 되갚아 줄 뿐!”(We don’t get mad, get even)이라고 외치는 장면 때문이었다.


어린 소녀였던 내가 만화 속 소녀들이 멋있는 구호를 외치며 ‘평범한’ 소녀에서 전사로, 영웅으로 변신하던 모습에 마음을 뺏겼던 것처럼, DGM이 손을 뻗고 소리를 지를 때 이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소녀들은 어김없이 날 들뜨게 했다.


소녀의 의미를 확장하는 ‘소녀 서사’


<겟 이븐>이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 실사판을 보는 것처럼 소녀들의 활약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소녀’의 의미를 되묻게 하고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소녀’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한정현 작가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와 전작인 <줄리아나 도쿄> ©일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비롯한 소설 8편이 수록된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호명되지 않았거나 입체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들을 다룬다. 국극단에 들어가 소녀 연예인으로 활약했던 이들,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만신, 나체시위를 했던 여공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여학생들, 기지촌 ‘이모’들, 남자이름을 썼던 로맨스 소설가, 시대에 순응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했던 레즈비언,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한 트랜스젠더…


책 속에서 인물들의 정체성은 하나로 한정할 수 없이 겹치고 맞물린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야기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탓에 무대 위의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해 사랑의 말을 건네던 어둠 속의 소녀들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소녀 연예인 이보나’와, 연작처럼 이어지는 소설이 모두 ‘소녀’라는 단어를 전복적으로 확장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들을 새로운 ‘소녀 서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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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 이민자 '성'의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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