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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정인진의 교육일기

꼴찌면 어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5. 13. 15:18

아침에 창문을 열어도 이젠 춥기보다는 시원하게 생각되는 계절이 되었다. 어제 아침, 활짝 창문을 열어놓고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아파트 단지 바로 옆 초등학교에서 마이크가 켜졌다. 학교 담장을 타고 음악과 함성과 구령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맞아, 아이들이 오늘 운동회라고 했지!”
 

운동회에서 릴레이달리기를 하는 어린이들 모습.

다른 소음들처럼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도 한번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할 일을 쌓아 놓고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운동회를 하는 아이도 없고, 누구한테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곳을 기웃거릴 수 없다는 게 더 솔직한 이유다.
 
그러고 보면, 운동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내 단 한번도 운동회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몇 달 전부터 뙤약볕에서 펼쳐지는 매스게임과 고전무용연습도 싫었고, 그 연습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귀를 찢어지게 하는 야단 소리들도 정말 듣기가 싫었다.
 
운동회 때 달리기가 싫었던 아이 
 
아니, 그보다 운동회가 너무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달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리기를 정말 못하는 어린이였다. 죽을 힘을 다해 있는 힘껏 달려봐도 꼴찌, 아니면 꼴찌에서 두 번째를 면한 적이 없었다. 딱총 소리도 공포였지만, 온 동네 사람들로 잔뜩 둘러싸인 운동장 한 가운데를 꼴찌로 달린다는 사실은 나의 자존심을 구겨놓기에 충분했다. 모두 나를, 꼴찌인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달렸다.
 
그래서 정말 많이는 달리는 중간에 “이상한 나라의 삐삐”(1980년대 이후 “이상한 나라의 폴”로 TV방영됨)처럼 시간이 딱 멈춰 바로 이곳을, 이 순간을 벗어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한없이 조그맣고 의기소침한 느낌으로 6년 내내 운동회마다 달리기와 장애물 달리기, 두 가지를 꼬박꼬박 하면서 보냈다.
 
꼴찌일망정, 이 두 달리기가 끝나면 그래도 ‘휴! 이제, 끝났다’ 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잠시만 허락된 느낌이었다.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엄마가 나오면 정말 안 되는데...’
 
이제 내 걱정은 엄마에게로 쏠렸다. 각 학년마다 2~3개 반밖에 없었던 시골마을에서 운동회는 마을잔치나 다름없었다. 모든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다채로운 경기가 펼쳐졌는데, 그 중 하나가 마을 대항 여성계주였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달리는 이 이어달리기에 엄마는 늘 빠짐없이 선수로 나와 달렸다.
 
그렇다면 엄마가 달리기를 잘 했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게다가 우리마을 어머니들은 엄마를 제외하고 다들 정말 잘 달리시는 분들이었다. 출발에서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1등으로 달리는 게임에 엄마가 등장함과 동시에, 네 마을 중 우리마을은 3등, 혹은 4등으로 뒤쳐졌고, 어찌 어찌해 다음 아주머니들이 2등까지 차이를 좁혀 놓곤 했지만, 그 차이가 너무 커 1등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1등을 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엄마 책임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해마다 선수로 꼬박꼬박 등장해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의무적으로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잘 달리지도 못하면서 늘 나서는 엄마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엄마의 나이 일흔이 막 넘은 몇 달 전의 일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불현듯 어린 시절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운동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그런데 왜 그때 잘 달리지도 못하면서,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를 하러 나왔어?”
“왜? 재미잖아!”
“꼴찌면서 뭐가 재밌어?”
“꼴찌면 어때!”
 
천진스럽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은 정말 진지했다. 나는 꼴찌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경기를 즐길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어머니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승부와 관계없이 게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게 되어 안타깝다. 좀더 일찍 알았다면, 운동회를 즐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되어 승부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게임에서 이기거나 지거나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꼴찌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몰랐고, 요즘 우리 아이들도 모르고 있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이 된다.
 
다시 달리기를 할 기회는 없겠지만,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바로 그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야지 다짐해본다. 아직도 우린 달리기 중일 테니 말이다. 
정인진 일다 

[정인진 교육일기] “얼굴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대요!” |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 들여다보기

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yun-story.tistory.com BlogIcon 부지깽이 체육때문에 학교 가기가 싫었어요. ㅠ
    출발선에서 총소리를 기다리는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모든일에 통하는 이야기일지라도 제게는 달리기에서만큼은 안 먹히는 얘기지요. ^^
    2009.05.1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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