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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이 공동체들에 주는 경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성폭력과 성차별을 묵인해왔나?


※ 지리산 산내마을에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두에게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1인 시위 중인 정상순 님의 글을 싣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성착취, 성차별 문화에 경종을 울리고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3월 24일부터 내가 사는 마을 삼거리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정상순)


내가 속한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이하 여성회의)는 2018년 2월, 산내 인드라망 공동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출범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공동체 내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자치 규약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위해 공동체 내부에 ‘성평등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자치 규약은 그냥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여성회의가 성평등 위원회를 지원하는 조직으로 결합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성평등 위원들이 모여 성평등, 성폭력, 성문화 등에 대해 공부를 해나갔다. 그런데 정기 회의가 반년을 넘어갈 즈음, 같은 공동체 내에서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


아니,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하고 자치 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다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는 가망이 없는 것일까?


“분란 일으키지 마”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듣는 말


23분 35초. 전국 성폭력 범죄의 발생 시간차를 환산(2015년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정용기 의원 보도자료 참고)한 시간이다. 최소 23분 35초마다 성폭력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은 10% 안팎에 머물고, 그중에서도 가해자가 기소되는 비율은 다른 강력범죄 중 가장 낮은 44.8%로 절반에 못 미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성폭력 사건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나 짐작하듯이, 유독 성폭력 범죄는 축소, 은폐 비율이 매우 높다. 그러니 우리 공동체가 유독 성인지 감수성이 낮거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유별나서 성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리라고 추측했다면 틀렸다. 오히려 다른 지역, 다른 조직, 다른 공동체에서는 없던 일 셈 치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되는 성희롱 사건이 왜 산내 인드라망 공동체에서는 수면 위로 올라왔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의 서사를 받아 써주는 언론, 가해자의 이름 대신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기억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기 어렵다. 사실 자신이 겪은 일을 명확하게 성폭력 범죄라고 인정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해당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 곁에는 조력자가 있었다. “왜 이렇게 유난스럽게 굴어?”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마.” 이런 말들로 피해자의 입을 막는 사람들 대신에, 이 공동체 내 ‘성평등위원회’가 있고 그곳에서 지원과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해준 이가 있었다.


성희롱 사건이 공론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의 피해를 개인적인 일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성찰 계기로 삼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피해자의 힘이 컸다. 또, 이 사건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성평등 위원회’의 의지를 수용하고 지지해 준 ‘실상사 상임위원회’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성희롱 행위자는 자신이 한 일과 그 일의 파장을 확실히 깨달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인식했다.


먼저 피해자 상담과 성희롱 행위자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후 행위자는 공동체 구성원들 앞에서 미리 준비한 참회문을 읽었다. 다른 구성원들은 자유로운 의견을 피력하는 대신, 묵언하며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평등위원회’는 행위자 교육 10회기와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을 상하반기 각각 1회기 씩 총 2회기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사건의 발생과 대응 과정을 인드라망 공동체가 존재하는 산내 마을 소식지를 통해 공론화하였다. 이 사건이 마을 전체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성평등위원회와 실상사 상임위원회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1인 시위 피켓. (정상순)


‘그들만의’ 평화로운 마을에선 같이 살 수 없기에


그러나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전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OO(행위자)의 가족 보기가 민망하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이러는 거냐’, ‘이게 정말 평화로운 방법이냐?’와 같은 질문 형식을 빌린 힐난을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한다’, ‘OO의 가족 걱정 마시고 본인 스스로 무엇이 민망하고 불편한지 돌아보시라’, ‘같이 잘 살기 위해서 이런다’, ‘당신이 생각하는 평화는 무엇이냐!’고 직언하거나 반문했다. (참고로, 그들의 걱정을 한몸에 받던 OO의 가족은 마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경험은 은폐되고, 가해자의 가해 행위는 축소되기 일쑤다. ‘모두’가 살기 좋은 마을이 아닌 ‘그들만의’ 평화로운 마을이 된다. 성폭력이 은폐되는 과정에서 함께 사라져가는 것이 시민의식, 공동체 의식이다.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평등과 평화와 분배에 대한 감각이다.


사실 10년 넘게 한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성폭력 가해 행위의 주체자 혹은 조력자로 규정하고 이른바 ‘가해자 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막막하고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첫 교육 날, 쌀쌀했던 늦겨울 교육장 안의 싸늘한 공기를 기억한다. 진행자도, 참가자도 모두 시선 둘 곳을 찾느라 어색했던 그 날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해야만 한다는 걸. 가보지 않을 길을 가야만 한다는 걸.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10회기 교육 마지막 날, 참가자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그는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큰 참가자였다.) “청소년 시절에 즐겨봤던 음란물과 제가 했던 행동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가해자(행위자) 교육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의 책임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법적’인 ‘처리’는 분명 중요하지만, 피해자/가해자 개인의 문제에 그치고 공동체의 ‘규약’이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한계가 있다.


가해 행위자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잘못을 누구에게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를 독단적으로 결정할 순 없다. 그리고 ‘한 마을’이 무엇인지, 그 마을이 표방하는 평화가 개개인에게도 평화를 가져오는지, 마을 구성원 모두가 점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시민의식, 곧 평등과 공평과 분배의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다. 하나의 사건이 공동체 전원의 사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책임감을 느끼고 해결하기 위해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같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


“내가 더 피해자예요.”

피해자의 발화가 아니다. 몇 해 전 이웃 마을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관여했던 관리자 급의 사람이 뱉은 말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공론화는 하지 않겠다.”

성희롱 사건 현장에 있었던 마을의 오피니언 리더가 최종적으로 표방한 입장이다.


“한마을에 사는 사람들끼리 이러는 거 아니지.”

농촌 성문화를 돌아보자고 제안한 마을 내 여성주의 문화 활동 단체에 쏟아진 힐난이다.


성폭력 가해자가 마을 청년 기금을 신청했고, 기금 추진위원은 그에게 대상자로서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해당 기금 추진위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냥 (설명 안 하고) 안 주면 안 되나요?”


反차별, 反성폭력을 가장 긴급한 의제로 설정하라


지난주부터 마을 삼거리에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을 마을에 알리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성차별이 N번방이다”를 구호로 정했다.


1인 시위 피켓. (정상순)


성착취, 인신매매, 성폭력이 자행된 n번방 이용자는 26만 명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남성 인구를 2천5백 만명으로 잡았을 때 백명 중 한 명, 남원시 8만 인구 중 4만을 남성 인구로 잡았을 때 4백 명, 산내마을 인구 2천명 중 남성 인구를 천명으로 잡으면 20명이 n번방 이용자로 추정된다.


게다가 n번방 성착취물을 배포하거나 소지한 자(이용만 한 것이 아니라)가 6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산내면이 속해있는 남원시 전체 인구가 8만 명이다. 한 도시 인구수에 육박할만한 많은 남자들이 그 잔인한 아동.청소년.여성 성착취 영상물을 다운받고 소장하고 돌려보았다.


아, 나는 텔레그램이 뭔지도 모른다고요? 나는 아니라고요?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고요? 아니요. 당신이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성적 농담이, ‘밥은 여자가 돈벌이는 남자가’라는 성별 고정관념이, 놀 때는 여자가 끼어야 제맛이라는 성적 대상화가, 내 딸 내 맘대로 안아보지도 못하냐는 당신의 그 경계 없음이 모두 n번방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n번방 이용자가 우리 마을에 몇 명이 있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은 마을의 성문화이고, 일상에서의 성차별이다. ‘고요한 마을에 왜 파문을 일으키냐’는, ‘평화로운 마을의 평화를 왜 깨느냐’는 말씀은 이제 사절하겠다. 이미 오래전에, 여성들끼리 잡지를 만들었을 때도, 여성들이 농촌 성문화를 돌아보고자 했을 때도, 마을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공론화하고자 했을 때도 수도 없이 들어온 얘기다. 그렇게 은폐하고, 미루고, 덮으면서 만든 ‘당신들의 평화’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제는 시인해야 한다.


며칠 전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TF’에 팀장으로 합류한 서지현 검사는 “국가위기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야동 아니다. 음란물 아니다. 대규모 집단 성착취이자 인신매매이며 성폭력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일상의 성차별이다.


부디, 내가 살고 있는 산내가 살만한 마을이길 희망한다. 귀농 1번지, 대안 공동체의 메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뿐 아니라 성차별, 성폭력 없는 살기 좋은 마을 공동체이길 희망한다. 나는 아니라는, 나는 모른다는 선 긋기 대신, 우리 모두의 일이며 그러므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를 공동체 구성원 전원이 느끼길 희망한다.


n번방의 가해자들은 단속과 처벌만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성과 폭력을 구별하고,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페미니즘을 배우고, 정당한 성적 권리가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해야 그때야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산내가 그런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지혜롭게 대응한 경험이 있다.


나의 1인 시위 소식을 듣고, 동참 의사를 밝혀 하루 동안 연대의 1인 시위를 한 마을 분.


시위 나흘째 되던 날. 삼 일이 지나니 공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손 흔들어 주시고 파이팅 외쳐주시고 직접 다가와 음료를 건네주신 마을주민들이 계셨다. 시위를 마치고 돌아와 동네 친구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작업실에서 OO언니랑 언니의 1인 시위에 힘을 보탰으면 좋겠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이야기 나눴어요. 우선 작은 선물을 동네 편의점에 맡겨놓았어요. 그리고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각자가 속한 지역, 조직, 학교 공동체의 가장 긴급한 의제로 성차별/성폭력 반대를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성착취, 성접대 문화를 없애고 성문화 전반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차별이 N번방이다’를 내걸고 시작된 산내 1인 시위는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상순/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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