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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 시위는 우리가 마지막이길 바랐는데…”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과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의 만남



1972년 남성 중심의 어용노조(사용자의 압력으로 자주성을 잃고 회사 이익대로 움직이는 노동조합)가 득세하던 시절, 최초로 여성 주길자를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간 동일방직 노동자들. 그리고 자회사 정책(외주화)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1,500명이 집단 해고된 후, 한국도로공사와 문재인 정부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6개월째 싸우고 있는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 이들이 만났다. 


지난 11월 29일, 평화살롱 레드북스에서 심야책방의 날을 맞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이혜란 감독, 여성영상집단 움 제작, 2006)를 상영했다. 이 자리에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 11월 29일 평화살롱 ‘레드북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 상영 후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만났다. 이날 행사 진행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활동가(맨 오른쪽)가 했다.   ©촬영: 나랑

 

41년째 ‘원직 복직’ 투쟁 중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뒤엎은 사건은, 1970년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공순이’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던 여성 노동자들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신호탄이었다. 동일방직을 필두로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터, 반도 상사, YH 등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민주노조가 결성된 후에도 사측은 남성 조합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여성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키고자 끊임없이 도발했다. 유신정권 또한 “노동자들이 똑똑해지고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이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느꼈고” “민주노조의 싹을 잘라버리겠다”(우리들은 정의파다)고 별렀다. 


‘동일방직’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똥물 사건’은 대의원 선거일 투표를 하러 들어선 여성 노동자들에게 사측 행동대원들이 똥물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국가 중앙정보부가 계획하고 회사와 남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비호 아래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똥물 사건 이후 노동자들은 회사 밖에서 단식농성 등을 이어갔지만 끝내 회사는 124명을 해고했다. 이것이 1978년의 일이다.


▲ 1978년 대의원 선거일, 투표하러 들어선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사측 행동대원들은 똥물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스틸컷.   ©여성영상집단 움 제공


당시 어용노조였던 한국노총 섬유노조 위원장은 124명의 명단을 담은 ‘블랙리스트’를 전국 사업장에 뿌렸다. 이는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었던” 이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취업하러 문을 두드리는 곳마다 거부당했으며 하다못해 작은 식당에서 일하려 해도 경찰이 찾아와 쫓아냈다.


김용자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은 “1983년까지 전투적으로 복직 투쟁을 하는 동안 총 60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됐다”고 전한다. 구속과 구류(1일 이상 30일 미만 수형자를 교도소 내에 구치하는 형벌) 살기를 반복하며 “폭력전과범이 되어갔고” 거리에서, 또 집안에서 “빨갱이, 불순분자”로 몰렸다. “죽을 생각, 죽일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원직 복직의 의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1970년대에 머물러있지 않다. 놀랍게도 이들은 41년이 지난 지금도 ‘해고자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에도 2005년 동일방직 본사 앞 노숙농성, 인천 동일방직 공장 항의방문 등의 장면이 담겨있다. 


이들은 지난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으며 이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들이 당한 해고가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따른 해고’였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해고자 중 일부는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18년 승소했다. “당시 국가의 행위는 이들의 노동기본권, 직업 선택의 자유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서 유래하는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였기에 (국가는) 이로 인해 해고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다. 


그러나 동일방직 사측은 이들의 복직에 대해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국가폭력 피해자로서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 “원직 복직을 한 후 사표를 쓰고 내 발로 나오는 것”이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염원이다. 


‘전원 직접고용’ 요구하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수납원들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한겨울로 접어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0월 9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한국도로공사와 한국노총 톨게이트 노조가 합의했다. ‘해고자 1500명 중 일부 조합원만 직접고용하고 일부는 1심 판결 후에 직접고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합의로 문제가 종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1,500명 전원 직접고용’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과 한국노총을 탈퇴한 노동자들이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 1,500명을 ‘대법원 승소자와 1심 승소자, 1심 계류자’로 갈라치기하고, 톨게이트 요금수납 업무 전체를 불법 파견이라고 한 대법원의 판결마저 부정해버린 합의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천 도로공사 본사에는 여전히 120여명의 조합원들이 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나머지 80여명의 조합원은 광화문 광장 천막을 거점으로 문재인 정부에 면담을 요구하며 매일 청와대로 향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 전투경찰과의 싸움에서 다치고 연행되고 풀려나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 지부장은 말한다.


▲ 정부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하다 경찰에 끌려나오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1,500명이 집단 해고를 당한 후 캐노피 고공농성, 도로공사 본사 점거, 상의 탈의 시위, 민주당 의원실 농성, 청와대 면담 요구 투쟁과 그 과정에서의 수많은 몸싸움, 탄압, 부상, 연행을 겪는 것이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도명화 지부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찰이 그러는데 우리가 진짜 힘이 세대요. 경찰이 ‘밀어!’ 그러면 제가 ‘버텨!’하는데 그러면 정말 하나도 안 밀려요. (투쟁하는 노동자들 중에서) 우리가 진짜 힘이 제일 세고 겁이 없대요.” 


탈의 시위, 더이상 물러설 곳 없는 여성들의 투쟁


1976년 7월, 동일방직 회사 측은 자신들이 매수한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선거를 치러 여성 민주노조를 엎고 남성 집행부를 세우려고 시도한다. 이에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 탄압을 중지하라고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3교대로 공장 안에서 일하고 있던 8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일손을 놓고 뛰쳐나와 문밖에 있던 300명과 합류한다. 거의 전 조합원이 참가한 파업투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농성 3일째, 전투경찰이 대거 투입돼 에워싸기 시작했고 노조 간부들을 지목하며 끌어내려 했다. “언니들 잡혀가면 큰일난다”고 생각한 동일방직 조합원들은 전부 탈의를 했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아비규환이었어”,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지”,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기억나”(우리들은 정의파다)라고 회상한다. 


“탈의 시위는 저희로 끝나길 바랐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톨게이트 동지들이 또다시 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아팠어요. 탈의 시위는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계획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하게 되는 투쟁이죠.”(김용자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김천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본사 점거 이틀째 아침이었어요. 경찰과 구사대가 밀어붙이는데 숨을 곳도 없고, 아무리 둘러봐도 살아날 길이 없더라고요. ‘여기서 끌려나가면 우린 끝이다’라는 생각이 든 그 순간, 탈의하라고 외쳤습니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어요. 아직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은 제가 탈의 시위한 사실을 몰라요. 가족이나 친구들이 알게 되면 제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데 여기 선배님들이 당당하게 서 계신 모습 보니까 힘이 납니다.” (전서정 경남일반노조 칠서톨게이트지회장) 


가장 긴박한 순간, 최후의 저항 수단으로 상의 탈의 시위를 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질질 끌고 가며 “니년들 죽어도 난 감옥에 안 가”라고 말하던 경찰들, 탈의 시위를 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쳐다보며 채증에만 열 올리던 공권력. 이 장면을 보면서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은 40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는지 묻게 된다.


▲ 상영회 마지막에는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함께 ‘우리들은 정의파다’ 노래를 불렀다. 왼쪽 끝이 ‘우리들은 정의파다’를 만든 이혜란 감독     ©촬영: 나랑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백이자 희망이었다” 


도명화 지부장은 “<우리들은 정의파다>에서 조합원들이 일손을 놓고 뛰어나오는 그 장면 보면서, 캐노피에 처음 올라갔을 때 캐노피 밑으로 전국에 흩어져있던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해고자 1,500명이 다 모였던 감동적인 순간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제가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엄청 구박을 받는데, 캐노피 위에서 (100일 남짓) 고공농성을 하는 동안 조합원들이랑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작은 일 하나에도 같이 울고 웃고 했죠. 나중에는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동일방직 조합원들의 목숨을 건 그 3일간의 파업투쟁이 그들의 결속을 더 강화했듯이, 한국도로공사와 문재인 정부의 탄압도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단련시키고 있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우리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백이자 희망이었다”(우리들은 정의파다)고 말하듯이, 톨케이트 요금수납원들이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도 서로의 곁이 되어주는 동료들에게서 나온다. 


도명화 지부장은 대법원의 판결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승소한 상태여서 직접고용이 될 수 있는 위치였지만 현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도저히 다른 조합원들을 놔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도 “(당시) 같이 있다가 친구가 잡혀갈 때, 걔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손을 놓지 않고 같이 구속되는 그런 상황”을 많이 겪었다고 회상한다. “그 어려운 걸 함께 했던 그 친구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음”, “네가 피가 나고 아프면 내가 네 몫까지 대신하겠다는 마음.” 김용자씨는 “이 마음 때문에 지난 41년간을 이어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것 때문에 도망갈 수 없다”고 말한다.


▲ 2018년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활짝 웃고 있다.  © 여성영상집단 움 제공


노동운동 역사를 만드는 여성들, 사회가 화답할 차례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에서 한 동일방직 해고자는 “동일방직이 우리에게 못 할 짓 많이 했지만 이렇게 큰 선물을 준 곳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견뎌낸 친구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공장에 다니느라 공부를 못 해서 무시당했지만 기나긴 투쟁의 세월, 누구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에게 노조를 만나고 나서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었다. 


“제 가슴에 이렇게 열정이 많은 줄 몰랐어요. 노동조합 하면서 저를 발견했어요. 결혼하고 시어른들하고 살면서 내 주장을 펼쳐 보지도 못했고, 하고 싶은 일도 맘 놓고 해 보지 못했어요. 근데 노조하면서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어요. 다시는 이런 투쟁이 저한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전서정) 


“그동안은 ‘안돼’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당하고 살았는데 ‘안돼’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노조 때문이었어요. 전에는 이기적인 면이 많았었는데 노조 활동 하면서 제 주변을 보게 되더라고요. 좀 더 값진 인생을 살게 된 것 같아요”(도명화) 


이런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김용자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위원장은 “41년은 해야지”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41년을 싸워왔기에 죽을 때까지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김용자씨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말도 남겼다. 


“1970년대 당시에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이 우리한테 ‘역사의 주인공이다,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대들었어요. 우린 역사의 주인공 못 하겠다, 밥이라도 먹어야 말이지… 그런데 긴 세월이 지나면서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됐어요.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 다 기억이 될 거고, 시간이 지난 후 나를 돌아보면 이만큼 성장해 있을 거예요.”


▲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는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촬영: 나랑 


이날 상영회는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톨게이트 노동자들, 그리고 참가자들이 다함께 ‘우리들은 정의파다’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하면서 불렀던 노래의 제목이다. 김용자 씨는 “해고당한 후 힘들 때 이 노래를 참 많이 불렀다”고 회상한다. 마침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슬로건도 “우리가 옳다!”이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를 만든 이혜란 감독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우리들은 정의파다’와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우리가 옳다’는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옳다는 자각이자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다. 또한 이 세상을 향해 ‘우리가 옳지 않은가?’하고 건네는 질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화답해야 할 차례”라고 말하며 이들의 투쟁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했다. 


※ 12월 6일 대구지법 김천지원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4천 명에 대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음 주에는 이강래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민주노총의 교섭이 예정되어 있다. (나랑 기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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