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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활동가, 연구자 입 모아 ‘문희상 안 폐기하라’

국익을 명분으로 역사의식이라고는 없는 국회의장의 제안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그간 노력해 온 우리 운동의 정당성, 정부의 명분, 국제사회의 신뢰와 희망을 내부로부터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건 물론, 국내외 시민들의 기대와 열망 배반, 반발과 비난을 야기함으로써 정치의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다. 또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잘못에 대한 집단적 책임은 결국 다음 세대에 계승되어 역사의 짐이 될 것이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 중앙대학교 교수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된 <강제동원 문제 해결 방안에 관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지난달 도쿄 와세다대학 특강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이 제안한, ‘문희상 안’(1+1+α 안이라고도 불리며, 한일 양국 관련 기업, 양국 민간인 등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기억인권재단을 설립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한다는 골자)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이 쏟아졌다.


12월 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16차 수요시위(주식회사 마리몬드 주관) 참가자들이 ‘문희상안’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출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보다도 못한 문희상 안(案)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부와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진행했을 때 시민사회가 분노했던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활동가, 연구자들도 입을 모아 두 정권의 합의가 갖는 문제점을 비판했다. (관련 기사: 한일 ‘위안부’합의, 아시아의 모든 피해자 무시한 것 http://ildaro.com/7480)


대통령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2015 합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며 추가적인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작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이 경제적 보복에 나서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갑자기 ‘문희상 안(案)’이 등장했다.


김창록 경북대학교 교수는 2015 한일 합의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되짚으며 ‘문희상 안’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2015 합의에서 (일본의) 책임은 여전히 ‘법적 책임’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에 머무르고 있고 이건 ‘법적 책임’을 요구해 온 피해자들을 부정하는 거였다. 아베 총리는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공개적으로 ‘사죄와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내는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니라 단지 ‘인도적 지원금’일 뿐이었으며 이건 일본의 ‘가해자’ 위치를 지우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2015 합의에선 진상규명 및 역사교육에 관한 언급조차 없다는 점도 큰 문제를 야기했다.”


“2015 합의는, 아베 총리의 일본 정부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으니 일본군 ‘위안부’는 입에 담지도 말라’는 반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인 주장을 세계 곳곳에서 떠들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인 김창록 교수는 “지금 ‘문희상 안’은 2015 합의보다도 못하다”고 진단했다.


“가해자인 일본이 사죄는커녕 가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진상규명·역사교육·책임자처벌에 대해서 생각조차 없는 상태에서 금전만 지급하려는 건 피해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에게 마지못해 주는 정체불명의 돈을 받게 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가 충실하게 실현되도록 함으로써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 방안에 관한 정책토론회. 왼쪽부터 김민철 경희대 교수, 이상갑 변호사, 김창록 경북대 교수,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 이나영 중앙대 교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력화하는 결과 초래할 것


‘문희상 안’은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인 강제동원은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에 반한다는 점”도 큰 문제다.


“대법원 판결은 청구권협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을 통해 청구권협정 바깥에 있는 미해결 과제를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한 김창록 교수는 “대법원 판결에 의해 손해배상의 의무가 확정된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하고, 그 공모자로 명기된 일본 정부가 피해자의 권리 실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확정 판결에도 불구하고 채무자가 채무의 이행을 거부하면 강제 집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이 대항 조치에 나설 경우, 그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 김 교수는 “한국 정부와 국회는 일본 기업과 정부가 직접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의 권리 실현에 나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대리인이기도 한 이상갑 변호사도 “문희상 안은 헌법 정신 및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 고증에 기반하여 전범기업들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책임을 정면으로 인정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덧붙여 “먼저 선결 조치로 외교적 합의를 일정 정도 이끌어낸 다음, 국내적 조치로서 법률 개정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희상 안이 참고했다는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의 경우에도 기금의 성격, 규모, 출연자, 총액, 배분 방법 등에 대한 사전 논의와 합의 후, 재단 설립 법안을 제정했다. 이런 선결 조치가 없는 채 개정법이 시행된다면 국내적 갈등과 혼선이 야기될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책임만 발생할 위험이 높다. 현시점에서 ‘문희상 안’과 같은 개정법률안을 추진하는 건, 내용적으로도 옳지 않고 타이밍 상 적절하지도 않다.”


국회의장이 ‘가해국 책임 세탁’해주러 나섰나


이상갑 변호사는 “문희상 안이 실질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적고 모순적”이라고 가감 없이 비판했다. 


“위자료 지급 대상을 현재 소송 중인 자 990명과 소 제기예정자 500명, 합계 1천500명에게 1인당 2억 원(원금 1억 원+지연손해금 1억 원)을 지급한다고 하는데, 소 제기예정자 500명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건지 알 수 없다. 거기다 현행 ‘강제동원법’ 및 그 전신인 ‘진상규명법’에 따라 피해 진상조사 및 피해자 결정 등의 절차가 3차례에 걸쳐 이미 이뤄졌고 당사자에게 통지된 상태다. 그 결과 피해자로 인정된 수가 21만8천639건인데 이들 중 1천500명에게만 위자료 신청권을 인정하겠다는 발상의 근거는 무엇인가? 평등권 침해 아닌가?”


기부금을 마련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문희상 안’의 안일함을 꼬집었다. “자발적 기부금으로 위자료를 조성한다고 할 경우, 일본 측이 부담해야 할 절대 금액 또는 비율에 대한 하한선도 없는 게 아닌가? 그게 없다면 모든 부담을 한국 정부가 안을 수도 있는데, 이런 해법이 과연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상임대표도 말을 보탰다. “지금 문희상 안은 한일 관계가 악화된 원인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에서 해결책을 내야 한다고 우기는 일본의 주장을 들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사실 인식, 사죄, 배상, 역사적 교훈 등을 모두 놔두고 단순히 돈 문제로만 해결하는 건가? 한일 양국 기업 및 국민에게 기부금을 받겠다는 것도 가해자에게 면책을 주는 일밖에 안 된다. 우리 국민들은 (일본전범기업) 불매운동하다가 기부금 내게 생겼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김창록 교수는 “일본이 책임져야 하는 일에 한국 기업과 국민이 기부금을 내고 한국 정부가 운영 경비를 부담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책임은 흐리고 한국이 책임을 떠안는 ‘일본 책임 세탁법’”이라고 꼬집었다.


토론자들은 이 안이 국내에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조차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는데 연내 해결하겠다는 문희상 국회의장 측의 계획에 대해서도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이런 자리에 나오기조차 힘들다면서도 발언을 할 땐 강인한 모습을 보인 이용수 할머니. (왼쪽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송기호 변호사, 오른쪽은 성공회대학교 강성현 교수)


피해자의 외침 “일본 정치인의 망언 언제까지 들어야 하냐”


이나영 교수는 ‘문희상 안’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었다. 


①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가해자의 법적 책임을 소거 

②피해자에게 혼란과 고통을 야기하고 (피해자를 1천500명으로 한정함으로써) 내부 분열을 초래 

③반민족주의자들의 논리에 정당성을 제공 

④한일관계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추가 

⑤정치적 책임이 소멸되긴커녕 역설적으로 확장될 것.


고령의 몸으로 4시간 동안 진행된 토론회 자리를 끝까지 지킨 ‘전시 성폭력 반대 인권 활동가’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다. 사죄만 받아달라”며 몇 번이나 목소리를 높이며 분노를 표출했다.


“1992년 6월 25일(본인이 ‘위안부’임을 신고한 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왜 일본이 반성하지 않냐, 일본은 빨리 피해를 배상하라고 외쳐야 합니까? 왜 오히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습니까? (2015년) 합의 때도 ‘이게 무슨 협상이냐’고 했는데, 결국 일본 정치인들은 조금도 변함없이 망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전시 성폭력)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를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희상 안’이 나와서) 지금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일본한테서 꼭 사죄받아서 명예회복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용서 못 합니다. 전 여전히 할 말이 많습니다.”


이날 토론회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강창일 의원, 박지원 의원, 장병완 의원, 천정배 의원, 최경환 의원 공동 주최로 열렸다. 강제동원 피해자, 활동가, 연구자 모두 함께 ‘문희상 안’을 즉각 폐기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문희상 국회의장 측은 이번 주 내 법안을 발의하겠다는 계획을 아직 철회하지 않았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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