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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고통’도 ‘완전한 치유’도 없다

<피해와 생계 사이>⑤ 성폭력 이후, 나의 일상 찾기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의 ‘생계’와 ‘생존’을 키워드로 삼아 성폭력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피해와 생계 사이> 기사를 연재합니다. <피해와 생계 사이>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대안을 모색하는 연속집담회로, 5월부터 매달 새로운 주제로 총 5회 열립니다.  (나랑 기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미투(MeToo) 운동 당시, 거리에 나온 분노한 여성들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피해자는 일상으로! 가해자는 감옥으로!”였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는 성폭력 범죄로 인해 자신의 일상을 잃지만, 가해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한 채 일상을 영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넘어 성폭력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을 통해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을 되찾고 가해자는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함을 주장하는 구호였다.


그렇다면, 성폭력 피해자가 돌아가야 할 ‘일상’은 어떤 것일까? 피해자가 피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회복’이란 어떤 것이며, 그 회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10월 25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집담회 <피해와 생계 사이> 5회차 “성폭력 이후, 나의 일상 찾기”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홀에서 열렸다. 성폭력 피해를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보는 한국 사회에서 가영, 단단, AJS 세 명의 생존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다루고 치유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 집담회 <피해와 생계 사이> 5회차 “성폭력 이후, 나의 일상 찾기”   ©한국성폭력상담소


다른 생존자들과 만나며 상처를 직면할 용기를 얻다


‘춤추는 치료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영은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다. 현재 대학원에서 무용동작 심리치료를 전공하며 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가영은 대학 재학 시절 무용과 교육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던 중, 모 정당에서 일하는 활동가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


피해 이후, 쉼과 치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지만 가영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벌면서 ‘일상’을 유지해야만 했다.


“마트에서 캐셔 알바를 했는데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각했어요. 고객이 몇 번을 ‘저기요, 저기요’ 해야 제가 얼떨결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얼빵한 상태였죠. 속으로 계속 울먹이면서 ‘나 이렇게까지 버텨야 하나, 어딘가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되뇌었지만, 그저 버티고 감내했던 시간이었어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간, 의외로 치유도 바로 그 ‘일상’으로부터 시작됐다. 가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에게 유아발레를 가르쳤다. 첫 수업을 마치고 나온 후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2시간 “멍 때리고” 있을 정도로 고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가진 사랑의 에너지를 받으면서, 가영은 다시 스스로의 마음에 사랑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려 했던 노력이 보답받는 긍정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 외에도 가정폭력 피해자이기도 했던 가영은 어렸을 때의 자신을 ‘무기력하고 우울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성폭력 이전의 일상 또한 ‘폭력’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영에게 성폭력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영에게 이전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준 건 페미니즘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생존자들과의 연결이었다.


“저한테 피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곤란한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다같이 웃음) 지금이 좋아요. 그 사건을 통해 여성주의 언어를 가지게 됐고, 여성주의자들이나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됐으니까요. 여성주의 동료들이나 생존자들의 다양한 색깔이 교차하면서 드러나는 용기가 놀라워요. 저랑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죠.”


성폭력 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면서부터 가영은 “자신의 상처를 다루고 바라보고 직면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했던 치유 회복 프로그램에 보조 치료사로 참여하는 등 ‘치유자’가 되어 다른 생존자들의 회복을 돕고 있다.


“제가 보조 치료사로 참여했던 이번 여름 집단상담에서도 ‘사람 안에 있는 힘들이 서로에게 작용하고 있고 나한테도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힘이 나누어지면서 우리가 만드는 뭔가 풍요로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감동도 있고요.”


가영은 지금이 자기 인생의 ‘전성기’라고 발랄하게 말한다.

 

 

오랜 침묵을 깨고, 가해자를 직면할 만큼 힘을 키우다


“저는 9살에 친족 성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피해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기가 어려워요. 9살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기나긴 삶을 비교해서 피해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게 의미가 없어요. 성폭력 피해를 빼고 저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시각예술가 단단은 30년 전인 1982년에 친족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잔혹한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절, ‘성폭력’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 성폭력에 대해 들어줄 사람도 말해 줄 사람도 없이 단단은 혼자 오랜 침묵 속에 들어갔다. 자신만 “특별한 어떤 사건을 겪은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니까 남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벽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가 고1 때 친구한테 처음 얘기했다. 친구도 아마 성폭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줬다. 단단에게는 “그 경험이 너무 중요했다.”


“그 이후에는 (성폭력 피해를) 말해야 할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말했어요. 성폭력 피해자는 항상 울고 있고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전형적인 상(像)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제가 원하는 걸 적극적으로 요구했고 (상대가 저를) 폄하하면 맞서 싸웠어요.”


성폭력 피해 이후 30년을 보내면서 단단은 “이 조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늘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성폭력 피해자’라는 조건이 자신의 여러 가지 삶의 조건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조건이 항상 족쇄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단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삶을 선택할 때 주저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단단은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오히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전한다.


“친구들이 좋은 대학 가려고 공부할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었을까?’ 생각했고, 친구들이 좋은 데 취직하려고 할 때 ‘왜 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지?’ 생각했어요. 이런 제 조건이 친구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줬어요. 그리고 남들이 사는 삶과 다른 선택을 할 때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터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기 시작한 단단은 “길고양이를 보면서 나를 투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히 도시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데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쉽게 죽임을 당하고…. 여성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2년 동안 고양이들을 잘 돌봤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나를 돌보는 것이었더라고요.”


이렇게 자신을 돌본 힘으로 단단은 2년 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는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에 참가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다.


한편, 법의 힘을 빌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매듭짓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었던 단단은 자신에게 힘이 생겼을 때 가해자를 만나 “사적인 보복”을 했다. 그의 뺨을 수십 대 가격한 것.


다른 가족들이 “그 사람 앞날 망치니까 그냥 조용히 덮고 넘어가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이 낙인이 되고, 단단 또한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됐고 사회적으로도 입지를 다진 후였다. 오랜 시간 치밀하게 전략을 짜며 기다린 결과였다.


“아마 가해자는 자기 부인이나 딸한테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했는지 이야기하지 못하겠죠. 앞으로 길에서 저를 마주치면 피해야 할 거고요. 제가 오랫동안 말 못 하고 혼자 숨어 지내야 했던 그 시간들, 그 굴레를 그 사람한테 넘겼어요. 그게 저의 보복이었습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 집담회 <피해와 생계 사이> 5회차 “성폭력 이후, 나의 일상 찾기”   ©한국성폭력상담소


웹툰 독자들을 만나고 ‘돈’을 벌면서 힘을 얻었다


친족 성폭력 피해 이후의 일상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린 웹툰 ‘27-10’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 AJS. 그는 열 살 때부터 십대 내내 집안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


“가해자와 같은 집안에서 살아야 했기에 분리가 안 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엄마나 친구들에게 이걸 숨기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밖에서는 평범한 친구, 집안에서는 평범한 딸이어야 했죠.” 


누군가가 “너 왜 그래?”라고 물으면 이유를 말할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 그러다 혼자 있는 시간이 오면 오만가지 생각에 잠 못 들고 새벽까지 울기 일쑤였다.


가해자가 직업 때문에 집에 간간이 들어온다는 게 AJS가 그나마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이때다, 하면서” 가장 큰 상처를 가져오면서 다시 곱씹기를 반복했다.


AJS는 20대 중반 들어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집과 가해자로부터 분리해 독립하면서 조금씩 괜찮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독립한 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문득 ‘내가 괜찮아졌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유가 생기니까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내 공간에 갖다 놓고 내가 좋아하는 생활패턴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됐어요.”


그전까지는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그림 그리는 거랑 만화책 좋아해’ 정도의 “얄팍한” 수준이었다면, 좀 더 깊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며 스스로를 설명할 단어가 많아졌다. 이렇듯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회복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된 후, AJS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27-10’을 한 포털사이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 만화를 처음 그리기로 결심했을 때 이 만화는 무조건 무료 플랫폼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 연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웹툰 주인공의 고민이 ‘이 우울함이 괜찮아질까?’ ‘없어지는 때가 올까?’라는 건데 ‘결국 괜찮아지는 사람이 있어요. 괜찮아질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예요. 특히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보길 바랐습니다.”


반응은 엄청났다. 독자들은 연재되는 웹툰을 보면서 댓글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감했다.


“‘상담받으러 가기로 했다’라는 댓글이 달리거나 ‘집을 나와서 쉼터로 가기로 했다’고 메일을 보내온 독자도 있었어요. 나는 만화를 그렸을 뿐인데 그걸 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고 자신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주시는 거예요. ‘난 이 만화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27-10’을 그리고 난 후 만화가로서 굉장히 자유로워졌다는 AJS는 일상을 지속하는 힘으로 “돈”을 꼽았다. “일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는 그는 “독자들이 돈을 결제할 만큼 내 만화를 좋아한다는 게 힘이 된다”고 말한다. 그 돈은 AJS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알아가는 탐구의 여정에, 또 자신을 멋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들에 쓰인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끈질긴 통념을 없애라!


가영, 단단, AJS 이들 세 명의 생존자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 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었다. “성폭력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으며 영구히 훼손된 존재다”, “성폭력 피해자는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성폭력 피해는 평생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할 것이다” 등등.


“성폭력 말하기 대회에서 치마를 입고 굳건히 서서 다른 생존자들과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성폭력 대책위원회 사람들이 ‘다리를 너무 쩍 벌렸다’, ‘그렇게 무리하게 사회 보듯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발랄하면 안 되고 나대면 안 되는 건가요? 피해자다움은 곧 슬픔인가요?”(가영)


“20대 때 연애를 하면 내가 ‘처녀가 아니어서 싫다’고 헤어지자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아홉 살 때 첫 경험을 한 건가요? 그들의 태도가 모순적이었죠. 너무 분해서 쫓아가서 온갖 욕을 다 해 주었어요.”(단단)


“‘전에는 이런 (친족 성폭력 피해 관련) 만화 그렸는데 지금은 왜 이런 만화 그려?’ ‘너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데) 왜 그런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27-10’을 그렸다는 이유로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더 (저를) 드러내려고 해요.”(AJS)


이렇듯 피해자들은 ‘피해’ 그 자체보다도 피해를 바라보는 주변인과 사회의 왜곡된 ‘시선’에서 더 큰 벽을 느끼기도 한다. 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통념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다.


▲ 2018년 열린 14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적어 꾸민 <생존자의 자리> ©한국성폭력상담소


생존자에게 하고픈 말 “스스로를 잘 대해주세요”


이날 집담회에서 세 명의 생존자는 ‘평생의 고통’도 ‘완전한 치유’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한 ‘치유’와 ‘회복’은 피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 이후의 불안정함을 감내하면서 수없이 흔들리더라도 자신에 대해 탐구해 나가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자신만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세 명의 생존자에게, 다른 생존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당부의 말을 물었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잘 버티고 살려면 밥을 잘 먹어야 해요. 제가 20대 때 실연당했을 때 선배가 잘 먹으라고 그러더라고요. 먹으면 살 만하다고. 밥을 열심히 먹었는데 덜 우울하더라고요. 신기한 거예요. 사람도 동물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생체리듬만 잘 유지해도 조금 덜 우울해지고 좀 덜 울 수 있고 힘이 생길 수 있더라고요. 매일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밥 먹는 일부터 잘했으면 좋겠어요.”(단단)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건 엄청난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저를 가해자로 대치해서 분노했던 것 같아요. 이제 가해자를 놓아주고 나의 삶을 사는 게, 가영을 살리는 게 이번 생의 제 과업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자신을 잘살아가게 하면 좋겠어요.”(가영)


“일단 자기한테 잘 해줬으면 좋겠어요. 10대 시절 내내 제가 한 거는 괴로워하기, 괴로워하는 나를 보기가 전부였거든요. 그러다 조금 더 지나고 나한테 잘해주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금 더 단단해졌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한테 먹고 싶었던 거 먹여주고, 하고 싶었던 거 하게 해 주고 전문가가 필요하다면 상담을 해보자 해줘야지. 그렇게 해서 내가 조금 좋아지면 그때에야 남들한테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다들 자기한테 제일 잘해주는 게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AJS)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랑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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