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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년이’ ‘시다 1번’이 아니라 내 이름을 불러준 곳

전태일은 알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당신에게 나랑 기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8월 11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YH 동우회 회원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 해마다 8월 11일이 되면 김경숙 열사 기념사업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가 공동 주최하는 김경숙 열사 추모제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 지난 8월 11일 모란공원에서 열린 김경숙 열사 40주기 추모제에 함께 한 YH 동우회.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제공 사진


이곳에 묻혀있는 김경숙 열사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79년 8월 YH 노동조합의 신민당사 농성 당시,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했다. 최순영 전 YH 지부장은 “동료들을 잘 보살피는 마음이 선한 친구”로 김경숙을 기억한다. 노동조합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좋은 지도력을 가지고 있어서 장차 여성 활동가로 키우려고” 김경숙을 포함해 따로 몇 명을 모아 소모임도 만들었다고 한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성장하는 스물두 살 김경숙들


김경숙은 1976년에 YH무역에 입사했고, 1978년에 본격적으로 노조 활동을 시작해 대의원이 되었다. 사망할 당시에는 스물두 살로, 노조의 조직차장을 맡고 있었다.


YH무역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그는 노동자란 자본가의 종이거나 노예 정도로 생각했었다. 주인인 자본가가 일을 시키면 부지런히 일하고, 주인이 월급봉투를 내밀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는 그런 존재. 그러나 사측이 휴업을 반복하고 동료들이 해고당하는 것을 보면서, 김경숙은 잔업수당과 특근수당, 상여금 등이 처음부터 ‘당연히’ 지급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동료 조합원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김경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YH에서 월급 받으며 일할 수 있었던 게 회사의 베풂 때문이 아니라 노조의 존재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은 김경숙은 더 열정적으로 노조 활동에 참여한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는 단지 임금 인상 투쟁을 하고 수당을 받아내는 기구가 아니었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 년이로 불리며 대접을 못 받고 살다가 공장에 와서는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던 이들에게 민주 노조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렸고, 노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전순옥, 김원 <여공1970, 그녀들의 반역사>에서 재인용)


▲ 김경숙 열사의 YH 무역회사 사원증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제공


스물두 살의 김경숙에게도 노조 활동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직장 관리자도, 노조 간부도 ‘남성’인 사회


해방 이후, 국가는 노조 ‘일반’을 부정하기보다는 한국노총을 지지하면서 때로는 동원하기도 했다. 노조는 생산성 향상에 협조해야 했으며 국가가 정한 한계를 벗어나면 안 됐다. 1972년 유일한 공식 노조였던 한국노총은 공공연하게 ‘유신(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 박정희가 1972년, 장기 집권할 목적으로 헌법의 주요한 부분을 정지시키고 비상조치를 단행하여 국민의 권리를 제한한 체제) 지지’를 선언했다. 어용노조의 대부분은 남성 노동자들이 지도부를 차지했던 ‘남성지배 노조’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다수였던 사업장들조차 노조의 간부는 남성들이 도맡아 했다. 이들은 회사 측이 제공한 뇌물, 신분 보장, 술자리 등을 통해 매수되거나 포섭되었다. 이런 남성지배 노조에서는 조합원 교육도 없었을뿐더러, 조합비는 공제됐지만 그 돈으로 조합이 무엇을 하는지 조합원들은 알 수 없었다. 여성 조합원들은 노조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이러한 노조의 위계질서는 당시 여/남 노동자들의 극심한 임금 차이나 작업장 내 서열과도 맞아떨어졌다. 1979년 섬유노조가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3만8천36명의 섬유 노동자 중 ‘월 7만 원 이상을 받는다’고 답한 사람은 남성 노동자의 경우 100%였으나, 여성 노동자의 경우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 ([KBS 인물현대사] 여공, 유신을 몰아내다-YH사건 김경숙, 2005년 2월 방영)


여성 다수 사업장이라고 해도 작업장에서 반장이나 감독 등 관리자는 대부분 남성이 맡았다. 작업반장이 대부분 노조의 대의원이 되는 시스템에서 작업장의 성별 위계질서는 그대로 노조의 질서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여성 조합원들이 기존의 작업장‧권위를 대표하던 남성들 대신 대의원이나 상집 간부가 된다는 것은 작업장과 노조 질서‧대표 체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2005)


당시에는 노조를 번개처럼 만들어서 고용주에게 팔아넘기는 ‘노조 브로커’들도 많았다. 또 산별노조 본조에서 자기 정파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 단위노조 조직을 돕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노조를 만들고는 해당 노조가 본조 말을 듣지 않으면 노조를 탄압해 무력화시켜 버리기도 했다.


많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노조 간부는 사측과 협조해 자리나 보전하고 앉아 큰소리치고 호강하며 사는 길이었다. 일례로 YH노조 결성 전, 최순영이 건조반 조장 4명과 다방으로 나갔을 때 섬유노조 본조 조직부장이 나와 있었다. 노조 지부장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조직부장은 “지부장은 현장 일을 관두고 아침에 출근, 공장에 별문제가 없는지 돌아보고 신문이나 보고 회전의자만 돌리면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니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란, 조합비로 행세하고 임금교섭은 방석집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당연했다.


▲ 서울 면목동에 있었던 YH무역 공장 옥상에서 친구와 함께. 오른쪽이 김경숙.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제공


남성지배 구조를 뒤엎고 민주노조를 세운 여성들!


이런 상황에서 1946년에 결성된 동일방직 노조에서 1972년 처음으로 여성 노동자인 주길자가 노조위원장이 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거의 ‘경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남성이 지배하던 어용노조를 뒤엎고 민주노조로 갈아치운 여성 노동자들, YH처럼 아예 처음부터 민주노조를 만들고 간부를 도맡아 했던 여성 노동자들.


1972년 동일방직, 원풍모방 노조, 1973년 콘트롤데이터 노조, 1974년 반도상사 노조 그리고 1975년 YH노조 등에서 위원장과 주요간부직을 여성이 맡은 건 그야말로 혁명적 변화였다. 1977년 말에는 전국에 걸쳐 11개 노조, 56개 분회에서 여성이 지부장이나 분회장에 선출되었다.


여성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후에도 남성들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다. 대놓고 “기집애들이 뭘 아냐, 1년도 못 돼서 손들고 나올 거다”, “겨우 반장이나 하던 젊은 가시내가 지부장은 무슨 지부장이냐”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2005)


당시 YH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은 자신이 노조 사무실에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야 니네 지부장 어딨냐?”고 반말로 대뜸 물어보곤 했다고 회상한다. 여성 노동자가 노조 위원장일 것이라는 상상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여성들이 민주노조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지도부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사례가 많았다. 반도상사의 경우, 남성 노동자들이 친(親)사측 조직을 만들어 노조 사무실의 비품 등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1978년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 선거 당시, 사측 행동대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인분을 뿌린 이른바 ‘똥물 사건’도 남성 조합원들의 행각이었다. YH 또한 노조 설립 당시부터 폐업 이후 회사 정상화 투쟁 시기까지 남성 관리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은 줄기차게 여성 조합원들을 탄압했다.


남성지배 노조에선 볼 수 없었던 ‘교육, 참여, 절차성’


여성 다수 사업장이자 여성 민주노조였던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등의 노조 간부들은 서로 친하게 지냈다. 당시 원풍모방 노조 간부였던 박순희는 “YH노조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배운 걸 현장에 적용해서 현장을 변화시키는” 것에 굉장히 뛰어난 노조였다고 회상한다.(다큐멘터리 영화 <꽃다운>, 장희선, 김진상 감독, 2009)


(※ 크리스챤 아카데미: 1965년 발족한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였던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0년대 노동자, 농민, 청년 등을 대상으로 중간 집단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 여성 민주노조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원진레이온 지부장이 섬유 본조 사무처장이 됐는데 어느 날은 나보고 ‘지부장 오래 해 먹으려면 조합원들 교육시키지 마!’ 이랬어요. 하지만 노조는 조합원들로부터 힘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합원들이 모든 걸 알게 해야 하고 조합원들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최순영, 당시 YH노조 지부장)


이근순(당시 YH노조 조직부장)은 “조합원들 중에는 16살, 17살의 어린 여성들도 많았는데 이들을 모아놓고 새벽 2,3시까지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교육했다”고 회상한다. 박태연(당시 YH노조 사무장)은 “모든 조합원이 다 참석해서 소그룹을 짜서 그 일에 대해 자기 의견을 내고 토론했다. 토론 내용은 차트에 다 적어서 식당에 게시했다”고 말한다. “모든 조합원이 참여해서 만들어내면 그 어떤 훌륭한 외부 강사가 와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안이” 나오곤 했다는 것.(다큐멘터리 영화 <꽃다운> 2009)


▲ 지난 8월 10일 녹색병원 강당에서 열린 “YH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40주년,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 토크쇼. 최순영(당시 지부장), 권순갑(당시 부지부장), 이순주(당시 부지부장), 정만옥(당시 대의원)씨의 모습.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중랑마을넷 주최 ©나랑


1970년대 여성 중심의 민주노조의 특징 중 하나는 이렇게 교육과 의견을 모아내는 과정 속에서 남성 노조에서는 보이지 않던 ‘참여와 절차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2005) 조합원들의 주체적인 참여는 이후 YH 노조의 생존권 투쟁이 신민당사 농성으로까지 이어지는데 단단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YH의 휴업, 인력 감축, 폐업 선언에 맞선 농성


한편 YH 장용호 회장과 진동희 사장의 무리한 시세 확장, 거액 부정행위 등으로 1970년에 4천 명에 달했던 노동자들이 1976년에는 1천8백 명으로까지 감축되었다.


1977년 들어 YH무역은 수출 부진을 핑계로 휴업을 반복하며 작업량을 슬슬 다른 하청회사에 주기 시작했다. 노조가 이에 항의하자, 회사는 가발을 만들던 노동자들에게 봉제 작업을 시키면서 불안을 고조시켰다.


그해 10월 회사는 일방적으로 “정부 시책으로 면목동 공장의 주력인 가발 라인(500여명)을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 있는 공장으로 이전한다”고 공고했다. 노조가 대응책에 부심하던 사이, 회사 측은 사표를 써야만 청산공장으로 보내줄 것이며 사표를 내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며 조합원들을 종용했다. 결국, 사흘 만에 430명이 무더기로 자진 사표를 냈다.


노조가 청산공장에 답사를 가 보니 허술한 창고건물에 온통 논과 밭뿐이고 400명이 일할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의 술책으로 이미 몇백 명의 조합원이 일터를 잃은 후였다.


회사의 압박에 YH를 퇴사하고 다른 공장의 문을 두드린 여성들은 “빨갱이 물이 들었다”면서 아예 처음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YH에서 왔다는 게 들통이 나 “조용히 나가라”며 쫓겨나기도 했다. 갈 곳을 잃은 일부는 유흥업소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회사는 휴업과 인원 감축을 계속하다 급기야 1979년 3월, 폐업을 선언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걸려있는데 이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었다. 노조는 4백 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회사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는 기치로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 기동대가 농성장에 난입해 폭력을 휘둘러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조합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5월에 폐업을 철회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강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 “노조가 있어서 다른 기업에서 인수를 꺼린다” 등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일거리도 주지 않았다. 노조는 그간 YH에 무책임하게 거액의 대출을 해준 조흥은행에 대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노동청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등 회사 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관계 기관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발뺌하기 바빴다.


▲ 그날의 주역들, YH 동우회 동지들.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제공


‘우리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자’


8월 6일, 드디어 회사는 저녁 퇴근 시간을 기해 일방적인 폐업 공고를 냈다. 노조는 공장 안에서 회사 정상화를 위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폐업 후 사측이 회사 정문을 폐쇄한 뒤에는 기숙사에 농성장을 마련하고 투쟁을 지속했다. 250명의 조합원이 함께했다.


사측은 기숙사에 “농성 사주자로부터 이탈하여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라”는 사내방송을 하루종일 틀어댔고 단전, 단수를 할 것이며 식사 제공 또한 중단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8월 8일 저녁, 경찰이 깡패를 동원해 강제 해산 시도를 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조합원들은 식당의 식탁, 의자, 걸레자루 등을 끌어내 기숙사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해 방충망에 달린 합판 등을 뜯어 몽둥이도 준비했다.


한편 노조 집행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제2의 농성 장소를 검토하고 있었다. 조흥은행, 노동청, 미 대사관, 명동성당, 각 정당 등이 물망에 올랐고 사전 답사도 했다. 노조 간부들은 “이 싸움은 장기전으로 갈 것이고 이 억울함을 널리 알려야 한다”(최순영)고 생각했다. 언론에 노동자의 ‘노’자도 안 나오던 엄혹한 시절, 세상에 이 투쟁을 알리기 위해선 구속을 각오하고서라도 ”크게, 왕창 깨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 소리가 멀리 갈 수 있다고.


최순영은 ”당시 국가가 민주노조를 차례대로 깨는 계획을 갖고 있으며 ‘동일방직 다음은 YH’라는 소문이 들렸다. 노조를 하나 깨는데 엄청난 손실이 발생하게 해주겠다고 각오했다”고 얘기한다. (3편에서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참고 자료]

*한국여성노동자회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귀] 시즌5-12, ‘70년대 언니들, 어쩌다 노동운동 하게 된 썰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시즌5-13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여성노동자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YH 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40주년,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 토크쇼 참가자 최순영, 권순갑, 이순주, 정만옥의 구술 (2019년 8월 10일 녹색병원 강당. 주최: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사단법인 중랑마을넷, 도움: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다큐멘터리 영화 <꽃다운>, 장희선, 김진상 감독, 2009

*<YH 노동조합사>, 전 YH 노동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형성사, 1984

*<김경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김원, 이매진, 2005

*[KBS 인물현대사] 여공, 유신을 몰아내다-YH사건 김경숙, 2005년 2월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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