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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유죄” 대법원 최종 선고 의미와 남겨진 숙제들

‘피해자다움’ ‘업무상 위력’ ‘여성 노동권’ 쟁점화한 정의의 승리!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김지은 씨가 방송을 통해 피해 사실을 알린 2018년 3월 5일로부터 554일이 지난 9월 9일, 피고인 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간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강제추행이 최종 ‘유죄’로 확정되었다. 지난 2월 1일, 2심에서 공소사실 10가지 중 9가지가 유죄로 인정되어 3년 6개월의 징역형과 성폭력 수강명령 40시간, 취업제한 5년이 선고되었고, 피고인이 항소했지만 이를 대법원에서 기각함으로써 유죄가 확정된 거다.


국내의 미투(#MeToo) 운동의 주요 시발점 중 하나이기도 했던 이 사건의 최종 판결은 사건의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를 지지하는 많은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성폭력 범죄에 관대한 우리 사회에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9월 9일 대법원 판결 직후, 대법원 정문 앞에서 열린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모습.  (일다)


판결 직후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선 “여성의 이름으로 정의를 다시 쓰는 싸움”에서 승리한 기쁨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 승리가 하나의 승리로만 기록되지 않기 위해 아직 바꿔야 하는 것들이 남았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보이지 않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명백한 범죄


피해자 변호인단의 정혜선 변호사는 “사건이 끝나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선고 기각이 아니라 파기환송이 될 경우의 발언은 준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대법원 판결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어 이 판결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위력이 무엇인지, 이미 여러 판례를 통해 축적된 법률적 정의가 있다. 하지만 현실의 위력은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 노골적인 갑질이나 폭력적인 형태를 띠지 않고도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의식할 수도 없는 공기처럼 작동하여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방해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걸 이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력이 성폭력으로 이어지고 성폭력이 반복되었을 때,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야 늦은 시점이지만, 피해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에 도움을 호소했을 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또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재판하기 위해 ‘법원은 어떠한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판단하여야 옳은지’ 이 사건의 재판 과정과 판결이 그대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정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 판결을 위해선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고, 법관은 합리적인 의심을 해가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탐구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의 잣대는 피해자에게만 가혹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피고인의 진술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었다.


기자회견장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는 정혜선 변호사의 모습.  (일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의 은밀한 프라이버시, 인간관계, 일상의 기록들 모두 철저하게 검증 받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건의 실체를 발견한다면 기쁜 일이지만, 가해자에게 온당한 처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니 오롯이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묵묵히 감당하라고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법원의 판단만큼이나 사회의 인식 변화도 중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이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활동가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피해자가 자신의 이웃들과 자신의 공간에서 자기 일을 하며 지내는 일상이 시작되는데, (가해자의 징역형이 끝나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 두려움과 위력에 휩싸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 혼자 해내야 하는 것도 아니”라며 “우리 사회에 던져진 숙제이자 미션”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김혜정 활동가는 언론과 검찰, 그리고 시민들이 해야 할 일도 세부적으로 제시했다.


검찰은 “피해자에 대한 악성 거짓 모욕 댓글을 작성하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고발한 댓글 작성자를 기소할 것.” 언론은 “성폭력 피해자의 얼굴이나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성폭력 피해 보도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과열된 취재 경쟁으로 피해자의 업무 시 얼굴을 다 띄웠던 걸 즉시 삭제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할 것.”


시민들에겐 “피해자가 한 사람의 노동자이자 직장인, 학생 등으로 살아왔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함께 해 달라. 일터에서, 주거지에서, 또 다른 장소에서 이웃으로 만났을 때 따뜻한 마음으로 교류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걸로 연대해 달라”는 부탁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성폭력을 다루고 있는 책, 자료, 캠페인, 법과 정책과 예산, 피해자지원 시민단체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일”의 중요성도 말했다. “함께 쌓아 올린 경험과 지식을 배우고 참여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단단히 지지하고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수록 ‘가해자 중심 사회’가 들어설 여지는 좁아진다.”


2018년 8월 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의 1심 선고공판 이후 법정을 나서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습. ⓒ일다


안전하고 성평등한 일터를 만들어가는 신호탄 되길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이렇게 가해자가 정당하게 법의 처벌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이 사건 하나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이 사라지고 성평등한 일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자회견장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을 넘어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서울여성노동자회 손영주 회장은 “작년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에 접수된 성희롱·성폭력 상담은 819건, 가해자의 78%가 사장과 상사였다는 점, 피해자 중 53%가 ‘해고, 부당인사, 직무 미배치, 집단적 따돌림 등의 불이익 조치를 경험’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2016년 성희롱·성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적 조사의 결과, 사건 발생 이후 해당 직장에 재직 중인 피해자는 28%에 불과했다는 점”도 설명했다. 업무 관계에서 성희롱·성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은 다수가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여성노동자들이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노동권 및 생존권을 위협하는 동시에, 건강한 일상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더이상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통을 받고 일터를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피해자들에게 ‘이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지지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손영주 회장의 말엔 성폭력을 ‘어떤 개인의 일’로 치부하는 것을 넘어서서 잘못된 구조를 바꾸고 안전하고 성평등한 일터를 조성하기 위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안희정 유죄를 확정한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피켓을 날리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일다)


성폭력 사건에서의 ‘피해자다움’에 질문을 던지고, ‘업무상 위력’이 어떤 의미인지 논의를 끌어내고, 가해자 중심 시각을 깨고, ‘여성 노동자’의 위치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안전한 일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사의 한 챕터가 만들어졌다.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 만들기에 동참할 때 변화는 곧 올 것이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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